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유적의 마지막 이야기

2017. 9. 1. 09:00이탈리아 여행기 2015/폼페이

지루했던 폼페이 유적의 마지막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검투사의 경기가 열렸던 원형 경기장 그 옆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갑니다.

원형경기장의 보조구장으로 보입니다.

 

대운동장(Palestra Grade)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점차 폼페이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며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인구도 점차 늘어나며 

당시 먼저 만든 포룸이 협소해 예비로 만든 공간이라 합니다.

 

3면이 이오니아식 원주의 포르티코로 둘러싸여 있고 끝쪽으로는 수영장도 만들어

놓았으니 당시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공간이 아니었을까요?

노는 것에는 이골이 난 민족인가 봅니다.

 

이곳은 가로 130m 세로 140m나 되는 무척 넓은 운동장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 만든 곳으로 젊은 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이곳에서 체력도 단련하고

건전한 정치 이념을 펼칠 수 있게 하려고 만든 공간이라고 합니다.

 

임시 전시장이 있네요.

moregine라는 인근 마을에서 발견된 어느 집의 벽화를 전시하고 있더군요.

벽을 통째로 뜯어와 전시 중이라 소중한 것이기에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로 앞을 막아두었습니다.

 

정말 화려하게 장식하고 살았다고 보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한 색도 폼페이 유적에서만 볼 수 있는 폼페이의 붉은색이겠죠?

 

이 집의 모형인가 봅니다.

실제 이 집은 발견 당시의 모습을 1/20의 규모로 축소한 것이라 합니다.

모형의 규모로 보아 대단한 부자였거나 세력가로 보입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물건 중 위의 사진에 보이는 닺도 보입니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닻이 보입니다.

폼페이는 해상무역을 통해 엄청난 재화가 모여든 곳이라는 게 분명하네요.

 

이곳에 살았던 사람의 발바닥 모양과 신발을 석고로 뜬 것도 보입니다.

 

당시 폼페이에 살았던 나머지 90%가 있었지만,

왜 이런 도시가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을까요?

이런 여신의 모습을 한 여인과 함께 살았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의 눈에 집에 그린 그림의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되세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기로는 당시에 폼페이는 저주받은 곳이라는 생각이 깊어

이곳을 탈출해 다른 지방에 이주해 살았던 사람 모두는 자신이 폼페이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고 폼페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함구했기에 폼페이 존재 자체가

사람의 머리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화산이 터진 날에 대한 이견도 있다고 합니다.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8월 24일이라고 기록했는데

나중에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 실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네요.

그들이 주장하는 날짜는 11월 24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발굴된 죽은 자의 옷차림이 여름옷이 아니라 두꺼운 가을 옷을 입었고

과일가게에서 발굴된 과일이나 채소가 10월에 나오는 것이라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가장 강력한 이유로는 죽은 어느 여인의 지갑에서 발견된 동전이

79년 9월 중순에 주조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화산이 발생한 날짜는 후자가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그런 것을 따져 무엇하나요?

가장 오래된 기록에 이미 날자를 적어 두었는걸요.
폼페이의 지금과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연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