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의 야경

2022. 4. 11. 04:54금수강산 대한민국/경상북도

3월 초에 동궁과 월지를 찾았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공사를 한다고 월지에 물을 모두 빼놓았고 야간에 문도 닫아 그냥 발걸음을 돌렸더랬죠.

그래서 이번 4월 초에 벚꽃으로 유명한 경주였기에 벚꽃 구경도 겸해서 다시 경주를 찾았습니다.

 

동궁과 월지는 다시 야간에 문을 열어두어 멋진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보수 공사가 끝나지 않아 완벽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돌아보았습니다.

 

야간 개장을 했어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입장료도 없이 누구나 돌아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물론, 대릉원 입구 주차장은 주차료를 받지만, 이곳 동궁과 월지는 주차료도 받지 않더군요.

예전에는 안압지라고 우리는 배웠는데 지금은 월지라고 하네요.

 

동궁은 임금이 머문 곳이 아니라 신라의 태자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특히 임해전(臨海殿)은 군신들이 연회나 회의를 하거나 귀빈을 접대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네요.

호수를 만들어 위의 사진에 보는 것처럼 아주 멋진 풍광을 자랑합니다.

 

만약 오늘같이 야간에 이곳에 귀빈을 모셨더라면 그 멋진 야경에 넋을 잃었지 싶네요.

특히 월지 호수에 비친 전각이나 나무의 모습이 몽환적으로도 생각되네요.

 

이곳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74년(문무왕 14)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안압지가 건립된 시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뒤에 만들어졌다고 하기도 한다니...

기록이 서로 다르기에 어느 말이 맞는지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679년에 궁궐을 매우 화려하게 고쳤다고 하였고,

804년(애장왕 5), 847년(문성왕 9), 867년(경문왕 7)에는 임해전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네요.

아무래도 보수와 중수등을 거쳐야 제대로 보존할 수 있겠지요.

 

또한 697년(효소왕 6) 9월과 769년(혜공왕 5) 3월, 860년(헌안왕 4) 9월,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군신들이 연회를 가졌다고 하였으며, 931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저물어가는 나라를 거정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초청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고 위급한 정세를 호소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었지만 신라 정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이네요.

궁궐 안에는 현재 중국 사천성 동쪽에 있는 명산인 무산(巫山)의 12개 봉우리를 본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고,

연못을 파고서 그 안에 전설 속의 해중선산(海中仙山)인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서 꽃을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옵니다.

 

이 연못은 바다를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중심 건물을 바다에 붙어있다고 하여

임해전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뒤 1974년 11월에 안압지 준설 및 주변 정화공사가 추진되었다 하고요.

이때 기와 조각과 와당 조각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1975년 3월∼1976년 12월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고 하네요.

 

그 결과, 신라시대에 축조한 연못이 거의 완전하게 확인되었고, 특히 연못 주변에 쌓았던

호안석축(護岸石築)도 매우 양호한 상태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런 석축이 원래의 모습을 알아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겠네요.

 

연못에 물을 대는 입수구와 수로,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 등의 시설도 잘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기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다고 하지만, 처음 모습과는 다르지 싶습니다.

 

한편 안압지 서쪽에서는 건물터와 행랑터가 확인되었으며, 그보다 더 서쪽에는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비교적 큰 건물터도 드러났고요.

 

행랑은 안압지 남쪽으로도 연결된 듯 보이지만, 그 북쪽과 남쪽은 철로와 차도에 의하여

많이 손상되었기에 전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복원 모습도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 싶습니다.

 

안압지 바닥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 제품과 목조 건물의 부재 등이 출토되었고,

특수한 모습의 기와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지요.

신라의 패망과 연관된 것은 아닌지요?

 

특히 기와에는 679년인 ‘의봉4년(儀鳳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680년인 ‘조로 2년(調露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보상화(寶相華) 무늬의

벽돌과 함께 문무왕 때 임해전이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발견되는 굽다리접시〔高杯〕나

긴목항아리(長頸壺)과는 다른 것으로 실생활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네요.

 

동궁 및 월지 유적은 1980년에 정화공사를 거쳐 신라 궁궐의 원지(苑池)로 복원되었고,

3채의 누각도 발굴조사 때 출토된 목조 건물 부재와 신라시대의 다른 유적들을 참조하여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의 건물터는 주춧돌만 정연하게 확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네요.

 

이곳의 위치는

'금수강산 대한민국 > 경상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릉원 황남대총과 천마총  (0) 2022.04.15
경주 대릉원(大陵苑)의 봄  (0) 2022.04.13
강양항 명선교  (0) 2022.04.06
경주 월정교(月精橋)의 야경  (0) 2022.04.04
간절곶과 호카곶  (0)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