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 태실과 진천 연곡리 석비

2022. 8. 31.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충청남북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 관련 유적지가 있네요.

사실 김유신 장군이 고향은 알지 못했으나 보탑사를 찾아가던 중 우연히 보고 잠시 들렀습니다.

김유신의 태실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형식에 속하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하네요.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김유신 장군 유허지(金庾信將軍遺墟址)라는 명칭으로

1988년 9월 30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79호로, 김유신 장군 태실은 김유신 태실 및 돌담이라는 명칭으로

1997년 6월 27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6월 11일에 이 둘이 합해져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네요.

 

김유신 장군 탄생지는 진천읍 상계리 계양(桂陽)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네요.

그리고 큰 담을 쳤다 하여 담안밭(장군터, 장수터)이라 불리고 있었답니다.

 

또한 인근에 태실과 만노산성 등 신라시대의 유적이 있어 탄생지로 비정되는 곳이라네요.

현재 연보정의 서쪽인 완만한 평탄 대지에 자연석을 이용해 3∼5열로 구축한 3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고 하네요.

연보정은 김서현이 만노군의 태수로 있을 때 치소에서 사용하던 우물로 전하고 있답니다.

자연석으로 석축을 돌려 쌓았으며, 샘의 직경은 1.8m, 후면의 높은 쪽은 2.6m나 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생가의 동북쪽 산비탈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연보정이라는 우물은

김유신이 무술 연습과 말달리기를 했다고 전해오는 치마대 등이 남아있다고 하네요.

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은 1999년 6월 11일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김유신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595년(진평왕 17)에 여기서 태어나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지요.

 

김유신은 신라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 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도 나라에서 주관하여 봄가을로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네요.

조선 태종 때부터는 격을 낮춰 진천현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고요.

1983년 충청북도 사적지 정화 계획에 따라 생가와 유허비가 건립되었다지요.

 

김유신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도리 집으로 가구 형식은 1 고주 5량 가라고 하네요.

자연석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외진에는 원형 기둥을 세우고, 내주에는 네모진 기둥을 세웠답니다.

중앙의 2칸과 외진 반 칸은 우물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좌우에 각각 방을 두었다고 하고요.

태령산 정상에 있는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봉분형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이라고 합니다.

 

태실 주위에는 동쪽으로 경사면을 에워싸며 석축을 쌓아 성지임을 표시하는

태령 산성(胎靈山城)이 있고 길이는 216m, 높이는 1~1.3m 규모라고 합니다.

 

오늘 또 다른 석비를 버렵니다.

진천 연곡리 석비(石碑)입니다.

이 석비가 있는 곳은 보탑사 경내 영산전 뒤편에 있습니다.

거북 받침에 몸통을 세운 형태네요.

 

보물 404호로 지정된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다른 비석과는 달리 글자를 새기지 않았기에 일명 백비라고도 부른답니다.

글자가 없기에 더 유명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받침돌은 거북 모양인데 일부 훼손되어 마치 말의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발톱도 파손되었지만, 거북 문양과 연꽃 문양은 아직까지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습니다.

무슨 사연을 남기려고 만들었을까요?

중국에서도 글자를 새겨두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라는 유명한 석비가 3개가 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