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 두번째 이야기

2008. 11. 26. 00:08중국 여행기/소주, 항주, 상하이 여행

어제에 이어 악비의 두번째 이야기다.

송나라 고종 황제는 악비가 얼마나 대견했던지 소흥 6년(1136) 9월에는 호부낭관에게

악비 군대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조치했다.

중앙정부의 실무책임자에게 일개 부대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악비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바로 악비의 전성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이후부터 악비에게 시련이 닥쳐 그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이 노골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원래 사람이란 성공의 길로 접어들면 시기하는 세력에 꼭 생긴다. 
아래 사진은 전투에서 악비는 부상을 이겨내고 다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이다. 

 

소흥 7년(1137) 3월에 악비가 황제에게 회서 지방의 군대를 자기 부대에 통합시켜 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전력을 증강함으로써 금나라를 상대로 한 압박에 탄력을 불어넣기 위한 의도였다.

황제도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허를 내렸다.


하지만 바로 이때에 악비의 라이벌인 진회가 황제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던져 넣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원균과 이순신의 관계는 중국인들은 진회와 악비로 인식하고 있다.

 

진회는 황제에게 “악비의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진언했다.

은근 슬쩍 악비를 모함한 것이다.

사실 모듬 백성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있는데다 지방군대까지 통솔하게 해 달라고 했으니.... 


악비가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그럴 것 같은

느낌을 황제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래서 황제도 처음의 윤허를 보류하고 말았다.

악비를 전폭 지원하던 황제의 태도가 갑작스레 신중해진 것이다.

 

당시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관료들의 반란이 심했기 때문에 황제로서는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 덕분에 영토를 회복해 가고 있는데도 황제가 진회의 말을 따른 사실이 내심 속상했는지

악비가 갑자기 황제에게 사표를 내민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상복을 입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그 전년도에 악비는 모친상을 당해 상복을 입게 되었지만 며칠 뒤에 황제로부터 복직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전선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새삼스레 악비가 다시 상복을 입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래 사진은 금나라와 전투에서 송나라의 성이 불타고 있다. 

 

물론 명분은 효의 실천에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황제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사표를 쓴

것이었다.

황제도 그런 악비의 속마음을 알아챘는지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계속 일할 것을 명령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대파들이 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악비는 황제에게 서운함을 느껴서 사표를 제출한 것이지만 반대파 장준은 “악비의 본심은

군주를 협박하려는 것”이라면서 황제의 마음을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황제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모친상을 빌미로 주군을 협박하고 있다면서 악비를

비난한 것이다.

아래 사진은 드디어 송나라의 성은 금나라에게 함락되고 만다.

 

결국 이번에도 황제의 마음은 또 움직였다.

하지만 전시 중에 악비를 해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병부시랑을 보내 악비의 군대를

감찰하도록 했다.

소흥 6년 9월에는 호부낭관에게 악비 군대의 보급을 책임지도록 하더니 이번에는 거꾸로

병부시랑을 보내 악비 군대를 감시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악비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사건이었다.

중앙에서 감시관까지 파견될 정도라면 악비가 얼마나 불신을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악비의 군대는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소흥 9년(1139)

3월에 중원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순신이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것처럼 그는 육상에서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악비는 반대파들의 모함을 계속 받다가 결국 1141년에 투옥·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진회의 주도 하에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굴종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물론 진회의 선택은 더 이상의 희생을 중단시켰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악비 등의 주전파를 제거함으로써 송나라가 황하 이북을 수복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는

점에서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악비에게 정말로 ‘나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웬만한 능력만 있으면 반란군 수장이 되거나 아니면 금나라와 손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악비는 끝까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행적만 놓고 보면 악비는 결코 주군을 배신할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고토 수복뿐이었다.

아래 사진은 북벌에 나선 악비군이 눈과 추위와 강력한 금나라 군에 악전고투한다는 의미다. 

 

그런 그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은 그의 주군인 고종 황제였다.

그는 겉으로는 중원 수복을 외쳤지만 ‘혹시 악비가?’라는 염려 때문에 악비를 보호하지 않았고

결국 그 때문에 중원을 완전 수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는 국토 수복보다는 정권 유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영웅은 군주 입장에서는 자신의 옥좌가 위협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같은 모양이다.

 

악비의 등에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세겨져 있었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악비는 왕과 궁녀 사이에 태어났으며 궁녀는 임신으로 궁을 나오게 되었다 한다.

왕은 궁녀에게 진충보국이라는 휘호를 내려주고 악비가 태어나자 어머니는 악비의 등에다

충성을 다하고 나라에 보답하라는 진충보국이라는 글을 세겨 표시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악비는 중국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칭송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