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날 그란데(Canal Grande)

2019. 5. 6. 09:00발칸반도·모스크바 2018/이탈리아

트리에스테는 내륙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인 듯한 모습의 운하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카날 그란데(Canal Grande)라고 부르더라고요.

카날 그란데는 대운하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이곳이 늪지대였기에

지반을 다지고 운하를 만들었나 봅니다.

 

예전 이곳이 어떤 역할을 했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사진이 있어 여기에 올립니다.
위의 사진에 보듯이 뻘밭 양쪽을 메우고 바닷물을 육지 안으로 끌어들여 배를 내륙 안으로

정박시켜 화물을 하역하고 싣는 작업을 편하게 하기 위한 시설로 설계되었다지요.

당시의 모습으로는 성당 앞까지 운하였으나 이제 성당 앞은 광장을 조성해

더는 그곳까지 들어가지 않습니다.

 

마테오 피로나(Matteo Pirona)가 1754~1766까지 12년간에 걸쳐 만든 것으로

당시 도시 건설의 핵심 요소로 Borgo Teresiano의 건설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Borgo Teresiano라는 말은 이 지역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를 추모하는 의미라 하네요.

이와 비슷한 곳인 베네치아에도 시내 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바로 카날 그란데라고 부르지요.

 

현재 Borgo Teresiano (Corso Italia에서 Piazza della Libertà까지)는 한 때는 소금 늪지였으나

현재는 완전히 매립되었습니다.

해안가와 직각을 이루는 운하를 파며 시내 안까지 배가 들어와 정박할 수 있도록 함으로

창고에서 화물을 쉽게 싣거나 내릴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지만, 나중에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Canal Grande는 도시의 유일한 운하로 남았습니다.

 

지금은 외항에 큰 부두를 만들어 하역작업을 하기에 더는 이곳은 항구 기능을 하지 않고

작은 요트나 정박하는 곳이네요.

이 운하는 당시에는 트리에스테의 상업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을 겁니다.

따라서 운하 주변으로 은행이나 카페 등이 많았고 아직도 그런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에는 원래 세 개의 다리(Ponte Bianco, Ponte Rosso 및 Ponte Verde)가 있었는데

지금은 붉은 다리(Ponte Rosso)만 남아있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다리가 카날 그란데를 가로지르는 붉은 다리인 Ponte Rosso(Red Bridge)입니다.
예전에는 다리가 없었을 때는 카날 그란데(Canal Grande)를 통해 

큰 배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작은 요트 정도만 들어옵니다.

 

카날 그란데라고 같은 이름의 운하가 베네치아에 있지요.

그곳이 더 유명한 곳이고요.

 

운하의 끝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성당입니다.

산 안토니오 교구 성당(Chiesa Parrocchiale S. Antonio Taumaturgo)이라고 하네요.
외관에서 보았을 때 6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제일 먼저 눈에 띕니다.

 

1808년에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피에트로 세티가 처음 설계를 했지만,

1825년에 건축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성당 외벽의 파사드 위로는 6개의 동상이 보이는데 산 Giusto, 세인트 세르지오,

세인트 Servolo, 산 마우로, 세인트 Euphemia 그리고 성 테클라의 동상으로

1842년 프란체스코 보사가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다리 위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James Joyce statue)이 세워져 있는데 이 조각상은

트리에스테 조각가인 니노 스팍노리(Nino Spagnoli)가 만든 작품이라 합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이곳 트리에스테에 도착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04년에

그가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웠다네요.

당시 제임스 조이스는 1904년에 트리에스테에 도착해 1920년까지 머물렀다고 하네요.

 

동상 밑에는 그의 아내 노라(Nora)에게 보낸 서신에서 인용한 글이라고 하네요.
"내 영혼은 트리에스테에 있다."

그가 이 도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말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의 흔적은 며칠 전 우리가 풀라에 갔을 때 어느 카페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카페에서 자주 차를 마시며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는데...

거기 풀라에도 영혼이 있었을까요?

영혼이 여러 개라면 여기저기 두고 다녀 좋겠습니다.

 

1904년 10월 20일 아일랜드에서 노라와 함께 이곳에 온 그는

처음 풀라에서 잠시 머물렀다고 하네요.

이듬해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Pontera del Ponterosso라는 건물 3층에 세를 얻어

영구적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컸기에 부부는 꾸준히 일자리를 찾았고 빚을 지게 되었으며

술을 마시는 습관 때문에 최악의 상황인 빈곤의 한계까지 가는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얻은 직업이 어느 부유한 가정의 영어 개인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성공한 작가이기에 이런 청동상도 만들어 기념하지요.

만약, 작품도 시원치 않았다면 그저 그런 인물로 우리가 알지도 못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