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9.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봉추 무덤을 지나 사당까지 보았습니다.
사당을 지나 계속 남쪽으로 나가면 남문이 보입니다.
그러나 남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원래 남문이 정문으로 그곳으로 들어와 사당을 보고 뒤의 무덤을 볼 텐데
지금은 폐문되어 북문이 정문이네요.
원래, 전사후묘(前祠後墓)가 옳은 위치인데 거꾸로 무덤을 먼저 보고
그 다음 사당을 구경하다 보니 이상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경했던 길은 북쪽에서 들어와 남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북문을 정문으로 만든 이유가 방통이 죽은 낙봉파와 방통혈묘가
북문으로 오르는 길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백마관의 가치는 방통이 죽음을 예상하고 올라오던 길이
바로 북문 앞이기 때문일 겁니다.
佳人의 말이 정말이냐고요?
책임질 수 있느냐고요?
佳人의 글을 읽으신 분은 잘 아실겁니다.
책임도 지지 않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호환마마보다도 더 해를 줄 수 있다는 것도...
방통의 묘나 사당의 문은 모두 남쪽을 향해 지어졌으니 우리가 걸었던 길은
마치 뒤문으로 들어온 듯하지만, 남문은 잠겨 사용하지 않고 관광객이 드나드는 문을
북문밖에는 없으니 어쩌겠어요?
그래도 느낌이 거꾸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영 이상하네요.
그러니 자꾸 지나온 방향을 뒤돌아 봐야 위의 사진처럼 한정후사방통사라는
사당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
위의 사진이 바로 사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셈입니다.
양쪽의 돌사자가 아주 오래된 듯하고 향로도 보입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산문 위로 말라 비틀어진 아주 오래된 듯한 나무가
방통의 아픈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저 나무가 방통의 답답한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우선 방통사묘에 걸려있는 위의 지도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노란 선은 북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아주 오래된 돌로 포장한 도로인
금우고역도로 금우고역도는 북쪽으로 낙봉파로 이어지는 길이기에
나중에 낙봉파로 가는 길에 다시 사진으로 보겠습니다.
우리가 돌아본 곳을 붉은 선으로 나타냈습니다.
북문을 통해 들어왔으며 사당을 지나 비랑을 보고 남문 성루에 올라 남쪽을
한번 보고 다시 왼쪽의 백향천을 지나 숲길을 따라 장비전을 본 후
다시 들어온 문으로 나가면 이곳은 거의 본 셈입니다.
이런 금우고역도를 트레킹 도로로 다시 복원해 개방하면 어떨까요?
저 유명한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말입니다.
청두를 출발해 시안까지 기원전에 만든 금우고역도를 따라
몇 달간 걸어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러면 명월협도 지나고 검문관도 양평관도 지나 포사잔도를 지나 진령산맥의
진창도를 넘어 오장원을 지나 시안으로...
지금은 사라진 모든 역참을 만들어 쉬고 먹고 잘 수 있게 하고
그리고 멋진 관문도 모두 복원하는 겁니다.
왜?
이 길이 바로 공명의 북벌 루트이고 실크로드 남로가 아니겠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로마의 아피아 가도(Appia Avenue)보다
4년이나 빠른 시기인 기원전 316년에 건설되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는 길이니까요.
佳人 혼자 걸으라고요?
산문 앞에서 봉추비랑으로 가는 길에는 패방이 하나 서 있습니다.
무척 오래된 듯합니다.
패방이 일부는 부서지고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패방인지 누각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네요.
이름이 백마관요씨절효방(白馬關堯氏節孝坊)이라는 패방입니다.
어때요?
무척 오래된 패방으로 보이지 않나요?
이 패방은 뤄장에 고향을 둔 요씨라는 사람을 기리는 패방이라 합니다.
청나라 도광 6년인 1826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자 재혼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하는데 이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요?
그럴 때마다 모두 이런 멋진 패방을 세운다면 세상은 패방 천지일 겁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여인의 몸으로 재가를 하지 않은 일이 바로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한
일이었다 하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이곳 고역도 보수에 내놓아 유실되거나
부서진 길을 고치는 데 앞장섰다 합니다.
그러니 전 재산을 기부해 바로 이곳을 지나는 금우고역도를 보수하는 데 크게 이바지해
그 공덕을 기리는 공덕 패방이네요.
거의 200여 년이 더 되어간다고 하지만, 대부분 부서지고 남은 게 얼마 없습니다.
왜?
돌로 만든 패방이 이렇게 쉽게 부서질까요?
여기도 역시 문화혁명 때 집단광기에 의해 부서졌다 합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보존하고 후손에 알리고 싶은 유물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패방 뒤로는 시아주행(示我周行)이라고 쓴 석비가 쌍둥이처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원래는 다섯 개가 서 있었다 합니다.
여기에서 비석 장사라도 했나요?
두 개라고 하지만, 왼쪽의 것은 오른쪽의 것을 보고 새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사실 하나만 남아있는 셈입니다.
원래의 것도 위의 두 글자 시아(示我)라는 글자만 남았습니다.
이 말은 시경의 녹명지십(鹿鳴之什 : 사슴 울음이라 녹명과 시의 묶음이라는 지십)이라는 시에
나오는 말로 그곳에 실린 이야기 중 시아주행(示我周行)이라는 구절이 있어 빌려 온 모양입니다.
왜 녹명에서 빌려 왔을까요?
여기가 바로 사슴의 머리라는 녹두산이라 그랬을까요?
이렇게 무식한 佳人은 혼자만의 생각으로 여기가 녹두산이기에 녹명이라는 말에 나오는
유명한 글을 연계했을거라고 생각하며 다니는 중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쩌겠어요?
어디 佳人도 녹명에 나오는 그 부분만 빌려 올까요?
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
유유녹명 식야지평 아유가빈 고슬취생
吹笙鼓簧 承筐是將 人之好我 示我周行
취생고황 승광시장 인지호아 시아주행
우~우~ 우는 사슴 소리 들판의 들풀을 뜯는구나
내게는 아름다운 손님이 있으니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고 생황을 불어라.
생황을 불고 북을 치면서 올리는 광주리를 받으세요.
나를 좋아하는 이여~ 나에게 큰길은 보여 주소서.
빌려는 왔지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빌려 왔나 봅니다. 그쵸?
그러나 마지막 글인 시아주행의 의미인 "나에게 큰길을 보여주소서."라는 의미를 볼 때
이런 금우고역도와 아주 잘 어울리는 글임에는 분명한 듯합니다.
그러니 손님을 환영하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우정을 나누는 의미를 담고 있다네요.
이 글을 이곳에 석비로 만들어 놓은 의미는 여기가 바로 방통을 모신 정후사이며
정후사는 다른 이름으로 용봉이사사(龍鳳二師祠)라고 부릅니다.
이 말이 와룡인 공명과 봉추인 방통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요.
두 사람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글도 보여달라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옛날 중국인들은 귀한 손님이나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여 즐거울 때 흥을 돋우는 역할은
비파(슬 : 瑟)와 생황(생 : 笙)을 연주하였나 봅니다.
바로 와룡과 봉추를 비파와 생황에 비유하여 이 글을 새겨 놓았나 봅니다.
이 말은 중국인들 가슴에 와룡과 봉추가 얼마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나를
보여주는 말이라 생각되네요.
두 사람은 중국인이 가장 즐거울 때 연주했다는 비파와 생황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물론, 이 또한 佳人만의 엉뚱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佳人의 이야기는 호환마마보다 더 위험하다고 하나 봅니다.
산문 앞으로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한편에는 봉추비랑이라고 글이 있습니다.
많은 문인이 이곳을 다녀가며 방통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와 봉추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매정한 사람이겠죠?
지금까지 여러곳을 다니며 비랑을 보았지만, 여기만큼 멋진 비랑은 별로 본 기억이 없습니다.
찾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기에 더 멋진 비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자를 알면 여기서 한참을 즐길 수 있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요?
사진이야 많이 찍었지만, 지루하실 것 같아 몇 장만 올립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무식한 佳人을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먼저 들렸던 랑중에서 보았던 그림이 보입니다.
위의 사진 제일 왼쪽의 그림 말입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랑중 출신으로 청나라 때 섬서성과 감숙성 총사령관인 마덕소라는
사람이 쓴 집자괴성점두도(集字魁星点斗圖)라고 하는 작품말입니다.
이 글은 사람 모습으로 형상화한 글로 과거시험 급제자들의 학문하는 자세를 형상화한 것이라 하네요.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발은 큰 거북(鰲)을 밟고 다른 한 발로는 하늘의 북두칠성(斗)을 떠받들고
왼손으로는 벼루를 오른손으로는 붓을 잡고 있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라 하네요.
이 그림 속에는 정심수심극기복례(正心修身 克己復禮)라는 글자가 숨어있다고 하는데...
흥!!! 그냥 통과합니다.
섭섭해 하실 분을 위해 제일 아래에 이 글자의 의미를 적어두었습니다.
백마웅관...
검문관에 갔을 때 그곳에는 천하웅관...
웅관이 지천입니다.
관루의 모습은 여기보다는 검문관이 훨씬 보기 좋지요,
여기도 웅관이라고 말하기는 아부하는 것 같아 조금 쑥스럽습니다.
촉천승경이라고 썼나요?
그 옆에는 방통이라 쓴 듯합니다.
이 모든 글을 한글 읽듯 읽을 수만 있다면 중국 여행이 한결 더 유익하고 재미있겠지만,
몰라도 슬프지 않습니다.
왜?
그냥 두리번거리며 다니는 것도 즐거우니까요.
여행이란 완벽함도 좋지만, 佳人처럼 그냥 무식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좋습니다.
참 잘 쓴 글입니까?
아니면 낙서입니까.
이렇게 써야만 품위가 있나요?
龍鳳이라고 쓴 글입니까?
금방 날아갈 것 같습니다.
다음에 가시는 분은 이 글자를 보지 못하실 겁니다.
이미 하늘로 날아가고 없을 테니까요.
봉추가 잠든 곳이라 봉황의 鳳자로 보이는데 마치 어미 품에 안긴 봉황 새끼인 봉추를 쓴
글로 보이는데 엄마 품에 안겨 찌찌를 빠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한자는 또 하나의 예술이 맞나 봅니다.
그 글자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보면 나도 몰래 글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정말 새끼 봉황이
어미 봉황의 품에 안겨 응석 부리며 젖을 빠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혼자만의 느낌으로 다닌다고 누가 뭐라하겠어요? 그쵸?
내가 즐거우면 세상이 모두 즐겁습니다.
의열전후세위무기웅관(義烈傳後世威武寄雄關)이라고 쓴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관문은 그리 폼 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더 폼 나는 검문관을 보고 왔기 때문에...
이 글을 쓴 사람은 검문관을 보지 못했나 봅니다.
佳人이 지금까지 본 관문 중에 검문관이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디 관문의 외모뿐이겠어요?
이곳 관문에 전해오는 방통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관문을 더욱 빛내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용봉명고(龍鳳名高)라...
와룡과 봉추를 싸잡아 그 이름이 하늘을 찌른다는 의미인가요?
여기 방통을 빛내기 위해 공명이 자주 찬조 출연합니다.
초록은 동색이라 같은 문관으로 군사의 일을 해서인가요?
공명은 출연료도 받지 않고 방통을 위해 오늘 여기에 자주 까메오로 얼굴을 내밀어 자리를 빛내주네요.
봉추충혼(鳳雛忠魂)이라고 썼나요?
정말 자기를 알아줄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인정받는다 해도 다른 것도 아니고 목숨을 던진다는 일은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요.
요즈음 정말 이런 사람 보기가 드믈 겁니다.
이외에도 무척 많은 석비가 봉추비랑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먹물깨나 먹고 이름깨나 날렸다고 이곳에 오면 저렇게 비석 하나씩 세우고 갔나 봅니다.
정말 멋진 그림을 보는 듯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한참을 머물며 비랑을 걸었습니다.
풍경이 아닌 모습을 보고 佳人 가슴 한 켠에 응어리진 것이 확 풀리는 그런 경험은 또 오랜만입니다.
지면 관계로 찍어온 사진을 모두 올릴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혹시 이곳을 찾아가신다면 구석에 버림 받은 듯 있는 봉추비랑은 잊지 마시고 둘러보세요.
정말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방통의 조상을 비석에 새겨놓았습니다.
짱구 이마의 방통만 새긴 게 아니라 말도 한 마리 있네요.
저 말이 바로 유비가 타던 적로마라는 흉마일까요?
방통은 역시 앞이마가 튀어나오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중국에서는 추남에 들어갑니까?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성이라는 화타도 저런 이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를 보는 듯합니다.
나중에 화타의 고향 보저우도 들렸기에 그때 화타의 조상도 함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가 처한 환경, 우리가 느끼는 생각, 우리가 하는 행동...
이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것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은 내 앞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곳을 방문하며 글자를 몰라 답답함도 한자 공부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지
누가 옆에서 방해하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잖아요.
오직 佳人 스스로가 불쌍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몇 곳의 무덤을 구경했지만, 여기만큼 멋진 비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관제묘가 가장 크고 많은 비석을 모셔두었지만, 그 느낌이나 멋진 글은 여기만 못한 듯합니다.
佳人이 무식해 비록 글의 내용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 느낌만으로도 대강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정심수심극기복례(正心修身 克己復禮)는 유교 사상의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로,
개인의 도덕적 성숙과 사회적 조화를 강조합니다.
이 문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심(正心):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고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올바른 판단과 도덕적인 행동의 기초가 됩니다.
수심(修身):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연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성숙과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극기(克己): 자신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제어하고 자제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복례(復禮): 예(禮)를 되찾는다는 의미로,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기준을 준수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개인과 사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심수심극기복례는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사회적 조화를 이루기 위해 중요한
원칙들을 담고 있는데 유교 사상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을 통해
올바른 인간관계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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