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1. 00:29ㆍ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그러나 이런 비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드디어 밀고가 들어옵니다.
세상에 비밀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비밀이 있다면 누구나 알지 못하기에 비밀이 아니죠.
어느 날 노애는 조정 대신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대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맙니다.
남자에게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장소가 술자리지만,
반대로 가장 치명적인 장소도 사실은 술자리입니다.
노애가 중대부 안설(顔泄)과 도박을 하다가 연전연패하여 벌주를 계속해서 마셔
고주망태가 되어 버렸고 술에 취해 내기를 계속하자고 조르는 노애의 청을 안설이
거절하자 분노한 노애가 안설의 멱살을 잡고 손바닥으로 뺨따귀를 올려 부쳤고
안설이 지지 않고 노애의 관 끈을 잡아당겨 끊어 버렸습니다.
노애가 길길이 날뛰며 두 눈을 부릅뜨고 안설을 책망하기를...
술에 취한 노애는 자기 의견에 따르지 않는 대신을 향해 던진 말...
"진시황의 계부나 다름없는 내게 너 같은 한낱 미천한 네놈이 어찌 건방지게
무례할 수 있단 말이냐! 워차오!"
네... 바로 계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황제의 모친인 태후와 사통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머리가 전혀 따르지 못했던 미남계의 실패작입니다.
어제 미남계는 여러 조건이 필요 없고 단순 무식하게 힘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말
취소하고 싶습니다.
미남계에서도 지혜는 절대로 필요하다는 교훈을 노애를 통해 얻었습니다.
사실 조희를 모시던 많은 사람이 노애와 조희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이들의 권세가 워낙 강했기에 모른 체하며 지냈지요.
그래서 진시황에게 노애에게 구타를 당했던 중대부 안설(顔泄)이 노애가 했던
계부라는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대로 전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럴 때는 없던 이야기도 꾸며서 부풀려 전하게 되지요.
"폐하! 또 다른 아빠가 있수? 얼레리 꼴레리 폐하는 아빠가 셋이래요~~"하면서...
노애가 환관이 아니고 건장한 변강쇠라는 것과 태후와 정을 수도 셀 수 없이 통하였고
두 사람 사랑의 흔적인 아들을 둘씩이나 낳고 밀실을 만들어 몰래 키우고 태후와 모의하여
'왕을 시해하고 자신들의 아들로 후사를 삼자!' 라는 이야기도 해버렸습니다.
시황제가 비밀리에 감찰부에 지시하여 뒷조사를 해보니 맞습니다.
이 사건에 어머니는 물론 상국이라는 여불위도 깊숙이 관련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내리는 형벌은 통상적으로 3족에서 9족을 멸하는 것입니다.
오잉~ 그런데 해당되는 인물이 중부라고 불렀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3족을 멸하게 되면 시황제 자신도 죽어야 합니다.
이럴 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빽이 없어 배경이 없는 사람만 죽어주는 게 세상의
이치로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꼬리 자르기라고 하지요.
조조도 휘하 장수에게 전쟁 중일지라도 민초가 짓는 농사를 망치게 하면 목을 치겠다고
했지만, 어느 날 자신이 탔던 말이 행군 중 밭에서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자 말이 놀라
밭으로 뛰어든 적이 있었지만, 머리 대신 머리카락만 자르는 것으로 대신했잖아요.
세상이 불공평하다고요?
정말로 순진하십니다.
이렇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 따라 들이대는 잣대가 다른 게 공평한 것입니다.
B.C 238년 진시황 정은 옛 수도 옹에서 가관의 예를 행하러 갔는데
이때를 틈타 노애가 정이 머무는 궁전을 기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밀고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정은 예상했던 기습에 간단하게 반격하고
오히려 함양에서 노애의 반란군을 손쉽게 제압하게 됩니다.
노애의 3족은 모두 죽고 그 녀석과 어머니인 태후 사이인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생 두 명도
죽고 노애의 가신들도 모두 가산을 몰수당하고 촉 땅으로 추방되며
노애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노애의 가신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고 유빽무죄, 무빽유죄'라며 투덜거리고 갑니다.
그러기에 줄을 잘 서야 해피할 텐데...
이 과정에서 노애를 가짜 환관으로 들인 것이 여불위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정은 이를 빌미로 여불위도 죽이려 했지만, 선왕을 모신 공적을 높게 취하고 빈객과
유세객 대부분이 여불위를 옹호하고 나섰기에 상국의 지위만 파면하는 데 그쳤습니다.
참말로 진시황 정은 효심도 깊고 정도 많은 사람입니다.
노애는 목이 잘린 다음 사지를 말에 묶어 찢어 죽이는 위의 그림 속에 보이는 거열(車裂)이라는
형을 당하고 말았는데 노애는 저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늘이시여~~ 왜 제게 너무 훌륭한 물건을 주셨습니까? 그냥 조금만 튼실한 물건을
주셨더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고 예쁜 색시 만나 알콩달콩 평생을 사랑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했을까요?
어머니인 태후 조희는 '열심히 즐긴 당신 떠나라'라고 옹 땅으로 추방됩니다.
옹녀에게는 옹 땅만큼 좋은 곳은 없지요.
만약 시황제가 효자라면 여불위가 한 것처럼 노애를 궁형에 처한 척만 하고 조희에게 보냈듯이
노애도 죽인 것으로 하고 어머니와 함께 추방을 했더라면 후세 사람들이 효자비라도....
문제는 상국인 여불위만 남았습니다.
죽이고 싶었으나 그동안 선왕을 왕으로 만들어 모시고 자신의 애첩마저 달라고 한다고
선뜻 내어주며 자신도 태자로 만든 후 왕위에 올리며 간이나 쓸개 등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지금의 자신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겠어요?
이런 사실은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불위에게 빈대처럼 붙어있던 많은 빈객이 벌떼처럼 옹호하는 까닭에 차마 죽이지를
못하고 게다가 중신들마저 여불위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기에 진시황에게
간하기를 "여불위는 선왕을 도와 사직에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하물며 노애와는
대질 심문도 벌이지 않아 그가 토설한 말의 허실도 확인할 수 없는데 그를 연좌시켜
죄를 묻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하기에 결국, 상국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역시 '열심히 해 먹은 당신도
떠나라'라고 하남 땅으로 보내버립니다.
하남 땅이 원래 여불위의 홈 그라운드였지요.
1년 후 여불위 주변에는 또 많은 빈객과 사신들이 모이자 시황제는 변란이라도 일어날까
불안하고 이는 여불위가 자중했어야 함에도 자꾸 과거의 화려했던 생각만 했기 때문입니다.
진시황은 권력이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하지만, 하남으로 추방된 여불위에게
자꾸 빈객들이 모이는 것을 두렵게 생각합니다.
특히 여씨춘추에서 밝힌 여불위의 사상은 진시황과 너무나도 첨예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의 천하이다.”라는 여씨춘추의 말을 빌려 여불위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제창했다고 하네요.
제나라의 맹상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나라의 평원군을
전국시대 후기의 사공자라고 하지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왕족으로 돈이라면 남부럽지 않았고 권력도 짱짱했고
많은 빈객을 거느리고 제왕에 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전국시대에는 사공자는 경쟁적으로 빈객을 모아 싱크탱크 역할도 하고 자신의 세를
불렸는데 그 빈객의 숫자가 각각 3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진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기에 여불위가 빈객을 모아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 빈객 출신으로 진시황을 도와 나중에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이사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불위를 복직하라는 상소마저 끊이지 않고 올라오자 여불위를 반란의 씨앗이라고
여긴 진시황은 결국 글을 써서 편지 한 통을 친서라고 여불위에게 보냅니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하남의 10만 호의 식읍을 갖고 있는가?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친척관계가 있기에 짐의 중부라는 호칭을 얻었는가?
그동안 열심히 해 먹은 그대는 가족을 데리고 촉 땅으로 떠나라!"
당시 편지를 받은 여불위가 골방에 앉아 훌쩍거리며 이렇게 말을 했을 겁니다.
"따식 많이 컸네~ 건방지고 웃기는 자식이네?
장사꾼이 이문을 남기지 않고 사람을 남긴다고?
웃기고 자빠졌어~~
내가 전 재산을 털어 애비를 왕으로 만들었지만, 겨우 식읍 10만 호를 받았기에
뭐가 잘못인가? 처음 공증 설 때 아비와 나는 나라를 반으로 나눈다고까지 했는데
공증서류 까발려 버려? 다 터뜨려 버릴꼬얌~~
친척관계?
그래 유전자 검사라도 받아보자.
네가 누구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났는지...
니 친애비가 진짜 누군지.
너를 낳아 준 어미는 또 누구냐?
자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후레자식처럼 굴고 있네...
모두 까발리면 세상만사가 모두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것들이 까불고 자빠졌어~~"
그리고 중국 배드민턴 선수가 했던 "워차오(我操)!!!"라고 두 주먹을 쥐고 소리쳤겠지요?
사실, 여불위 무덤도 남아있고 진시황 무덤도 남아있기에
유전자 검사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열심히 해 먹은 당신 촉 땅으로 떠나라고?
내가 그동안 투자한 게 모두 얼만데 그거 조금 해 먹었다고 나를 비난해?
내가 사냥개냐?
토사구팽 당하게.
많이 컸다고 위아래도 구분 못하고...."
여불위는 시황제의 칼날이 점점 자신의 목을 향하여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비참하게 처형당할 것을 거부하고 독주를 마시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천박한 남의 손에 목숨을 거두기보다는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목숨을 거두겠다는 의미겠지요.
죽기 전에 여불위가 제게 상의를 합디다.
"그래도 한 순간은 모든 사실을 밝혀볼까 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혀
진나라만 아니라 중원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입니다.
세상의 역사 기록조차 모두 바꾸어야 하는데 그 혼란을 무엇으로 감당하시려고요.
그런 일을 여불위 당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모든 비밀을
가슴에 혼자 안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만 가슴에 담고 갔던 일들이 드라마 대사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어쨌든 여불위는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는 많은 재산을 한 사람에게
모두 투자를 한 세기의 도박꾼인가? 아니면 선견지명이 있는 전형적인
벤처정신이 투철한 장사꾼인가?
그로 말미암아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으며 또한
많은 제도와 유적과 유물을 남긴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죽은 후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지금의 뤄양에 있는 북망산이라는 곳에 묻혀있습니다.
뤄양의 상채 마을이 여불위의 고향이라고 했으니 죽어서는 고향 땅에 묻혔습니다.
우리의 성주풀이에 나왔던 바로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이라는
노래 속의 장소입니다.
예전에 북망산에 갔을 때 여불위의 무덤이 있는 사진을 찍어 둔 게 있어 여기에 올립니다.
북망산은 낙양성에서 딱 5km 떨어진 곳이었으니 정확하게 중국의 거리로는 10리가 맞습니다.
지금은 그곳 북망산은 고묘 박물관으로 변해 무덤 대부분은 일반 지역으로
변했고 일부는 박물관으로 만들어 무덤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더라고요.
지하 무덤 안에 들어가면 많은 무덤군이 있어 돌아다니다 보면 위의 사진 속에
보이는 저 녀석이 문을 빼꼼히 열고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합니다.
따라 들어가면 어찌 될까 궁금했지만, 중국 강시나 좀비가 될까 봐
사양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니 고묘 박물관 지하 무덤 안에는 구경거리가 제법 많지만
따라 들어갈 곳과 들어가지 않을 곳이 있습니다.
색쇠이애이(色衰而愛弛)...
'아름다운 용모로 총애를 받는 사람은 용모가 쇠잔해지면 총애도 시든다.'라는
말인데 그가 화양 부인에게 한 말이지만 마찬가지로 권력도 실체가 무상하여
구름과 바람 같은 것입니다.
여불위는 자신이 자초를 장양 왕을 만들고 그 아들인 영정을 진시황으로 만들어
권력의 중심에서 한 시대를 구름처럼 그리고 바람처럼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
쇠잔해지며 권력의 끝자락을 놓고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 마저 스스로 놓게 됩니다.
두 명의 왕을 만들고 G7이라는 전국칠웅의 막바지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진나라에서 여불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승상과 중부로써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권력을 휘둘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권력도 쇠잔해지며 세상의 티끌로 돌아갑니다.
용모가 쇠잔해지면 사랑이 멀어진다고요?
세월이 흐르면 권력도 멀어지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그래서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세라고 하잖아요.
아마도 여불위는 역사상 최고의 장사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장사란 이문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상도라는 책에서 만상 도방 홍득주가 임상옥에게 한 말입니다.
오늘 이 말을 다시 곱씹어 보며 진정 최고의 장사꾼이었던 여불위는
이문을 남겼나 아니면 사람을 남겼나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여불위를 문자(「聞」者: 명성만 좇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라고
평하며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논어(論語) 안연(顏淵) 편에서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이라고
인용하며 어려운 한자를 써가며 평을 했답니다.
이 말은 “명문(名聞:명성)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인을 취하는 체하면서 행동은
그와 다르며,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인을 자처하여 의심받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나라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드러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드러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실 공자도 벼슬자리를 얻겠다고 주유천하 하며 뜻을 펴려고 했지만,
그의 꿈을 받아들일 군주는 아무도 없었나 봅니다.
14년 동안이나...
제나라에서 버림받고, 위나라에서 물 먹고, 진나라나 채 나라 사이에서는
포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고요.
위나라에서는 제자 중 하나였던 자로의 눈총까지 받아보았고...
이런 모습을 당시 세간에서는 공자의 모습이 상갓집 개와 같았다 하며 공자도
그 말이 맞는 말이라 했다고 사마천은 기록했다 하네요.
상갓집 개라... 공자가 말입니다.
이렇게 공자는 그의 꿈을 접고 드디어 참담한 심정으로 "돌아가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내가 필요한 곳을~"하며 고향인 취푸에 돌아와 바로 지금의 곡부 공묘에 있는 살구나무
아래인 위의 사진 속에 보이는 행단(杏壇) 아래 제자를 모으고 후학을 기르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였다고 하더군요.
이상과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이렇게 자신의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상갓집
개와 같이 동가숙 서가식 하며 다녔던 공자와 자신의 뜻을 펴 중원 통일의 기틀이 되는
진나라를 전국 7웅의 리더로 발돋움하게 했던 여불위를 비교했을 때 여불위보다
공자가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판단은 각자의 몫입니다.
다만, 여불위가 대단한 투자가였지만, 투자 대상을 최고 위험 등급에 투자했지 싶습니다.
원래 위험 등급이 높을수록 돌아오는 이득은 큰 것이 사실이지만, 자기 목숨까지
담보로 제공하고 투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많이 잃는 것이지만,
목숨을 잃는 것은 모두 잃기 때문이지요.
뭣이 중헌디???
오늘 이야기로 여불위 열전을 모두 마칩니다.
다음 이야기는 세월이 조금 흘러 진시황을 모시고 중원 통일에 앞장섰던
이사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진시황은 佳人이 선정한 이야기 속에 두 번이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동안 재미없는 이야기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희망이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원래 길이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으로 통하는 길은 욕심으로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비로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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