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 하우즈(Labi Hovuz)는 부하라 여행의 시작과 끝

2019. 11. 12. 09:00우즈베키스탄 2019/부하라

2.300년이나 된 이곳 부하라는 이슬람 문화가 가장 많이 보존되고 있는 도시 중 한 곳이라고

하며 한때 이슬람 모스크만 이곳 부하라에 350여 개가 있었고 100여 개의 코란 경전을 배우는

학교가 있었다네요.

그렇다 보니 도시 전체가 역사지구로 지정되어 있고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하나 봅니다.

 

라비 하우즈(Labi Hovuz)에서 하우즈라는 말은 인공호수라는 의미로 자연적으로 생긴

오아시스와는 다른 의미의 연못으로 부하라에서는 100여 곳을 이렇게 인공호수를 만들고

수로를 연결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라비 하우즈에는 이런 이야기가 내려온다고 합니다.

7세기 부하라의 지배자였던 나지르 지반 베기는 이곳에 호수를 만들고 싶었답니다.

당시 이 땅의 주인인 유대인에게 집을 팔라고 했지만, 유대인은 한마디에 거절했답니다.

 

그러자 나지르는 지하에 만든 수로를 이 집을 향해 방향을 틀어 놓았답니다.

이곳에도 우기가 있어 비가 내리자 집은 갑자기 불어난 물로 인해 쓸려내려가 버렸답니다.

어쩔 수 없이 유대인은 집이 있던 터를 팔 수밖에는 없었겠지요.

 

이렇게 되어 지금의 호수는 1620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권력형 갑질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 알박기라고요?

 

유대인은 떠내려가다 집이 멈춘 장소에 시나고그라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유대인 예배당을 세웠답니다.

바로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의 옆이 시나고그였습니다.

따라서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당시 유대인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하네요.

라비 하우즈 주변으로는 여러 개의 호수가 있고 또 사라이가 많아 부하라를 찾은 카라반은

주로 이 부근에서 머물다 떠났다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곳은 예전에는 하우즈라는 인공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유적지로만 남아있습니다.

건물터로 보이는 곳은 카라반이 머물던 사라이나 식당들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그 옆에 보이는 사라이는 위의 사진처럼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아있고

사라이의 외부에서 보는 모습이 마치 성처럼 느껴집니다.

워낙 안전과 도난 방지를 위해 숙소에 머무는 고객을 위해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했을 것 같은 모습이 아닌가요?

그런데 드나드는 문이?

아마도 낙타가 드나들 때는 큰 문을 모두 열었을 듯하고 사람만 드나들 때는

작은 개구멍 같은 곳으로 드나들었을 듯합니다.

카라반은 워낙 고가의 물건을 싣고 다니기에 늘 도둑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안전과 도난방지를 위해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했을 듯하네요.

옛날에는 카라반이 머물며 시끌벅적했던 곳이 바로 지금의 라비 하우즈 부근이었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라반이 머물렀던 곳에는 지금은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로 다시 시끌벅적합니다.

위의 건물은 우즈베키스탄의 위대한 티무르 왕(Amir Temur)의 손자가 세웠다는

울루벡 마드라사(Ulugbek Medressa)입니다.

1417년에 세웠으니 600여 년이나 지났네요.

창고에는 이런 코란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지식 추구는 모든 회교도와 무슬림의 책임이다."

이곳 마드라사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랍어, 기하학, 천문학 및

종교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했겠지요.

보통 이런 마드라사에 입학하면 공부 기간이 15~20년 동안 계속했다고 하네요.

특히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은 동양사상이나 시문학도 공부했다고 하네요.

 

이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마드라사입니다.

티무르의 손자 울루벡은 이곳 말고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인근에 있는 기즈두반 등

세 곳에 마드라사를 세워 젊은이들의 학문연마를 위해 노력했다는 위대한 인물이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무슬림의 향학열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랬기에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에 학문의 명맥을 이슬람이 이어왔지 싶습니다.

이런 열정이 지금도 이어져 이곳 우즈베키스탄은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