여불위 열전 7 - 일자천금(一字千金)

2009. 10. 15. 00:38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조나라에서의 사건사고는 모두 끝나고 이제부터는 진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 이듬해 기원전 251년 56년간이나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던 진나라 소양 왕이 고맙게도 죽고 드디어 안국군이

효문 왕이라고 하여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만약 더 오래도록 선왕이 살았다면 여불위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겁니다.

안국군의 부인인 화양 부인은 당연히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진나라로 돌아온 자초는 화양 부인을 만나 "오마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오매불망 오마니와 떨어져 고통과

절망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다 이제야 오마니를 편히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 오마니를 제가 모셔야 하는데 조나라에서의 제반 여건이...." 하는데?

 

자초 이인이 입은 옷이 바로 화양 부인의 고향인 초나라 복식입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준비입니까?

정말 여불위 상단에서는 이런 작은 코디까지도 신경 쓰며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니 화양 부인도 감동을 먹을 수밖에요.

혹시 저 녀석을 내가 정말 낳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완벽한 코디에 완벽한 초나라 말투까지...

화양 부인이 佳人을 쳐다보며 잠시 멍하게 바라보며 혼동에 빠진 모습을 보입니다.

애도 낳아보지도 못한 화양 부인이 말입니다.

 

여불위 그룹에서 정말 공들여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작전의 승리요. 대흥행으로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화양 부인이 왕후에 올랐으니 그의 양자인 자초 이인은?

양자인 이인은 화양 부인의 고국인 초나라를 상징하는 자초라는 이름을 얻어 당연히

태자가 되고 자초의 아들인지 아닌지 모를 공동으로 노력해 만든 아들 영정의 사부로 여불위를 임명합니다.

화양 부인의 작은 베개송사가 진나라의 태자를 만든 대단한 역사적인 일이지요?

 

이제 여불위를 위한 밥상이 차려졌습니다.

여불위는 이제 성큼 성공의 다리를 건넜습니다.

여불위는 거하게 차려진 밥상머리에 앉아 숟가락질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밥상이 나중에 제사상이 될 것이라고는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지요.

최고의 가치투자라고 생각했지만, 최악의 깡통도 될 수 있다는 현실이 때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요.

권력이란 이렇게 세상 모두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경우도 있답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안국군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에 굿 바이를 외치고 저 세상으로 갑니다.

아비가 56년간이나 왕위에 있었으니 기다리다가 그동안 진이 모두 빠졌나 봅니다.

이 말은 왕후인 화양 부인이 1년 만에 태왕후로 전격 승진되는 동시에 뒷전으로 밀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화양 부인이 슬퍼하면 반드시 기뻐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죠.

 

세상이 부모가 일찍 죽어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태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행복한 일이 아비가 일찍 죽는 일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선왕이 오래 살아 슬펐던 많은 태자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진리와는 다른 이상한 법칙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아비가 오래도록 함께 사는 게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권력이란 이렇게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륜마저도 파괴하는 괴물입니다.

아!!! 아빠 황제와 오래도록 살고 싶다는 유비의 띨띨한 아들 아두가 있었네요.

 

중국 청나라 강희제의 재위 기간이 61년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의 아들은 아마도 순서를 기다리다 숨 넘어갔을 겁니다.

그의 슬하에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었다고 하니...

 

이렇게 왕성한 능력으로 아들을 생산해 놓고 그 차례를 기다리는 자식들에게 

61년간이나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하는 일은 아비로는 정말 행복한 일이었을까요?

이렇게 아비가 마르고 닳도록 황제 자리에 앉아있으면 아들은 순서를 기다리다 기가 막혀 죽을 겁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인사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가버리니 다른 사람들이 태자의 자리에 대한 견제구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고 다른 공자들은 지붕만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뭐... 호시탐탐 내게도 언젠가 기회가 돌아올거야 하며 남은 아들들이 워밍업도 시작하지 못했잖아요.

우리말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초 이인이 닭이고 나머지 20여 명의 공자는 모두 개가 되는 겁니까?

그때 중국 진나라에서는 완전 개판이 벌어졌습니다.

한 마리 닭 때문에 20명의 개...

 

자연스럽게 태자인 자초가 얼떨결에 새로운 진나라 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답니다.

여불위는 화장실에 앉아 속으로 킥킥거리며 "투자 끝~ 지금부터 회수 시작~"이라고 외쳤을 겁니다.

 

사실 여불위도 일이 이렇게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는 저도 그랬으니까요.

어쩌면 드라마처럼 이렇게 극본처럼 진행된다는 말입니까?

 

장양 왕은 여불위를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승상(丞相)의 자리에 앉히며 문신후(文臣侯)에 봉하고

華족의 프랜차이즈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게 됩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고 사람에 투자한 비용을 이제부터 뽑게 됩니다.

낙양의 10 만호라고 하면 지금 서울로 치면 한강 이남의 모든 땅을 봉토로 주었다는 말입니다.

 

승상에 제수되면 제일 먼저 청문회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 청문회를 했어도 아무 문제없었을 겁니다.

거상 출신이면 돈 문제는 천문학적으로 많아도 누가 시비도 걸지 않지만 몇 십억만 되면 물고 늘어지지요.

우리나라의 정치인 말입니다.

또 킹 메이커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부은 사람에게 뭐라고 하겠어요?

 

학군이 좋다는 함양의 8 학군에 여불위가 위장전입을 했다고 해도 누구 하나 입도 벙긋 못합니다.

집이 낙양에도 있고 한단에도 있고 함양에도 있어도 누가 태클 걸겠어요.

누가요?

우리나라 기자 말입니다.

 

탈세 문제도 자기가 하면 절세이고 남이 하면 탈세가 되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내로남불이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맞는 말입니다.

내가 하면 누구나 하는 통상적인 관례고 남이 하면 부정한 방법입니다.

10만 호의 식읍과 승상의 자리는 그간의 일을 봐서는 별로 분에 넘치는 대우도 아닙니다.

원래 공동 대표를 제의 받았으니까요.

 

장양 왕이 처음에 진나라의 반을 나눈다 했고 조희 희롱사건으로 15% 추가하기로 했는데...

이제 위의 사진에 보이는 9 줄의 9 정이 박힌 궁궐의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가도 누가 뭐라지 않습니다.

저곳 문 뒤에 급하면 잠깐 실례해도 문지기는 먼산만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보잘것없던 그를 위대한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어준 여불위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이에 답하듯이 여불위는 왕을 보좌하며 왕조를 순탄하게 운영했다고 합니다.

욕심을 내기보다는 더 잘 키워 더 많이 빼먹겠다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이는 여불위가 무척 잘 처신했다고 여겨집니다.

 

일찍이 장사로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행정과 군사 모든 면에서 모난 곳 없이 처리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기에 세상 살아가는 처세술이 대단한 여불위입니다.

정말 하늘이 내린 준비된 승상이 아닌가요?

 

이런 여불위 덕분에 전국 7 웅이라는 G7 나라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성장하여

훗날 아들인 영정이 천하를 통일하는 주춧돌을 놓게 됩니다.

진시황의 중원 통일이란 진시황의 힘이 아니라 친부였을지도 모를 여불위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특히 몽오(蒙骜)라는 문관의 병략적(兵略的) 재능을 간파한 여불위가

그를 장군으로 발탁하여 큰 성과를 이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여불위가 있었기에 진나라는 일취월장하게 되었지 영정의 힘만으로는

중원 통일은 불가했을 겁니다.

당시 한창 잘 나갈 때 여불위는 집안의 노비가 만 명에 이를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네요.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장양 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인 B.C. 247 뭐가 그리 바쁜지 '정아 안녕~ 세상아~ 안녕! 조희 너도 안녕~' 하며 떠납니다.

아비가 빨리 죽어 또 행복한 일이 연이어 터집니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이 여불위를 위해 이렇게 빨리 진행된답니까?

그러나 빠른 게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때 장양 왕의 나이 겨우 36세였고 조희는 이제 30에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합니까?

여자로서는 이제 꽃이 피기 시작하는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관조하고 음양의 원리를 터득하기 시작할 나이에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이런 일은 남보다 뛰어난 왕성한 욕정을 지닌 조희에게는 정말로 잔인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젊은 여인 조희를 너무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은 왜 아름다운 조희를 그대로 순리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겁니까?

 

장양 왕이 일찍 요절한 이유 중에 하나가 장양 왕이 감당하기 어려운 조희의 고난도의 현란한 기술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을 통하여 진나라 시골에도 퍼집니다.

찌라시가 증권가에 나돌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이곳에 자세하고도 상세하게 옆에서 지켜본 듯 기술하고 싶지만...

제가 입이 있어도 말을 모두 하지 못하고 손이 있어 글을 전부 쓰지 못하는 아픔이 있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이제 왕성한 여인의 욕정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내는 오직 여불위뿐입니다.

다시 아~~ 옛날이여~~ 를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왜?

이 두 사람은 조희가 지금의 위치에 있기 전에 이미 모든 신체검사와 검문검색을 끝냈던 사이였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비밀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요.

 

아비라고 칭했던 이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정이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진시황이라는 영정이 겨우 13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래도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왕은 여불위를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작은아버지)라 칭했답니다.

사실 친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불위의 애첩이었고 장양 왕의 부인이고 두 남자와 운우의 정을 나누며 政을 낳았지만, 情에 굶주린 여인인

조희는 어찌 되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이야기 전개상 꼭 필요한 일이기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언급해야 합니다.

 

물론 왕후에서 서방이 죽자 태후가 되었겠지만...   

그렇습니다.

거침없이 여불위와 다시 아! 옛날이여~ 하며 정을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情이란?

쌓이면 쌓일수록 커지고 깊어지는 게 바로 정입니다.

천하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가 조희의 외로운 밤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불위 말고는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 태황후의 마차가 야심한 시각에 수시로 궁을 빠져나와 여불위 승상 집에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진나라 왕조실록에 그대로 기록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청문회를 열면 다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방문 목적을 확인해 본 결과 국사를 논하기 위함이라고 했기에 목적 자체는 문제는 없습니다.

 

하긴 서른 갓 넘은 푸로 선수를 은퇴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 나이의 푸로란 가장 완숙한 경기력을 지닌 최고의 절정기가 아닌가요?

일찍 은퇴를 권한다면 그건 죄악입니다.

 

조희라고 하면 물 좋은 한단의 가장 핫한 여인이 아니었나요?

그러나 세상 물정에 밝은 여불위는 고민이 시작됩니다.

정말 세상 보는 눈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훗날 조희와의 잦은 만남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요.

 

그 무렵 여불위의 집에는 하인만 1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투자한 것에 비하면 시민단체에서

조차 뭐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어린 왕을 대신해 집정하다 보니 여불위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졌지요.

사실 황제란 궁 안에서만 면이 서지 궁 밖의 일은 상국이 모두 처리하니 누가 진정한 황제입니까?

더군다나 영정은 아직 나이도 어린 풋내기인걸요.

 

여불위는 문화활동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위(魏) 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 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 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그리고 제(齊) 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저마다 빈객을 늘리기 위해 경쟁을 벌였을 때입니다.

이에 질세라 여불위도 이 경쟁에 참여했고, 여불위는 3천 명의 빈객을 두게 됩니다.

진나라는 그래도 전국칠웅에서도 제일 잘 나가는 나라가 아닙니까?

 

이 빈객들에게 저마다 문장을 짓게 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12기(12紀) 등 모두 20여 만자에 이르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을 천지, 만물, 고금의 사건을 모두 망라했다 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아마도 지금으로 치면 브리태니커 정도는 되었지 싶습니다.

 

 그 책을 함양의 성문 입구에 진열하여 놓고 여러 나라의 빈객과 유세객을 불러들여 책의 내용 중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했답니다.

이 자신감과 오만함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여씨춘추에 대한 자부심이었는지 오만의 극치였는지...

이를 후세 사람들이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고 하더군요.

지금 중국에서 가장 귀한 책이 바로 사마천이 쓴 사기입니다.

정작 동이 출신인 삼황의 시기는 빼고 오제본기부터 기술했지만요.

여씨춘추는 사마천의 사기를 능가하는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만약 남아있다면 황하 문명의 華족과 장강 문명의 夏족, 그리고 요하 문명의 시원인 동이족에 관해

자세한 내용을 확실하게 구분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글자를 빼거나 더할 내용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여불위가 자기 이름을 걸고 "여씨춘추"라고 했는데

만약 태클 걸다가 잘못되면 빠떼루가 아니라 목숨이라도 내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佳人이라면 틀림없이 태클 걸고 들어갔다고 묵사발이 되었겠지만...

 

요즈음처럼 민주화가 되어도 비록 작은 회사일지라도 사장의 제안에 딴지 걸다가 왕따 당해 회사생활이

힘들어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제 경우는 아닙니다.

 

내일은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노애(嫪毐)가 여러분에게 인사드리겠다고 대기 중입니다.

이놈이 물건입니다만, 노애 이야기는 그냥 수박 겉핥기 정도로만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제대로 썼다가는 필화사건에 휘말려 정말 큰일 납니다.

 

노애 이야기를 佳人이 슬쩍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영정의 아비 자초 이인이 36살에 죽음으로

여불위의 연인 조희는 여자로는 최고의 전성기라는 이제 겨우 30살의 젊은 청상과부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그게 佳人 잘못이 아니잖아요?

두 사람이 평범하게 살았다면 왜 제가 욕을 먹으며 그런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겠어요? 그쵸?

 

그럼 내일 노애를 만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