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어깨 위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한 콜럼버스

2015. 11. 3. 08:00스페인 여행기 2014/세비야

위의 사진은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마친 후 당시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는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의 계단을 올라 궁전으로 들어가

양 왕 앞에 귀국 인사를 올리는 모습입니다.

많은 귀족이 그의 귀국을 보기 위해 궁전에 모였고 콜럼버스 뒤로는 그가 노예로 데려온

인디오가 보이지만, 사실, 황금을 많이 찾지 못해 그는 대신 노예를 데려왔으며,

이사벨 여왕은 그들도 에스파냐 신민이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의 출생은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도시인 제노바라는 곳이라네요.

배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직물 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합니다.

제노바가 항구 도시다 보니 어려서부터 바다를 동경하며 꿈을 키웠나 봅니다.

그곳은 이탈리아 상인과 동방상인 간에 무역거래가 이루어졌고 그는 이를 눈여겨보며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무역거래라는 확신에 바다에 대한 꿈을 키워갑니다.

그러니 가업으로 벌 수 있는 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를

배를 통한 무역을 통해 가능하다는 일을 알아버린 겁니다.

 

그런 그도 탐험가로서의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13세기 이탈리아 상인이자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난 후였다네요.

그 책 속에 나온 인도와 중국은 콜럼버스에 손짓하는 듯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육로는 오스만 터키가 그 목줄을 손에 쥐고 있던 시기라 바다를 꿈꾸었나 봅니다.

 

사람은 꿈만 꾼다고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지요.

꿈을 꾼다고 꿈만 꾸다 보면 잠퉁이가 되어 佳人처럼 맨날 멍하게 살아갈 겁니다.

그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계기는 바로 결혼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선장의 딸과 결혼함으로 장인으로부터 항해술과 해도 제작을 통달하게 되었다지요.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해상왕 엔히크를 위시해 많은 사람이 대서양에 진출해

스페인보다 더 앞선 해양국가였지 싶습니다.

 

기술을 갖추었다고 꿈이 실현되나요?

꿈이 크면 클수록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잖아요?

탐험을 위해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고 후원자가 있어야 하지요.

지금처럼 정치인도 후원자의 돈만으로 부족해 펀드를 만들어 나중에 돌려준다고 하며

돈을 모으지만, 당시는 그런 펀드 만드는 일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고요.

 

무역에 관심을 두다가 25세 때 그는 직접 배를 타고 떠났지만,

배는 해적의 공격으로 파선되며 간신히 목숨만 건지게 되었고 그 후 그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선장과 항해사를 만나게 되었다네요.

당시 리스본은 해양국가로 가장 활발하게 대서양 진출을 했던 나라잖아요.

 

그는 1478년 부유한 포르투갈 선장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유품인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등을 물려받음으로 그의 꿈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되었지 싶네요.

거기에는 대서양의 바람 상태를 비롯한 중요한 항해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로써 평소에 꿈꾸던 동양으로 향하는 항해를 위한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겠네요.

 

당시 유럽은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을 향한 동양 앓이에 빠져있을 때였지요.

비단, 도자기에 향료는 모든 유럽인에게는 꿈의 대상이었지요.

낙타를 이용한 거래는 오스만 튀르크의 손에 제한적이었지만, 직접 배를 이용해 실어온다면,

그야말로 로또보다도 더 큰돈을 손에 쥘 수 있겠네요.

 

그래서 그는 영국, 포르투갈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왕을 만나 황금알 낳는 법을 설명하지만...

황금 닭도 아닌 촌닭으로 황금알을 낳겠다고 하니 왕 대부분은 뜬구름 잡는

봉이 김선달로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이게 어디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겠어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했지만, 이미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동양으로 가는 희망봉 루트를 계획하고 있어 한마디에 거절당하고 맙니다.

이에 콜럼버스는 나라는 더 크지만, 해양국가로는 2등인 스페인으로 넘어갑니다.

 

그런 그에게 한 줄기 광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1492년 그라나다까지 접수하며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당시 스페인의 양왕은 콜럼버스를

코르도바의 알카사르에서 접견하고 그중 한 사람인 이사벨 1세가 그의 후원자가 되기를 허락합니다.

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세상으로

만들었던 해가 바로 그해가 아니겠어요?

정말 절묘한 시기였으며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이 결정이 스페인의 미래를 결정한 탁월한 결정이 될 줄이야...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조각이 감격해 이사벨 여왕의 손에 입맞춤하는 콜럼버스가 아닐까요?

항해를 떠나기 직전의 모습일지도 모르지만요.

 

사실 여러 나라를 돌며 모두 미친놈으로 오해받고 퇴짜를 맞았는데...

콜럼버스는 여자에 무척 호감 가는 인상이었을까요?

그 계약 조건을 보면 누구나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런 이유로 두 사람 사이에 섬씽이 있었다는 둥, 이사벨 여왕이 서방보다 콜럼버스를

더 흠모했다는 둥... 저잣거리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기 시작했다네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증권가 찌라시에는 한술 더 떠 모처에서 구체적인 만남의 날짜와 장소까지 적혀있었는걸요.

 

우여곡절 끝에, 1492년 4월 17일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으로부터 신대륙 탐험에 대한

후원을 약속받게 되었다네요.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Don)’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고

새로 발견된 땅에서 얻을 수입의 10%를 자신에게 배당하고, 모든 상선의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해달라고도 요구하게 되었답니다.

또한,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달라는 요구도 곁들였다지요?

정말, 당시의 사회 상황으로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담은 종이 한 장 내민 자에게 엄청난

후원금이 들어가는 사업을 하며 이런 파격적인 거래까지 하다니 이사벨 여왕의 눈에

뭐가 단단히 씌었나 봅니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세요?

 

이러한 엄청난 조건은 그가 포르투갈 왕에게 제시한 조건과도 같았는데,

이사벨 여왕은 결국 콜럼버스가 원하는 조건을 승인하게 되었다네요. 

여왕은 처음 계약을 체결한 뒤에도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처음 약속한 뒤 6년이 지나서 첫 항해가 이루어지게 되어 이제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처음에는 이사벨 여왕도 거절했지만, 당시 가톨릭계에서는 포르투갈과 경쟁적으로 더 넓은

선교지역이 필요했기에 그들이 나서 여왕을 설득함으로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이제 그해 8월 3일 역사적인 항해가 시작됩니다.

세계사를 통틀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사건이 시작된 셈이죠.

결론적으로 스페인에는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가 되어 천하를 호령했던

무적함대를 보유하는 계기가 되었잖아요.

떠나기 전에 여왕과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가 세비야 대성당이라죠?

 

세비야에서 양왕을 알현하고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콜럼버스는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떠나는데 "어디로?" 라며 물어보니 위의 사진처럼 손가락으로 대서양 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잘못 항해한 덕분에 신대륙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사는 그를 위대한 탐험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런 칭호를 붙여야 하나 생각하게 하네요.

 

출발 전에 이사벨 여왕에 제시한 조건을 볼 때나 그가 목표로 했던 동양의 향료나 비단

그리고 도자기 등을 대량으로 저렴한 가격에 배로 실어와 그에 대한 부가세 딱 10%를 자기 몫으로

챙길 것이었고 교역하는 상선의 통행료도 징수할 권한이며 그곳을 식민지로 삼아 총독에

부왕(副王)으로 인정해줄 것 등을 볼 때 탐험가라기보다는 탐욕가였는지 모릅니다.

 

탐험을 끝낸 후 이듬해 3월 그는 신대륙에 30여 명의 선원을 남긴 체

다시 스페인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지요.

바르셀로나에 있는 왕의 광장에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왕궁의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 알현했다고 했나요?

그때 올랐던 계단이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한 체 남아있네요.

 

이사벨 여왕을 알현하며 콜럼버스는 "서프라이즈!"라고 외치며 신대륙에서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놓았을 겁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되지요.

사실,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탐험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과 과장된 보고를 통해

엘도라도로 포장했지 싶네요.

 

그게 신대륙인지 모르고 콜럼버스는 인도나 중국의 어느 곳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신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오라고 부른 이유가 인도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지요?

죽을 때까지 그런 줄 알고 살았으니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이사벨 여왕은 그를 신대륙의 부왕으로 임명하고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1.200명의

선원을 거느리고 2차 탐험을 계속 떠납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실적이 별것이 없자 후원을 외면하게 되었다네요.

그러나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 루트를 통해 엄청난 향료와 재화를 싣고 오자

이에 자극받아 이사벨 여왕은 4차 탐험까지 지원하게 되었다지요?

"우리가 보낸 콜럼버스는 촌 동네를 갔기에 소득이 적을 거야..." 하며 말입니다.

 

네 명의 왕 중 두 사람은 콜럼버스를 후원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들고

뒤의 두 왕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이야기.

좌우지간 죽어서 왕의 어깨 위에 잠든 사람은 콜럼버스가 유일한 사람이지 싶습니다.

그것도 네 명의 왕의 어깨 위에서 말입니다.

 

인도로 가려다 잘못 간 콜럼버스는 사실 그의 업적은 당시로는 실패한 탐험가였습니다.

후일 그게 신대륙이라는 것으로 지금은 위대한 탐험가로 존경받지만,

당시로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이죠.

그 후 스페인의 많은 젊은이가 앞다투어 남미로 들어가며 정복자라는 말인 콩키스타도르라고

했지만, 그들은 약탈에 심지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문화 말살에 앞장선 파괴자였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콜럼버스 달걀이라는 말이 있지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하지 못한 일을 했을 때 이르는 말이지요.

신대륙을 발견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늘어갔습니다.

어느 날 콜럼버스가 귀족들의 파티에 초대되어 자기가 발견한 신대륙에 대하여 연설을 하자,

한 사람이 크게 빈정거렸다네요.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여 새로운 섬을 발견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라고 위의 사진처럼 말입니다.

 

얼굴이 상기된 콜럼버스는 탁자 위에 놓인 달걀을 집어 들고 참석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울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시도해 보았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무도 못 합니까? 그럼 내가 해 보겠습니다.”

그는 달걀 끝을 탁자에 쳐서 껍질을 깨뜨렸다.

그리고는 깨어진 쪽을 밑으로 하여 쉽게 달걀을 세웠다.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처음으로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의 탐험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