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2019. 9. 12. 09:00발칸반도·모스크바 2018/크로아티아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한 로마 전통의 기둥머리가 보이는 기둥이 있네요.

이 문은 열주 광장에서 궁전 안채로 들어가는 문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넓은 원형의 방이 나옵니다.

이 방을 황제 알현실이라고 하더라고요.

 

 

내부 모습은 둥근 형태의 돔형 구조로 로마의 판테온처럼 위가 뚫린 모습이네요.

예전에는 모자이크 장식의 천으로 덮여있었다고 하네요.

사실 이곳은 황제의 거실로 들어가는 현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황제를 만나기 위해 잠시 기다렸던 장소이기에

황제 알현실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열주 광장에서 바라보면 바로 정면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큰 방을 만나는데

이 방이 바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라 합니다.

 

 

이곳은 울림이 좋아 늘 클라파(Klapa)라고 하는 달마티아 지방의 아카펠라 공연이

열린다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했던 시기에는 몇 번을 지나다

들렀지만, 소리조차 나지 않더라고요.

이곳을 지나 더 안으로 들어가면 황제의 아파트 자리라고 하는데

원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고 하네요.

 

벽을 보면 위의 사진에 보듯이 움푹 파진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장식을 위해

조각상을 전시해두었던 곳이라 하네요.

그리고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지하 궁전이 나오고 계속 직진하면

리바 거리를 통해 항구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지금의 궁전 남쪽 문으로 나오면 바닷가에 리바(Riva) 거리라고 부르는

아주 아름다운 거리가 있는데 과거 이 길은 없었고 바닷물이 직접 지금 

지하 궁전이라고 부르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이곳까지 들어왔기에 배를 타고

직접 위의 사진에 보이는 궁전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궁전 앞을 매립해 리바 거리라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바다와 궁전이 연결된 곳으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특이하게 궁전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네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이 은퇴 후 살기 위해 이 궁전을 건설

(295년~305년)했다고 하니 로마 황제도 사랑했던 곳이라는 말이니 황제가

보증하는 훌륭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따라서 황제의 격에 맞게 최고급 자재로 지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브라츠 섬의 최고급 대리석.

이집트로부터 실어 온 화강암.

이집트 투트모세 3세에게서 가져온 스핑크스 등 당시에 명품으로

소문난 곳의 자재를 실어와 아낌없이 사용했다는 말이겠지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스플리트 부근에 있는 달마티아의 살로나(지금의 솔린)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의 출생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방 노예 출신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러니 출생 때 그의 처지는 무척 비천한 하층민 집안의 출신이라고 하네요.

 

 

이 말은 무슨 수저냐고 따질 것도 없이 수저도 없이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노력형으로 군에서 착실하게 경력을 쌓으며 황제의 친위 대장까지 되었다가

마침 황제가 불행하게도 암살되는 바람에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전형적인 덕을 본 케이스였다나요?

 

 

그때가 284년에 황제에 추대되어 305년까지 재위했다고 하네요.

그러니 황제를 호위하며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길에 나섰다가 니코메디아에서

암살당하자 그의 휘하 군단의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는 바람에 정말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싫었는데 떠밀려 황제가 된 경우라네요.

 

 

그때까지 수십 명의 황제가 번번이 교체되어 혼란한 시기였는데 그가 즉위하며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주변국으로 여러 차례 원정길에 올라 로마에

복속시킴으로 로마제국의 힘을 강화한 황제로 기록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로마 제국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혼자 모든 영토를 다스릴 수 없어

네 군데로 나눈 사분할 통치를 시작한 황제였으니 오히려 너무 커졌기에

불행의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지 싶습니다.

 

 

해변 쪽인 남쪽으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황동의 문(Brass Gate of

Diocletian's Palace)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이 바다로 바로 통하는 문이라 예전에는 바다에서 궁전으로 들어가는

궁전의 대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육지에서 공격을 받아 이곳에서 피난을 떠날 때 바다를 통해

퇴로를 열 때 이용했을 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은퇴 후의 황제였지만, 그래도 한때는 세상을 호령했던

로마 황제가 은퇴 후 사는 곳이 아닌가요?

따라서 궁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거주하였기에

많은 물자가 필요했을 겁니다.

 

 

당시 하인만 700여 명이 넘었다고 하네요.

그런 물자는 배를 멀리 지중해나 그 밖의 지역으로부터 이리로 실어 왔을 것이고

그런 대형 화물이 드나드는 곳이 바로 남문이라서 배가 바로 남문 입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설계했나 봅니다.

 

 

물론, 바다를 통한 외침에 대비해 문은 최소한으로 작게 만들었을 테고요.

그래서 남문으로 들어서면 놀랄 정도로 넓은 지하궁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하궁전은 배로 실어 온 물자를 내리는 하역장소이고 동시에

보관 장소였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게 크게 만들었을 겁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문은 반대쪽인 북쪽 방향에 있는 황금의 문(Kinoteka Golden

Gate)으로 네 곳의 문 중 가장 견고하게 만든 것으로 보아

사실 이 문이 정문에 해당하겠네요.

이 문을 통해 육로로 로마로 오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 문은 육지에서 드나드는 주 출입문으로 이용했을 듯싶고요.

이 문이 가장 화려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니 이름조차도

황금의 문으로 불렀을 겁니다.

그리고 이 문은 바로 황제가 태어난 곳이며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솔린으로 가는 문이기도 하다네요.

 

 

그리고 동쪽의 은의 문(Silver Gate)과 반대인 서쪽으로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철의 문(Željezna Vrata)이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궁전 안으로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네 곳이 있습니다.

그 네 곳의 문으로부터 궁전 안으로 들어오면 열주가 늘어선

페리스틸 광장(Trg Peristil)으로 정확히 연결됩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여기 스플리트에서는 모든 길이 위의 사진에 보이는 페리스틸 광장으로

통한다고 해야 맞지 싶고 남북으로 그리고 동서로 십자가를 이루는

교차점이 바로 이 광장입니다.

동서로 난 길을 중심으로 북쪽은 이곳 황제를 모시고 호위하는 병사나 관리인이

거주했던 장소고 남쪽 해변 쪽으로는 황제가 거주했던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동서 길이가 314.97m이고 남북으로 181.65m라고 하니 그 크기가 짐작되시겠지요?

성벽 높이만도 65m나 되니...

그런데 황제는 이곳에서 산 지 6년 만에 죽었으니 낭비만 한 셈인가요?

 

 

그가 황제 자리에 있을 때 이 궁전 공사를 했기에 이렇게 큰 궁전을 지을 수 있었지

만약,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궁전 건설을 시작했더라면

지금 크기의 10%조차 짓기 어려웠을 겁니다.

권력도 자리에 있을 때 권력이지 일단, 물러나면 상갓집 개처럼 처량한 신세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 때문에 지금의 스플리트가 태어났다네요.

이전까지는 솔린(옛 이름 살로나)이 큰 마을이었지만...

이와 비슷한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도 같은 처지였지만,

그곳은 시에서 궁전 안에서 살아가던 주민을 집단으로 이주시키고 궁전을 복원해

지금의 아름다운 곳으로 바꾸어 두었지만, 여기는 아직도 그대로 방치해두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