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설월(風花雪月)의 고성 따리

2016. 12. 13. 09:30중국 여행기/윈난성 여행 2016

숙소를 정하고 모든 정리를 마친 후 저녁 식사까지 끝내고 고성 구경을 나섭니다.
따리에서 이 시각에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어슬렁거리며 고성 안을 구경하는 일 외에는 별로 없습니다.
따리는 7년 전과는 달리 정말 많은 사람이 늦은 밤까지 고성 안을 다니네요.

 

따리를 흔히 풍화설월(風花雪月)의 마을이라 한다지요?
바람과 꽃과 눈 그리고 달이라니...
아름다운 자연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요?

 

따리는 원래 중원의 한족과는 민족이 다른 다른 바이(백:白)족의 나라였다지요?
그들이 쓰는 모자가 바로 풍화설월을 그대로 보여준다 합니다.

 

바이족이 쓴 저 모자....
모자에도 風花雪月의 의미가 있다고 하지요?
제일 위쪽의 흰 부분은 창산 위에 있는 하얀 만년설을 표현한 것이라 하네요.
그 아래 붉게 수를 놓은 것은 들에 핀 아름다운 여러 종류의 꽃을 말하는 것이고요.
뒤로 길게 늘어뜨려 하늘거리는 하얀 실은 바람을 의미하고요.

 

그리고 모자 아래에 색색의 구슬을 넣은 것은 얼하이에 비치는 반짝이는 달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바이족의 모자는 풍화설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모자 하나에도 이렇게 깊은 뜻이?

 

그래서 사람들은 따리를 말하기를, 샤관의 바람이 샹관으로 불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얼하이에는 달이
창산 위의 만년설인 하얀 눈을 함께 비춘다는 風花雪月로 설명되는 아름다운 도시라고 합니다.
그냥 지나치고 지나면 그만인 모자에도 이들은 이런 의미를 담고 살아갑니다.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살아가지만, 바이족은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민족인가 봅니다.

 

바이족은 우리처럼 흰옷을 입고 하얀색을 칠한 집에서 살아갑니다.
이제 남문을 통해 고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은 세공품이 이곳의 특산물인가 봅니다.

 

젊은이들이 이곳저곳에서 밤낮으로 망치와 간단한 연장으로 직접 두드려 만들고 있습니다.
은세공은 윈난 성 허칭(鶴慶)의 신화마을이라는 곳에서 시작이 되었고,
은세공 기술자의 8~90%가 그곳 출신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손재주가 뛰어난 곳이가 보네요.

 

이곳 거리는 많은 은세공가공 가게가 즐비합니다.
많은 연장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망치 하나와 몇 개의 연장만으로 불에 달구어 두드려 만들면 그게 은팔찌도 되고 예쁜 장신구도 됩니다.

 

따리와 리장 사이의 여러 마을이 푸얼차를 싸는 종이를 만들고 저우청 마을에서는 염색 천을 만들고....
그리고 이웃 마을에서는 청동 유기제품을 만들었다지요?
이렇게 만든 상품은 차마고도를 통해 주변으로 팔려나갔을 겁니다.

그러니 당시 마방의 주요 취급 상품이 대부분 이 근처의 마을에서 생산한 제품인가 봅니다.

 

예전 차마고도를 따라 교역이 번창했을 때 이곳 따리는 중국에서도 제일 유명한 푸얼차(보이차:普洱茶)의 집산지로
차창(茶倉)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푸얼차는 차의 대명사로도 불리지요.

 

당시 따리는 토번과 중원의 당나라 사이에서 또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살았으며
두 지역의 중계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풍부한 삶을 누린 바로 그런 곳이라지요.
사실, 지리적으로 이런 곳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돈을 벌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존재조차 없이 사라지기도 하지요.
우리나라가 후안무치한 집단과 개념조차 없는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리장의 수허꾸전은 가죽제품의 장인들이 많았고.
좌우지간 차마고도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여러 마을이 장사에 필요한 모든 제품을 생산하는 특색 있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죠.

 

남문과 북문 사이에는 가운데 오화루(五華樓)라는 누각이 아름다운 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문은 남문과 북문 사이의 길인 푸싱루라는 부흥로(復興路)에 있는데 중간 지점이 아니고

남문에서 훨씬 가깝습니다.
마을 가운데 있는 문이기에 드나들기 위해 만든 문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리 고성은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고 그 문의 방향이 남문과 북문과의 일직선으로 놓여있고
오화루가 약간 토라진 듯 방향을 살짝 돌려놓았네요.
서문인 창산문은 옥이로라는 길에 있고 동문 격인 얼하이 문은 인민로에 있어 방향이 완전히 어긋나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풍수지리에 의거해 그리 만들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니면 말고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 지방에 살았던 사람은 손재주가 뛰어났고 푸얼차라는 아주 소중한 상품이 있어

차마고도를 통한 장삿길에 일찍이 나서 큰돈을 벌었다지요?

그러나 따리는 지형적인 이유로 상대적으로 안전했지만, 그런 안전이 오히려 외부로 나가는 길을 막아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중원에 자연히 흡수되고 말았겠지요.

세월이 흐르며 세상은 하나의 기가 또 다른 기를 만들고고 기운이 바뀌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