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5. 09:3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방통(龐統)의 흔적을 찾아 구경해보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방통사묘 안에 모신 방통의 조상입니다.
조상을 보니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못생긴 사람의 대표선수라 했는데 직접 조상을 보니 그리 못생긴 얼굴이 아니고 佳人의
희망이 바로 방통보다는 조금 더 잘생기지 않았나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전혀 아닙니다.
사내답고 매력이 넘치는 얼굴 아닙니까?
삼국지 이야기 속에는 무척 견적이 많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라고 알려진 사내가 방통이 아닌가요?
방통의 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새끼 봉황이라는 봉추(鳳雛)라 합니다.
유비의 군사중량장으로 건안 19년(211년) 유비가 촉을 삼킬 때 함께하며 우유부단한
유비에게 서천을 칠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유비의 말을 타고 스스로 앞장서 이곳
백마관을 오르다 매복한 유장의 군사들에게 백마관 코 앞인 낙봉파에서 화살을 맞고
숨을 거둠으로 유비가 서천을 칠 명분을 만들어 준 사람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드라마틱하게 꾸미기 위해 만든 말일지 모릅니다.
좌우지간 여기서 죽기는 죽었나 봅니다.
위의 그림을 보니 일부러 못난 얼굴로 그린 듯합니다.
바로 이 그림이 佳人에 희망을 불어넣어준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맞다면 견적이 조금 많이 나오지 싶습니다.
여기 백마관이 있는 사슴 머리에 해당하는 녹두산(鹿頭山)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못생겼다고 역사는 이 젊은 천재를 일찍 죽여버렸나요?
공명은 잘생겨서 오래 활동하게 하고 추남은 못 생긴 것도 억울한데 이렇게 쉽게 죽여버려요?
원래 잘생긴 사람이 돈도 더 많이 벌고 잘산다는 통계가 있지요.
佳人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통계를 믿습니다.
왜?
못생긴 佳人 스스로를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179년에 태어나 214년에 죽었으니 안타깝게도 겨우 36살에 죽은 비운의 책사였네요.
삼국지라는 소설을 읽다가 가장 안타깝고 허망한 대목이 젊은 기재 방통의 죽음이었습니다.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일찍 가버린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수경선생이 유비에게 이르기를 와룡이나 봉추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한 인물이 아닌가요?
우리가 차에서 내린 백마관 북문은 관광객이 드나드는 지금의 정문인 셈입니다.
옛날에는 남문과 북문이 서로 통했을 텐데 이곳을 찾는 여행자가 없어서 그랬나
이제는 남문은 폐쇄되고 닫혀버렸더군요.
백마관 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보이는 게 위의 사진에 보이는 옛 도로가 보이네요.
사람이 밟지 못하게 보호되고 있네요.
이 도로가 바로 금우도라고 하는 아주 오래된 고역도입니다.
역참을 잇는 길이기에 역도(驛道)라 부른답니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국가적으로 관리하던 길이고 장사를 하러 다녔던 길이라는
말일 것이고 이렇게 기원전부터 익주를 출발해 이런 도로를 따라 중간마다 역참을 거치며
중원인 장안으로 오갔을 길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 역참 이름이 남아있는 곳이 있지요?
말죽거리처럼...
촉의 도읍인 청두와 중원인 지금의 서안인 장안을 잇는 길 중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길이라는데 금우고역도 중 특히 백마관 북문에서 남문까지
지금까지도 수레바퀴 자국이 완벽히 남아있습니다.
그 도로폭이 좁은 곳은 1m도 되지 않고 넓은 곳은 2m가까이 되는 그런 길입니다.
당시에 주로 바퀴가 하나인 수레를 이용했나 봅니다.
위의 사진에 보시듯이 바로 어제까지 다녔던 것처럼 정확히 보입니다.
이미 우리가 금우도에 관한 전설과 이야기는 검문관에서도 보고 들었고 명월협에서도
보았는데 이미 기원전 312년 전에 만든 로마의 아피아 가도(Appia Avenue)보다
4년 빠른 기원전 316년에 완공한 길입니다.
물론, 지금 보시는 게 그때 만들었다고는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수없이 보수하고 다시 만들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때 만든 도로가 지금 이 자리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나중에 다시 낙봉파를 가며 금우고역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보려고 합니다.
백마관 관문을 지나며 오른쪽으로 보면 위의 사진에 보이는 작은 석문이
나타나기에 우선 석문으로 들어갑니다.
여기가 바로 사슴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녹두산입니다.
숲이 제법 많이 우거져있네요.
오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인구가 많은 중국 관광지라도 비수기와 시간대가 다르면
아주 호젓하게 구경할 수 있네요.
방통의 묘는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계단을 따라 잠시 올라가야 합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어느 코미디언이 늘 자신의 외모를 빗대어 했던 말입니다.
사람이 어디 외모로만 살아갑니까?
그런데 이곳 방통사묘 안에 있는 조상을 보니 그리 못생겼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에 佳人이
살아가는 힘은 이런 못생긴 사람 때문이었는데 여기 와서 보니 또 주눅이 들어 버립니다.
오늘 또 한번의 마음의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못생긴 佳人이지만, 마눌님의 격려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갑니다.
못생겨서 죄송하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 한 그 코미디언은
오히려 못생겼기에 더 인기를 끌었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우리는 대부분 외모로 평가합니다.
유비도 방통을 외모로 평가했고 손권도 그랬지요.
유비가 사람 보는 눈은 영 아니었나 봅니다.
지금뿐이 아니라 그때도 사람을 외모로 평가했나 봅니다.
그러나 손숙은 방통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주군인 손권에 추천했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지음(知音)이라고 할 수 있는 공명에 소개했고 공명은 추천장까지 써주며
주군인 유비를 찾으라 했다는군요.
그런데 인의를 앞세운 유비마저도 방통을 보는 순간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해 아주
작은 고을로 보냈으나 나중에 무식하다고 생각한 장비가 그의 능력을 보고 유비에 다시
이야기 함으로 결국,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사람 보는 눈은 유비도 장비보다는 못하다는 증거네요.
그러니 중국이라고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겠네요.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말입니다.
여기 佳人처럼 못생겨서 한때는 무척 슬펐던 사내를 만나러 계단을 오르는 중입니다.
이제 계단 위를 올려다 보니 방통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석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佳人은 방통의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같은 마음이니까요.
그래서 방통의 죽음에 더 마음 아파했는지 모릅니다.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쓴 글입니다.
"蓋鍾子期死, 伯牙終身不復鼓琴. 何則. 士爲知己者用, 女爲說己者容."
이 말은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는데, 이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의미라 합니다.
지음(知音)이라는 말로 종자기와 백아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합니다.
佳人에도 지음(知音)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사마천이 했다는 말에 화딱지가 나서 오늘 사마천에게 빠떼루 주고 갑니다.
왜 같은 비유를 여자는 얼굴에 화장하는 정도고 남자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게 정당한 비유라고 보십니까?
이때가 기원전인데 그때도 남자와 여자의 비교가 이렇게 일방적이었습니까?
남자의 목숨이 여자가 화장하는 것 정도의 가치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까?
누구는 목숨을 걸어야 하고 누구는 잠시 화장만 고치는 정도고...
그러면 요즈음 유행하는 성형은?
만약, 여자가 성형하는 것을 비유한다면 사내는 일백 번 고쳐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입니까?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더니만, 맛이 간 겁니까?
아니면 중성이라 중립적인 이야기를 한 겁니까!
에효~ 사내로 살아간다는 일이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언컨대, 방통은 역사상 많은 사람 가운데 士爲知己者用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실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말을 쉬워도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기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대표선수...
아!!!
방통이 잠든 무덤이 있습니다.
백마관은 녹두산이라 부르는 작은 산 위에 만든 관문입니다.
이 안에 바로 방통의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작고 무덤 위를 돌로 덮어놓았습니다.
봉분으로 마무리하지 않은 것은 못생겼다고 이렇게 한 겁니까?
유비가 서천을 취할 명분은 만들어주기 위해 몸을 던진 그런 사내가 여기 잠들었습니다.
방통이시여~ 어찌 그리 쉽게 목숨을 던지셨습니까?
그 방법 외에는 유비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습니까?
자기 체면만 생각하는 유비가 너무 야속하고 밉습니다.
사내란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까?
사내란 원래 그렇게 사는 겁니까?
한정후방사원지묘라...
나중에 유비가 방통에게 내린 시호가 정후라 했나요?
죽고 난 후 정후가 아니라 신이라 내리면 무엇합니까?
진작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 했다면 많은 군사도 죽지 않았을 것이고 방통의 기재로
더 일찍 대업에 성공했을지 모릅니다.
방통이 잠든 묘 앞에 서니 공연히 마음이 울적합니다.
제대로 기재를 펴보지도 못하고 우유부단하고 체면만 중시하는 유비의 성격 탓에
일찍 죽은 방통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도 유비를 향한 불평 한 마다 하지 않고 방통은 장렬하게 목숨을 던져
유비의 결심을 끄집어냈습니다.
방사원...
이제 편히 쉬세요.
방사원이나 佳人이나 외모로는 남에게 호감 받는 사람이 아니기에 누구보다 방사원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고 만약, 방사원이나 佳人이나 잘 생겼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코 높이가 아무리 높아졌다 한들 우리만큼 했겠소?
천하가 열두 번은 더 뒤집어 지지 않았겠소?
그의 묘 앞에 백마 한 마리가 창틀 안에 갇혀있는데 그 말에는 다시 붉은 천으로
정신사납게 묶어놓았는데 아마도 방통이 죽던 날 유비에게 빌린 적로마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흉마라고 소문이 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다루는 사람에 따라
명마도 될 수 있고 준마도 될 수 있다고 유비는 탔지만, 결국, 방통의 목숨을 앗아
갔기에 이렇게 포박해 놓았나 봅니다.
그때 서서가 적로마는 흉마라고 타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래도 이 적로마가 유비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뒤쫓아온 채모를 피해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바로 유비의 목숨을 구한 그런 말이잖아요.
지금 방통의 묘 앞에 적로마는 저렇게 붉은 천으로 꽁꽁 묶여 빠떼루를 받고 있습니다.
수경 선생 사마휘가 유비에게 했던 말 중 와룡과 봉추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고 했는데 와룡이란 자빠진 용으로 제갈공명을 말하고
봉추란 새끼 봉황으로 방통 사원을 말하는 이야기라 합니다.
기재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일찍 죽었기에 새끼 봉황이라고 했나요?
만약, 오래 살았다면 봉황이 가루다 정도는 되었지 싶습니다.
방통사묘에 있는 방통의 소상 뒤로 봉추를 의미하는 봉황 두 마리가 보입니다.
제대로 한 번 비상하지도 못하고 유비의 체면 때문에 그만 날개가 꺾여버렸습니다.
두 사람의 기재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했지만, 삼국지 이야기 속에서의 활약은
공명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이며 주연보다도 더 주연 같은 조연으로 출연하며 개런티도
유비보다 더 받았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봉추는 출연횟수도 얼마 되지 않고 그야말로
조연 전문배우가 맡는 역할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천하를 놓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세월이 무척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기 두 사람을 모두 데려가 함께 천하를 논한다면 천하는
佳人의 손바닥 안에 있지 않겠어요?
잠시 두 사람이 속삭이는 조상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나 엿들어 볼까요?
그러나 佳人 혼자만 알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한다는 말은 천기누설에 해당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있으며 천하를 손에 넣지 못한 유비는?
천하의 멍청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여행이란 다닐 당시에는 즐거움도 있지만, 사실 힘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힘든 일조차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많이 힘들수록 더 행복해지는 게 바로 여행입니다.
살아가며 힘든 일조차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한층 성숙하지 않을까요?
여행이란 무엇이라 정의하지 말고 그렇게 다니는 겁니다.
그게 여행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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