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 열전 - 여불위(呂不韋)와 자초(子楚) 이인의 만남

2009. 10. 2. 00:20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장사란 이문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이 말은 [상도]라는 책에서 만상 도방 홍득주가 임상옥에게 한 말입니다.

쉬운 장사 이야기를 무척 철학적이고 심오하게 풀이했네요.

 

그 심오한 말을 오늘부터 고민합니다.

정말 장사를 통해 이문을 남기는 것보다 사람을 먼저 남겨 장사로써 취할 수 있는

이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을 남겼던 인물이 바로 여불위라는 사람이지요.

 

장사꾼 중의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라는 사람에 대하여 사마천이 쓴 사기에

어려운 글로 기록했지만, 오늘부터 佳人의 수준으로 다운그레이드 하여

슬쩍 눈요기나 하며 구경하려 합니다.

사마천이라는 인물은 중국의 기원으로 보는 한족의 나라 한나라 때

태어난 역사학자입니다.

 

 

황제 측근으로 기록을 담당했던 부친인 사마담의 영향으로 일찍이 역사에

눈을 뜨며 천하 유람을 다니기도 했고 후에 낭중이라는 황제 경호원으로 일하며

부친이 그동안 모아 온 자료를 바탕으로 사기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니 사기는 사마천이 쓴 게 아니라 부친인 사마담이 대부분 만든 자료에

사마천은 마무리 정도만 했다고도 생각됩니다.

 

한나라 장수 이릉이라는 장수가 무제 때 흉노를 토벌하려고 출전했다가 오히려

흉노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지며 사마천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입니다.

모두가 이릉을 비난할 때 혼자 나서서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혀 죽기 전에 남자로는 수치스러운 벌인 궁형을 자초하고

나오게 되며 사기의 완성을 하게 되었답니다.

 

남 팥 죽 쑤는 데 그냥 구경이나 하지 사마천이 왜 옆에서 땀을 흘렸나 모르겠습니다.

사기를 쓰기 위해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초하고 나온 게 아닐까요?

이렇게 사기란 사마천의 소중이와 바꾼 소중한 역사서입니다.

그러니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띄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겠네요. 

 

 

사실, 사마천도 당 시대의 사람이 아니기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수준을 자기 나름대로 각색한 것이고 그 후의 많은 사람이 쓴 글도 역사상 전해오는

이야기를 자기 나름의 해석대로 쓴 글이기에 그런 이야기는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로

佳人도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제 나름대로 써보기로 합니다.

 

아마도 세상의 많은 기록 중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만큼

정확하고 방대한 역사의 기록은 없지 싶습니다.

중국의 기록 중 숫자는 0을 빼고 다시 그 숫자를 반으로 나누고 그런 후

또 의심을 해야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기록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유전자 속에는 그런 뻥이 대대로 흐르기에 천 번의 거짓말이

진실로 변한다는 것을 믿고 있지요.

 

 

여불위 이야기는 역사상 있을 수 없는 그런 일이 생겼고 앞으로도 생기기

쉽지 않은 이야기라 우리 흥미를 끄나 봅니다.

어쩌면 이화접목(移花接木)이라는 방법으로 중국 중원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여불위가 아니겠어요?

 

당시 또 돈으로는 나라도 살 수 있다는 그런 기발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던 사람이지요.

전혀 지존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딱한 사람을 왕의 자리에 올렸으니

그가 진정한 킹메이커가 아니겠어요?

 

원래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열전 편의 이야기로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무척 딱딱한 이야기입니다.

딱딱한 이야기를 佳人 수준에 맞게 급을 화아아아악~ 낮추어 써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수준이 너무 낮다고 탓하지 마시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수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그냥 지나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에 접어들며 중원은 점차 도로가 새롭게 많이

만들어지고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나라 간 왕래도 많아지며 상거래가

매우 활발해지는 바람에 감각이 뛰어난 사람은 진기한 다른 나라의 상품에 눈을 뜬

상인이 생겨나며 이웃나라의 진기한 상품을 취급함으로  이에 따라 돈을 제법 많이 벌었던

거상들이 여기저기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국시대로 접어들며 제후국 간에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생각이 많아졌나요?

그전까지 춘추시대에는 이웃 나라를 침략해도 이긴 나라에서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함과 동시에 전쟁으로 입은 손해를 보상 받는다는 의미로 그저 경제적으로

이득이나 취하고 상대국의 영토의 일부를 받아오며 적당히 끝냈던 일이었지요.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며 상대 나라를 아예 대를 끊어 조상의 제사까지

지낼 수 없도록 멸문지화를 겪게 했지요.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이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기였습니다.

 

 

제후국 간의 침략으로 인해 벌어진 감정 때문에 훗날 상대 나라가 힘을 키워

다시 복수한다는 생각에 점차 후환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어 두려운 생각이

자꾸 생겼기 때문이며 그 예로 오월동주니 와신상담이니 하는 말을 남긴 오나라와

월나라의 예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요.

대를 이어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또 철의 발달로 철기로 만든 무기와 다양하고 살상력이 더욱 강한 전쟁 도구가

발달하게 되었고 마차의 발달로 장사와 교류를 위한 마차가 전쟁을 위한

전차 형태로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래도 춘추시대는 대규모의 전차가 등장했더라도

서로 예의를 지켜가며 전쟁을 했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도로가 확장되거나 새롭게 건설되며 이웃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이웃나라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고 마차의 발달과 나라 간의 무역이

빈번해진 탓이지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역을 통한 상업이 발달했고 장사를 통해 큰돈을 버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하며 이 나라 출신이 저 나라에 가서 벼슬을 할 수도 있었던 자유로운 시기였지요.

 

당시 거상 중 한 명인 하남 위(衛)나라의 수도인 복양(濮陽) 지방의 여불위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아비가 장사를 했던 복양에도 점포를 가지고 있었으나 조(趙) 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도 대규모 상단을 꾸리며 국제적인 장사를 했던 인물이라지요.

당시 한단은 지금도 지명이 한단이라고 한답니다.

 

당시에 국가 간 이동과 교역에는 별다른 제한이 없었고 중원에는 힘이 제일 강한

군주국이 하나 있고 나머지 나라는 제후국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하, 은, 주로 이어지는 나라를 군주국으로 봐야겠지요.

그러다 보니 서로 군주국을 중심으로 제후국 간의 왕래도 잦고 교류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며 전국 칠웅이라고 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G7아니고 1+6이라는 의미겠네요.

 

 

여기에 상인 집안에 태어난 여불위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여충의(呂忠义)를 따라다니며

장사에 대한 눈을 떴고 또 주변의 여러 나라의 많은 것을 직접 몸으로 부딫히며

경험하게 되어 이미 아버지를 뛰어넘는 장사수완을 발휘해 청출어람의 경지에 올랐다지요?

 

어느 날 여불위는 조나라 한단(邯鄲)에 들렸다가 우연히 볼모로 잡혀와 있는

진(秦) 나라에서 온 자초(子楚)라는 이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이 세계사를 새롭게 쓰게 하는 사건이 생긴 겁니다.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기화(奇貨:)는 뜻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재화이기에 오히려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가치가 있기에 진기한 재화가 될 수 있고 그 재화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지(可居)를 여불위는 몸으로 터득해버린 겁니다.

그러니 쭉정이인 이인을 이용해 왕으로 세운다면 세상의 어느 재화보다

더 큰 이문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그 가치를 알고 있어 먼저 차지한다면 소용없겠지만,

그 가치를 당시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오직 여불위만 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장사란 이문을 남기는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내게 이문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져다준다는 말이겠네요.

 

 

자초는 영정이라는 진시황의 아버지로 원래 이름은 영 이인(嬴異人)인데 당시에

제후국 간에 서로 침략을 예방하자는 의미에서 각 나라는 자신의 공자를 볼모로

이웃나라에 보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현명한 방법 같기도 하고 우매한 방법 같기도 합니다.

 

자초라는 이름은 나중에 진나라 궁궐 안의 실세였던 화양 부인의

양자로 들어가기 위해 초나라 출신인 화양 부인을 하늘처럼 모신다는 의미로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자초라고 했다네요.

영 이인을 편의상 여기서는 그냥 자초 이인이라고도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공자는 만약 전쟁이 나면 그가 머무는 나라의

미움을 받아 원수가 되어 바로 죽는 것이고 전쟁이 없으면 타국에서 그냥

무위도식하며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니 많은 공자 중 아무 권력도 없고 타국에 볼모로 가서 살며 무위도식하다가

죽는 날만 기다리는 희망도 없는 쭉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공자가 절대로 아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위의 사진 속에 보이는 옥으로 만든 수의는 고사하고

그냥 가마니에 둘둘말아 산에다 그냥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옥으로 만든 수의는 그야말로 최고 지존이 죽었을 때 입을 수 있는 명품 수의지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자 중 제일 별 볼 일 없는 쭉정이에 해당하는 공자들이 순번대로

주로 이웃나라에 볼모로 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본국에서 생활비로 돈이라도 주기적으로 보내준다면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이런 곳으로 버림받아 올 정도라면 평소 알았던 사람조차

일부러 모른 체할 수밖에 없는 처지죠.

카톡을 보내도 씹어버리고 전화를 해도 수신거부로 돌려놓은 번호의 사람이지요.

 

끈 떨어지고 잊히면 거지꼴로 목숨을 연명해야 하지요.

그나마 어미인 외가 집안이 권력과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면 가끔 지원이라도 받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정말 입에 풀칠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다가 희망도 없이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어미나 외가의 배경이 좋다면 이런 곳에 선발되어 볼모로 지내지는 않겠지요?

 

 

여불위와 나중에 진나라 장양 왕이 된 자초인 이인의 운명적인 만남...

그때의 자초 이인이 바로 이런 딱한 보험용으로 선택받은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으로 중국, 아니 세계의 역사가 새로 써집니다.

 

자초는 훗날 진 나라의 장양 왕이 되었고 위의 사진 속의 폼 나는 인물인 그의 아들인

영정(嬴政)이 중국 중원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되었으니까요.

위의 사진 속에 보이는 사람이 쭉정이 아들 영정으로 야불위가 아니었더라며

그냥 역사 속에 기억조차 없는 인물로 사라질 뻔했던 진 나라 시황제입니다.

사람의 앞날은 참 알 수 없네요.

 

 

진시황 옆에 앉은 사람은 아마도 시황제와 함께 중원 통일의 기초를 닦은 이사가 분명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사에 대한 열전도 올려볼까 합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진시황 영정은 이렇게 말도 되지 않은 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자초 이인의 아비인 진나라 효문 왕에게는 정부인 격이며 효문 왕이 가장 사랑하는

화양 부인(華陽夫人)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자식이 없었다고 하네요.

 

물론, 효문 왕은 아들이 20명이나 더 되었지만, 화양 부인과는 불철주야 계절 불문하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결과물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하니

이는 화양 부인의 문제가 분명했지만, 효문 왕은 그래도 오직 화양 부인만 사랑하는

일편단심 민들레와 같은 사람이었다네요.

 

 

자초 이인은 진나라 효문 왕의 아들이지만, 어머니는 하희(夏姫)라는 후궁으로

궁궐에서 오다가다 어쩌다 마주친 덕분에 낳은 자식이 자초였고 효문 왕과

가끔 잠자리만 하는 있지만, 핀치히터로 가끔 등장하기에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미미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후궁으로 선발되어 들어올 때 외가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그런 집안 출신이지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다면, 내관을 포섭해 왕의 잠자리에 자주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어머니가 궁궐 내에서 부각되지 못하면 아들은 당연히 존재감이 없기에

만약, 다른 나라에 볼모로 갈 왕손을 선발할 때면 이런 후궁의 아들이 선발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히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해 언제나 먼저 나가는

영광(?)을 얻게 된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런데 자초 이인은 하희의 첫째 아들도 아니고 그마저도 존재감마저 희미한 둘째였답니다.

하희라는 후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누구의 눈길도 머물지 못하는 그런 존재로

효문 왕의 많은 아들 중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고 그저 그런 족보 속의 왕자였죠.

그때 효문 왕의 아들이 20명을 넘었다고 하니 생산력은 대단했던 인물이었네요.

 

과연 이런 미미한 쭉정이가 어떻게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는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연습생 출신이 4번 타자로 한때 이름을 날리 사람도 있지만, 이는 연습생도 아니고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섬에서 돼지나 기르던 그런 부류의 사람이잖아요.

 

 

당시에는 이웃나라 간에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많은 아들 중 이렇게 존재감이 약한

왕자 순으로 선발되어 이웃나라에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보험용으로 선발되어 나가

사는 그런 제도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태자나 태자 다음 순위로 왕위 계승에 유력한 왕자는

절대로 이웃나라에 나갈 수 없지요.

 

또 그렇지 못하더라도 외척의 힘이 강한 후궁마저도 별 볼 일 없는 자손이지만,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테니 여기에 당당하게 선발된 왕자는 그야말로 쭉정이 중

진품명품 쭉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자초 이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아들로 분류되어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었을 때입니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에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고 또 자초가 왕위 계승 서열에서

먼 서자인 관계로 조나라조차도 예우를 전혀 해주지 않아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름뿐 공자라는 말이고 게다가 가끔 침략도 일삼는 나라의 공자니까

조나라 조차도 얼마나 미웠을까요?

뭐가 예쁘다고 적국의 볼모에게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겠어요.

생각 같아서는 용작두도 아닌 개작두에다가...

 

그러다 보니 이렇게 타국에 볼모로 나와 있으면서 외출할 때는 변변한 마차 하나도

구할 수 없는 곤궁한 처지였습니다.

렌터 마차도 돈이 있어야 빌리지요.

 

마차는 고사하고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답니다.

굶기를 밥먹듯이 했을 터이니 밥은 제대로 먹고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개털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자초를 우연히 만난 여불위는 불현듯 하나의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지금까지 세상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바로 기발하고도 재미있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무릎을 탁 치며 졸지에 자초 이인에게 "올인"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인물이 여불위라고 하네요.

 

여불위의 동물적인 감각입니다.

역시 여불위는 장사꾼이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자유당 때 그대로

예사롭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원래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은 사람 보는 눈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불위는 여느 장사꾼과는 다르게 사람에게 투자했고 결과적으로 세상에

전무후무한 일을 꾸몄고 그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게 됩니다.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재미와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지닌

드라마틱한 삶이었습니다.

 

자초를 만난 뒤 여불위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부친에게 물어봅니다.

여불위의 부친은 이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기에 산전수전에

인간 심리전까지 터득한 베테랑이 아닙니까?

 

 

"아버님! 농사꾼이 아침해를 머리에 이고 나가 저녁해를 등에 짊어지고 들어 오면서

온종일 열심히 고생해 농사를 짓는다면 1년에 얻는 이익이 얼마나 됩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농사를 지어 1년에 얼마나 벌 수 있느냐는 말을 이렇게 멋지게 하

여불위가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질문을 뜬금없이 던지는 여불위를 보니 아버지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보니 여불위가 어제 밥을 잘못 먹었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그야 해마다 다르지, 풍년이라도 들면 아마 열 배 정도의 이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다 큰 성인의 몸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법 장사하나는

짭짤하게 하기에 대꾸는 해야겠지요?

 

 

"그럼 상인이 귀한 물건을 싸게 사 다른 곳에 비싸게 팔면 얼마나 이문이 날까요?"

장사는 자기가 하고 돌아다니는데 왜 은퇴한 아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답니까?

정신 나간 녀석입니다.

 

"경영만 잘한다면 수십 배에서 백 배 정도의 이익은 보지 않겠니? 참 싱거운 놈이네?"

여불위 아비도 싱겁다고 합니다.

 

 

"아버님 그럼 돈으로 한 나라의 군주를 세운다면 얼마나 이문이 날까요?"

어쭈구리?

더위라도 먹었나 아마도 아들 여불위가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며

장사만 하느라 실성한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자세히 말을 해 보아라."

아비는 여불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느낌이 팍! 하고 왔다는 말입니다.

역시 그 아비에 그 자식이죠?

 

 

여러분도 자식 놈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할 때 그냥 정신 나간 놈이라고

치부하지 마시고 좀 더 깊이 생각하며 대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의 자식이 여불위 같은 대단한 장사꾼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말에 여불위는 조나라에서 진나라 공자 이인을 만났던 일과

그의 계획을 듣고 바로 감을 잡습니다.

돈 냄새를 맡는 데는 이미 득도의 경지에 올랐던 부자지간이죠?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여불위 아비가 하는 말이...

"적어도 만 배도 넘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만 배라는 말은 여불위 아버지가 감이 많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All or Nothing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닐까요?

 

아래는 당시에 부자간의 대화를 전국책이라는 곳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아버지, 경전(耕田)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열 배이다.”/“주옥(珠玉)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백 배이다.”/“국가의 주인을 세운 이익은 몇 배입니까?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여불위는 도박에 가까운 기상천외한 장사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투자금만 날리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지만, 장사를 하러

다니다 보면 당시에 수시로 출몰하는 도둑떼에게 목숨을 잃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불위는 아버지와 선문답을 끝내고 조나라 한단(邯鄲)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물론 새 사업에 착수하기 위해서겠지요.

그는 한단으로 가는 길에 그동안 모아놓았던 전 재산의 대부분을 모두 현금화합니다.

당시는 자금추적이나 소명자료 제출과 같은 그딴 것 없었을 테니까요.

 

그 돈을 대강 마련해도 무려 1.000 금이 넘는 돈이라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천 금이라는 말은 사실 많은 돈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통상적인 금액이라고 봐야지요.

 

자 그럼 우리 모두 佳人과 함께 한단으로 여불위가 무슨 짓을 하나 구경하기 위해 따라갈까요?

여불위를 따라다니다 보면 진나라 진시황도 만나보고 그의 출생에 관한 비화도 들을 수 있고

나라도 새로 세우는 과정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