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뉴스 게토지역의 아픈 과거

2018. 4. 10. 09:00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리투아니아

빌뉴스에는 유대인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에 위의 사진에 보이는 시나고그(synagogue)라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이곳 빌뉴스에도 유대교 회당을 일컫는 시나고그가 있습니다.

이곳 리투아니아도 폴란드와 같은 연합국이었기에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

유럽 내의 많은 유대인이 모여 살았다 합니다.

시나고그란 유대인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봐도 되겠지요.

 

너무 많은 유대인이 살았기에 나치 독일의 강제 점령 때에는 오히려 더 큰 주목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유대인이 고통 속에 핍박과 가스실로 끌려갔을 겁니다.

차별이 없어 편안했던 삶이 오히려 악몽이 되고 말았네요.

시나고그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시나고게(συναγωγή, synagogē)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 이번 우리 여행에서 폴란드 크라쿠프의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이었던 게토 지구에서 많은 시나고그를 보았습니다.

시나고그는 유대인이 모여 사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사원이지요.

빌뉴스에는 위의 사진처럼 유대인 문화정보 센터까지 있더라고요.

아직도 많은 유대인이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많은 유대인이 떠났지만, 아직 이곳에 머물러 사는 사람도 많다고 하네요.

그러나 동네의 모습은 너무 지저분하고 관리하지 않아 우범지역처럼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그라피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그렇게 느꼈을까요?

 

시나고그가 중요해진 것은 서기 70년경에 로마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더는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면서부터였다고 하네요.

그 역사가 무척 오래전이었네요.

 

먼저 그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진을 구경하고 갑니다.

위의 사진은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입니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제국의 심장과도 같은 곳으로 그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만든 것이죠.

 

그 문 안쪽을 보면 오른쪽에는 전투 장면과 승전하고 개선하며 많은 사람의 환영 속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는 티투스의 모습이 보입니다.

 

마치 하늘의 황제인 양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 문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그의 형인 티투스 황제와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예루살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친 기념으로 81년에 세운 개선문이죠.

그러니 쉽게 이야기하면 집안에서 세운 공덕비라는 말이네요.

 

개선문 안의 왼쪽을 보면 당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전리품으로 그곳 유대교 회당에 있는

은촛대를 약탈해 가져오는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두었기에 우리는 당시의 모습을 역사적인 사실로 알 수 있었지요.

이들은 이렇게 당시의 사실을 조각으로 남겨두었기에 우리는 그때의 일을 분명히 알 게 되었네요.

 

물론 회당 자체는 성전이 멀쩡하던 바빌론 유수 이후 시기부터도 있었다지요.

성전에 가기 힘든, 먼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배우고 예배와 모임,

교육을 진행하는 장소로서 기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가 수립되었고 현대까지 발전해 이어지고 있답니다.

 

이 지역도 중세까지는 폴란드와 연합국을 이루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수도인 빌뉴스에는 유대인 거주지인 게토가 있었고

북쪽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를 정도로 번성했다고 하네요.

이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 중 나치 독일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9만 명에 달했다고 하니...

 

위의 동상은 빌뉴스 게토 지역에 머물며 유대인 사회에 봉사하며 살았던 의사였던 모양입니다.

늘 어린아이를 치료하며 봉사했던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입니다.

 

아이들은 예전에 조상이 받았던 고통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 마을에서는 또 어린 새싹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늘도 힘찬 소리로 태권도를 외치며 체력을 단련하고 있습니다.

 

19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빌뉴스에 집단 거주했기에 나치 독일의 눈에 더 거슬렸나 봅니다.

께 오손도손 살아가는 행복했던 일이 악몽으로 변한 이유가 바로 집단 거주는 아닐까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곳에 살았던 유대인도 나치 독일에 의해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겁니다.

예전에는 유대인에 호의적이어서 많이 모여 살았는데

오히려 집단으로 모여 살았기에 더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나라 없는 민족은 늘 그렇게 힘든 삶을 사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