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이 정겨운 외암 민속마을

2022. 6. 1.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충청남북도

외암마을은 약 500년 전에 강 씨와 목 씨 등이 정착하여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온다고 합니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 씨가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네요.

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네요.

 

외암 민속마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호를 ‘외암’이라 지었기에 지금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또 전해오는 다른 말로는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시흥역이 있었는데 외암마을은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므로

오양골이라고 불렀고 오양의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고요. 

 

마을의 건물들은 크게 두 가지 기준에 의해 배치되었다고 하네요.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반석교를 지나 곧장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600여 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그러니 이 나무는 외암마을이 생기기 이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인 셈입니다.

 

워낙 키가 크기에 마을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더라고요.

또 하나는 마을 동남쪽에 있는 개천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우리같은 처음 이곳을 찾는 여행자는 다리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갈 때 어느 쪽이든 먼저 들어가 나올때는 다른 길로 나오면 쉽게 마을 전체를

거의 빠짐없이 돌아볼 수 있지 싶습니다.

 

이 마을에서 재미있는 것은 설화산에서 시작된 냇물이 마을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정원은

매우 특색있고 운치 있어 마을 전체가 귀중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외암 민속마을은 500여 년 전부터 형성이 되었고,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이지요.

 마을의 터가 좋아 한국의 살기 좋은 마을 1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네요.

 

따라서 오랜 전통으로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장승제를 지내고 10월에는 짚풀문화제, 11월에는 동지행사를 하며

마을 앞에는 조선시대 시장인 저잣거리가 조성되어 있어 먹거리 및 공연을 구경할 수 있겠네요.

이런 전통마을이 있기에 요즈음 자라나는 세대는 우리의 옛 모습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외암마을 안으로 작은 개울을 만들어 집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사용하는 지혜를 볼 수 있네요.

설화산 계곡에서 내려온 개울물을 마을로 끌어들이는 유입구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겨울철에는 물이 흐르지 않도록 유입구를 막아둔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로를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풍수지리와도 연관이 있다네요.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雪華山)의 '화' 발음이 불 화(火) 자와 같으므로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물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랍니다.

 

사실 그런 풍수지리가 아니더라도 초가집이 많은 곳에서는 마을을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지혜로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몇몇 부잣집은 집안에 위의 사진에 보듯이 연못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물을 가두어 놓기도 했고요.

 

이렇게 마을 안으로 수로를 만들어 흘러들어온 물은 집집이 정원을 가꾸거나

생활용수로도 이용하고 과일나무도 가꾸고 화초도 키우는 역할을 했지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물레방아를 돌리며 마을 남쪽의 개천으로 흘러들어 가게 했지 싶습니다.

정말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네요.

 

또 다른 것은 돌담이 외암마을의 랜드마크처럼 생각할 정도로 모든 집이 돌담을 둘렀다는 것이군요.

이는 아마도 논밭을 경작할 때 이 지역에서는 돌이 무척 많았던 모양입니다.

제주도와 비슷한 그런 지형이 아니었을까요?

 

외암마을은 예부터 삼다 마을로 알려졌는데 삼다란 돌, 말, 양반을 뜻한다네요.

마을의 돌담은 이를 한번에 이으면 5.3킬로미터나 된다고 하니 돌담의 규모를 알 듯합니다.

돌이 많은 이유는 외암마을은 땅 밑 일정한 지층까지 호박돌로 이루어져 있다네요.

 

이 돌을 걷어 경작지를 만들고 집터를 확보하면서 걷어낸 돌로 담을 쌓았겠네요.

 따라서 외암마을에서는 참판댁 같은 양반 주택의 담장조차 기와를 얹지 않았네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돌담처럼 무너져 내린 모습도 볼 수 있네요.

 

돌담길을 걷다 보니 정겹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네요.

고향 골목길을 걷는 그런 기분도 들고요.

 

돌담의 높이도 나지막하기에 집안의 모습도 넘겨다 볼 수 있네요.

아무래도 집성촌이다 보니 서로 간의 담을 두지 않고 가족처럼 지내기 위한 생각에서

이렇게 나지막하게 쌓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외암마을은 연잎으로 술을 빚은 연엽주로도 유명한가 봅니다.

여기저기 연엽주를 판매한다고 쓰여있는데 이 술은 조선 고종 때 현감을 역임한 이원집이 궁중에 있을 때

왕에게 올린 술로 대대로 종부를 통해 전수되어 내려온다네요.

그런 이유로 1990년 충청남도 무형 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고 최황규가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고 하네요.

 

외암마을 북서쪽 구릉에는 위의 사진에 보듯이 언덕이 있고 그곳에는 소나무 숲을 조성했는데

이는 마을의 불리한 지세를 보완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땅의 모습으로도 많은 말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지 싶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초가지붕의 집은 외암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이사종의 9 세손인 초은 이장현(1779~1841)이

순조 10년(1810) 건설했고, 그가 송화 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고 합니다.

집 앞에 서면 초가집의 대문채가 기와집의 본채와 어울리지 않아 굳이 초가집으로 지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돌담 너머로 보이는 집안의 모습은 놀랍습니다.

뒤로 설화산이 있고 마당에는 커다란 소나무 숲이 있어 아주 멋진 풍경을 보여주네요.

이 정원은 한옥과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한국 전통 정원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건재고택의 모습입니다.

중요 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된 건재고택은 외암리를 대표하는 가옥이라고 합니다.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집을 지은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영암 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라네요.

 

이번에 보는 집은 교수댁이란 이름을 불리는 집입니다.

 이사종의 13 세손인 이용구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집이랍니다.

여기도 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네요.

 

그냥 돌담 너머로 넘겨다만 보았습니다.

정원의 모습만으로도 교수댁은 외암마을을 대표하는 양반집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설화산에서 흘러온 물을 마당으로 끌어들여 굽이치게 수로를 팠으며 연못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외암 민속마을이 있는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