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형을 당한 사마천

2009. 10. 1. 00:11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은 자신의 생명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사람 사마천의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은 중국 한나라의 전성기 때에 활동한 역사학자입니다.

한나라는 중국에서 한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한나라 이름을 따 한족이라고 부른답니다.

 

사마천은 사내로서는 수치스러운 궁형이라는 생식기가 잘리는 형을 받은 

아픔이 있는 역사가로 사내가 사내로서 사내가 아닌 것으로 살아간다는 일은

무척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사마천은 그런 아픔을 오히려 디딤돌로 삼아 위대한 역사서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기원전 145년경 섬서성 한성시의 고문촌 용문채에서 태어났다고 하네요.

그런데 135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뭐 워낙 오래되어 고무줄 나이입니다.

그런데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역사서를 쓴 사람이 자신의 태어난 연월일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는 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까요?

 

황제 측근에서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고 20살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중국 남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힙니다.

이미 이 당시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여행을 통해 알았다는 말이 아닌가요?

사마천이라는 위대한 사람은 결국, 아버지의 안목이 만든 것입니다.

 

22살에 황제의 경호원격인 낭중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지만, 아버지가 남긴 유언 때문에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42살이 되자 그동안 아버지가 남긴 자료와 10여 년 전부터 모아 온 자료를 바탕으로

사기 집필에 착수하고 일생을 걸고 후세에 길이 남는 위대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무척 섭섭해합니다.

기본적인 자료는 모두 아버지가 넘겨주었는데 아들 녀석이 자기 혼자 쓴 것처럼

저자 이름을 후세 사람들도 모두 사기의 저자는 사마천이라고 알고 있다고요.

사기가 사기라는 말인가요?

 

그러나 기원전 99년 47살 때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한나라의 장수인 이릉이라는 사람이 당시 수시로 북으로부터 침략하여 내려오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족 근거지로 진격하여 들어갔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포위되어 "오잉~ 이게 아닌가벼?" 하며 그들에게 투항하고 맙니다.

 

이런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한무제는 짜증이 나고 조정 대신들은 모두 앞다투어

이릉 장군을 "못난 놈, 바보 같은 놈!

밥 버러지 같은 놈!

빠떼루 받을 놈!" 하며 비난합니다.

 

황제의 심기를 살펴가며 조정 대신들은 원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이게 처신의 달인이 하는 상투적인 방법이죠.

이런 자리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100% 중간은 갑니다.

아니면 숫자가 많은 쪽에 붙으면 중간 이상은 보증합니다.

물론 앞장서서 비난하면 기쁨 주고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제일 말단에 있는 한 사람 사마천만이 "이릉이 투항한 것은 목숨을 보전하여

훗날 한나라에 더 크게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는 변론을 하게 됩니다.

황제의 기분을 풀어 드리기 위해 한마디 한다는 게 그만 불을 붙인 거죠.

 

사실 이릉과 사마천은 같이 한나라 벼슬길에 올랐지만,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두 사람이 서로 술잔을 기울인 적도 없는

전혀 알 잘지 못하는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이런 말이 나오면 옆에서 수군거립니다.

佳人이 가만히 들어보니 

"쟤 왜 저래?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라고 하네요.

젠장 오히려 자존심 강한 한무제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을 훗날 "이릉의 화"라고 한다는군요.

 

 

결국, 한무제는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풀 대상을 찾느라 눈을 번득이고 있었는데

사마천이 당당하게 당첨되었습니다. 

내가 그리될 줄 알았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한무제는 "저 녀석이 도대체 누구야? 보내버려라!"라고 합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이 되나 1년 후 스스로 궁형이라는 수치스러운 벌을 자청하고 대신

목숨을 부지해 죽음을 면하고 집필을 시작한 사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궁형이란 쉽게 이야기하면 남자의 심벌인 고추를 잘라버리는 형벌입니다.

정말 비인간적인 형벌입니다.

남자 40대라고 하면 조금은 더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던 그가 왜 스스로 궁형을 받겠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사기를 마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든다는 일은 당시 사대부로는 대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이 사건으로 사마천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남자가 남자로서 남자에 의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일....

정말 잔인한 일입니다.

 

옆에서 자살을 권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울분을

다른 방법으로 나타냅니다.

그는 역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합니다.

역시 사마천은 자신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이야기가 바로 "사기"라는 유명한 역사서입니다.

천지자연의 이치와 인간 전체의 비극을 통찰함으로 역사를 재창조하는

역사가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닥친 개인적인 고통이 오히려 사기를 위해서는 약이 되었던 겁니다.

 

그는 2년 후 사면이 되어 다시 벼슬길에 오릅니다.

친구인 임안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는데 여기서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던 심정을 술회했습니다.

 

드디어 사마천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55세에 이르러

사기 130편의 원고를 거의 마칩니다.

이런 사연으로 우리가 입에 올리는 사기가 탄생하게 되었다네요.

 

누구나 궁형을 받는다고 사마천이 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학우선을 손에 들고 있다고 제갈량이 되지도 못합니다.

귀를 자르면 누구나 고흐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가 있다고 합니까?

이런 글을 쓴다고 佳人이 작가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사마천에게는 치욕스러운 궁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후세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서인 사기가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유효기간이 임박한 거시기를 잠시 잘리는 아픔을 이겨내고 그는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사마천이 사내로서는 수치스러운 벌을 자청하면서까지 목숨을 구제받은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사기를 쓰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여 남기는 역사서를 거부하고 역사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연민으로 이런 위대한 역사서를 남기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뭣이 인생에 가장 중헌지 알았다는 말이 아닌가요?

 

오늘 사마천의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사마천이 쓴 사기라는 책에 나왔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인데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여러분이 모두 알고 계시는

그런 이야기를 다시 써보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중 드라마처럼 재미있다는 열전 편에 나오는 몇 가지 이야기들 중

먼저 여불위 열전을 올렸고 다음에는 이사 열전을 올려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