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2015. 11. 2. 08:00스페인 여행기 2014/세비야

위의 사진은 그라나다 이사벨 광장(Plaza Isabel La Catolica)에 있는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모습으로 두 사람 사이가 연인처럼 너무 가깝지 않으냐고요?

사실, 그런 오해도 받을 수 있겠네요.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이지만, 이사벨 여왕이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콜럼버스는 신대륙 탐험을 위한 계획안을 들고 이사벨 여왕을 만나 브리핑하는 중이죠.

사실은 신대륙 탐험이 아니라 인도로 가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봐야겠지요.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이 천지개벽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지 싶습니다.

이 일로 하여금 스페인은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으니까요.

 

세비야를 떠나며 오늘은 불세출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에

대해 생각해보렵니다.

스페인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도시를 가나 콜럼버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게 동상이든 거리 이름이든 광장 이름으로도 쉽게 만날 수 있지요.

물론 음식점 이름에서도 쉽게 눈에 띕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다녀온 후 수많은 젊은이가 앞다투어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의 꿈을 꾸며 이곳에서 출발했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남미의 문명이 사라지고

수많은 인디오가 죽었지만, 그를 위대한 탐험가로 평가하기도 하지요.

 

콜럼버스는 세비야 과달키비르 강가에 서서 이곳을 떠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오늘도 그날처럼 노을이 아름답게 물든 과달키비르 강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그를 생각합니다.

마치 콜럼버스의 가슴처럼 오늘은 과달키비르 강이 무섭게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아니... 하늘이 황금으로 보입니다.

 

콜럼버스는 이 황금의 탑에 올라 눈을 지그시 감고 탐험을 무사히 마치고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까요?

너무 많은 금을 실어 배가 가라앉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입니다.

 

세비야는 콜럼버스가 그의 꿈을 이룬 곳이지요.

여기저기 다니며 탐험에 대한 지원을 부탁했지만, 그런 곳 대부분은 거절했으나

이곳 세비야에 머물던 이사벨 여왕은 그의 부탁을 수락하며

그 꿈을 이루게 해 준 곳이 바로 세비야입니다.

 

그녀는 하루에 목욕을 세 번이나 할 정도로 깔끔을 떨었지만, 그라나다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는

보아브딜의 무어족을 알람브라 궁전에서 쫓아내기 전까지는 갑옷을 벗지 않겠다고 늘 입고

다녔다 하며 1492년 드디어 알람브라에서 버티던 무어족은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 이르고

드디어 퇴로를 보장하면 그들의 원래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무려 1년여를 위의 그림에 보이는 궁전 아래에 진을 치고 항복을 종용한 바람에 지금의

세계문화유산인 알람브라 궁전이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고그대로 남게 되었으니 오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즐기니 이는 이사벨 여왕의 공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모든 일이 끝나자 콜럼버스에게도 기회가 온 겁니다.

만약 보아브딜이 알람브라에서 더 오래 버텼더라면 이사벨은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기에

콜럼버스의 제안에 큰 비용이 투입되는 대규모 선단을 꾸리는데 후원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만약, 이사벨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면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이 수포가 되었을 겁니다.

왜?

이미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영국 그리고 프랑스 왕을 만나 그의 계획을 브리핑했지만, 

모두 콜럼버스를 사기꾼으로 생각해 거절했기 때문이죠.

세상일이라는 게 이렇게 타이밍이 맞아야 하나 봅니다.

 

그는 이곳에서 산타 마리아호에 올라 핀타호와 니냐호에 120명의 선원을 태우고

신대륙을 향해 못 먹어도 고를 외쳤을 겁니다.

그때가 역사적으로도 시험에 자주 나오는 1492년 8월 3일이었을 겁니다.

스페인에서 이 해는 아마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해가 분명합니다.

 

먼저 지긋지긋하게 버티던 무어족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해며 민족중흥의

기틀이 되는 콜럼버스의 신대륙을 향한 첫걸음의 뗀 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큰 배는 이곳 세비야까지 올라올 수 없었기에 지중해와 과달키비르 강이 만나는

팔로스 항에 정박했고 콜럼버스는 여기서 작은 배로 출발해 하구에 정박했던

산타 마리아호를 타고 떠났다 합니다.

 

그날 무척 많은 사람이 이곳에 서서 떠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환호했을 겁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어요?

나중에 마젤란도 바로 이 자리에서 출발했다고 하데요.

 

그는 포르투갈에서 결혼했지만, 부인 펠리퍼는 아들 하나만 낳고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항해를 준비하며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아들이었을 겁니다.

자신도 모르는 이번 항해에 아들과 같이 간다는 것은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헤어지는 게 두려운 아들에게 "아들아! 아빠가 이담에 돈 많이 벌어올게! 아빠가 성공하면

우린 대대로 귀족이 되고.... 아빠 믿지?"

위의 사진에 보듯이 아들에게 축구공 하나 주고 아빠 돌아올 때까지

공이나 차고 놀고 있으라고요?

아니지요.

"지구는 이렇게 둥글단다."하며 지구 모형을 주었을까요?

이곳 세비야 길거리에서 흔하게 보이는 오렌지를 따서 아들에게 지구를 설명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떠나는 아빠를 위해 이런 노래를 불렀을 겁니다.

"아빠!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는 결국, 이곳 세비야를 떠날 때 아들과 함께 출발해 항해를 위한 배가 정박했던

팔로스 항에 가는 도중 어느 수도원에 내려 그곳에 아들을 부탁했다 합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판의 왼편에 아들의 모습이지 싶네요.

"우리 아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는 신부에게 고백합니다.

"사실, 이번 출항은 안전하게 돌아온다는 것을 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원에게는 아주 안전한 항해라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로 가는 게 아니라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무조건 서쪽으로 갈 겁니다.

바다의 서쪽 끝은 끝도 없는 지옥일 수 있고 악마가 사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난 자네를 믿네! 무사히 돌아오도록 천주님에게 기도함세"

위의 사진을 보니 바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듯합니다.

 

1492년 10월 12일 출발한 지 71일 만에 드디어 신대륙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네요.

그렇다고 어디 항해가 순탄하기만 했을까요?

2달 넘게 항해하며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 선원은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반란의 기미까지 일어나게 되었지요.

이를 눈치채고 돌아가자는 다수의 선원에게 콜럼버스는 만약, 1주일이 지나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는 약속까지 했다지요?

 

사실, 그는 신대륙을 발견하기 5일 전인 10월 7일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호 주변에

떠다니는 나뭇가지와 갈대나 풀잎을 발견했기에 육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호기롭게 1주일이란 말미를 자신 있게 얻었지 싶네요.

선원의 대부분은 항해경험조차 없는 범법자였고 배를 탈 경우 사면해 준다는 약속에

배를 탔기에 이런 사실을 몰랐지 싶네요.

선원 모두 콜럼버스의 수에 당한 겁니다.

 

이렇게 신천지를 발견한 탐험가 콜럼버스...

사실 발견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사람들이고 유럽 사람으로

처음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소개한 사람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지 싶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정해진 해결법 같은 것은 없다.

인생에 있는 것은 진행 중의 힘뿐이다.

그 힘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해결법 따위는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 생텍쥐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