뤄양 박물관으로 갔지만...

2013. 3. 13.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제 관림 구경을 마치고 뤄양 박물관으로 갑니다.

나오는 길에 문표 받는 직원들에게 박물관 가는 버스 편을 물어보니 관림 앞에서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고 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박물관으로 갑니다. (1.5원/1인)

오후 1시 30분경에 출발하니 관림을 구경하는데 겨우 1시간 30분만 걸렸습니다.

 

뤄양이라는 도시는 삼국지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도시입니다.

원래 삼국지의 이야기가 여기부터 시작했을 테니까요.

이제 동탁이 힘을 가질 때 잠시 시안으로 옮겨갔다가 그 힘이 조조에게로 넘어오며 뤄양을 거쳐 쉬창으로 갔지요.

그러나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한실을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 때 다시 뤄양으로 도읍을 옮겨왔다 합니다. 

 

관림 앞에서 15번 버스를 타고 섭만(攝灣)이라는 곳에서 내려 골목길로 잠시 걸어가면

바로 새로 지은 뤄양 박물관 뒤로 나가게 됩니다.

그냥 기사가 내리라 했고 손가락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주어 그 방향으로 걸어가며 동네 사람에게 길을 묻습니다.

골목길을 빠져나가야 하기에 물어보며 가는 게 가장 좋습니다.

 

버스 기사에게 또는 동네 사람에게 박물관을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길이 위의 사진처럼 골목인 후통을 빠져나가야 하기에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동네 사람이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이렇게 골목을 빠져 간신히 찾아왔습니다.

박물관 건물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난번 쉬창에서도 그 규모에 입이 따악 벌어져 아직도 입이 아픈데 여기도 장난이 아닙니다.

중국은 정말 문화를 사랑하는 문명국인가 봅니다.

 

그런데!!!

젠장!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바로 오늘이 월요일이기 때문이지요.

佳人의 여행은 언제나 이렇게 무계획적입니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문명국에 비문명 인이 오니 이렇게 제대로 날짜도 맞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서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서 헛걸음했다는 인증사진이기도 합니다.

 

이제 어디를 갑니까?

지금 갈 길을 잃은 어린 양(사실은 늙은 늑대일지 모릅니다.)이 찬바람 휑하니 부는

박물관 광장에 서서 길을 묻습니다. 

작년에 뤄양을 와 용문 석굴과 북망산 고묘 박물관은 다녀왔고요.

 

아침부터 소림사를 떠나 부지런히 뤄양으로 와 관림을 보고 나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럴 때는 시티투어가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로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오는 일이지요.

 

그래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을 물어보니 바로 박물관 옆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답니다.

이때는 따지고 묻지 말고 타고 가는 겁니다.

77번 버스네요.

번호도 죽여주게 행운의 번호 7이 겹치기 출연했습니다. (1원/1인)

버스가 가는 곳이 우리 숙소가 있는 뤄양역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보니 왕성 광장이라고 있습니다.

 

그럼 그 광장에 들려 놀다가 걸어서 뤄양역으로 가면 우리 숙소에 도착할 것 아니겠어요?

두 정류장이면 걸어가기에 아주 적당한 거리네요.

이렇게 우리 부부는 박물관 구경을 하려다 완벽하게 미수에 그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나갑니다.

여기도 강변에 상하이의 동방명주같은 방송송신탑이 있나 봅니다.

 

버스를 내릴 즈음 광장을 도는데 광장 한가운데 멋진 조형물이 보입니다.

마치 벤허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

재빨리 배낭을 메고 내려서 광장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컥! 여기도 박물관입니다.

뤄양박물관 구경을 휴관일이라 하지 못했지만, 여기는 그런 것 없답니다.

입장료는 30원인데 뤄양의 다른 곳과는 달리 15원 반표도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갈 곳도 마땅하지 않은데 무조건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어요?

 

박물관 이름이 길고 어렵습니다.

주왕성천자가육박물관(周王城天子駕六博物館)입니다.

이 말은 주나라 왕성에 천자가 탔던 6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박물관이라는 의미 아닌가요?

그러니 여기는 동주 시대의 천자가 탔던 말과 마차가 발견된 현장이라 합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궁성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이와 유사한 차마갱이 여러 곳 발견되었지만, 여기는 광장 공사 중 우연히 발견해 그 자리에

발굴 모습 그대로 굳혀서 전시한 곳이라 합니다.

중국은 중원이 산이 없는 평지라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그 시대에 벌써 마차를 많이 사용했나 봅니다.

왕이 죽으면 왕의 무덤에 마차와 말 그리고 거느렸던 사람까지 순장함으로 이런 유적이 가끔 발견되나 봅니다.

순장이란 북방민족의 관습으로 주나라도 북방계열이었다는 의미겠네요.

이 지역은 황하의 범람으로 수시로 도시가 물속에 사라져 옛날 모습이 그대로 묻혀있어 마

그때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나 봅니다.

 

한 마디로 발굴 그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나 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많은 사람이 살았던 곳이고 과거 문명이 일찍 개화되었던 지역이라

이런 유물이 제법 많은 가 봅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지금까지 발견된 차마갱과는 달리 유일하게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발견되었다는 게

다른 박물관에 전시된 차마와는 차별화되나 봅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백 투 더 퓨처"처럼 옛날로 돌아갔다 와야 하네요.

그것도 2.500여 년 전으로 말입니다.

 

말이 끄는 마차를 본다는 것...

그럼 벤허의 한 장면을 본다는 말인가요?

천자가육(天子駕六)이라...

누가 하늘이 자식이고 누가 인간의 자식입니까?

말만 여섯 마리가 끄는 마차만 타면 천자가 저절로 되는 겁니까?

하늘의 아들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랍니까?

 

이미 우리는 안양의 은허박물관에서 차마갱을 보았기에 여기의 모습은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여기가 처음이라고 하니 자세히 구경하렵니다.

위의 사진은 발견 당시의 과정을 찍은 사진인가 봅니다.

 

안양의 은허는 상나라인 은나라의 도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상나라의 시작은 공자의 고향 취푸에서였고 안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번성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배꽃보다 더 아름답고 장미보다도 더 향기롭다는 달기라는 여인에 빠진 왕께서

나라를 홀랑 말아드셨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달기는 전갈의 독을 지닌 것을 주왕은 몰랐나 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전갈의 독을 지닌 여인이라 하더군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찌 마음속에는 그런 싸이코패스의 마음을 지니고 살았을까요?

그때가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의 일이잖아요.

 

좌우지간 그때 제후국이었던 무왕은 강태공인 태망공을 이끌고 군주국인 은나라를 손보려고 가는 중

우리가 잘 아는 백이, 숙제를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 백이, 숙제가 무왕에게 충이 무엇이고 효가 무엇인지 건방 떨다가 죽게 생겼을 때 옆에 따르던 태망공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졌지요.

백이, 숙제는 그때 많이 삐쳤나 봅니다.

 

바로 수양산으로 들어가 주나라 땅에서 나는 것은 먹지 않겠다고 금식한다고 난리 치다가 나물 캐러 산에 올라온

왕미자라는 사람에게 고사리 캐 먹다가 딱 들켜 "그 고사리는 주나라 땅에서 나는 게 아닌 겨?

어째 고사리는 먹는감?" 이라고 하는 바람에 "오잉? 그러네~" 하며 그날부터 고사리도 먹지 않고

그냥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했다는 백이, 숙제는 일개 아녀자보다도 못한 생각을 지녔단 말입니까?

 

백이가 형이고 숙제가 동생이라네요.

두 사람은 상나라의 제후국 중의 하나인 고죽국 군주의 아들이었지만, 아비가 똑똑한 작은아들에게 군주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다 하며 형제가 서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놀이를 하다가 둘 다 군주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국, 가운데 아들로 군주를 세웠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제후국인 주나라의 서백창이 선정을 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 길을 가던 중 그는 죽고

그의 아들인 무왕이 군주국인 상나라를 치려고 가는 길에 말고삐를 잡고 "아비가 죽었는데 장사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효에 어긋나는 일이며 제후국이 군주국을 치는 일도 충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리다 변을 당할 뻔했지요.

다행히 강태공의 제지로 목숨은 건졌지만, 주나라가 상나라를 치고 군주국이 되자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며 수양산에 들어가 중국산 고사리로 연명했다고 하네요.

 

그때 그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네요.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 뜯네

무왕은 폭력을 폭력으로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 우, 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사라졌으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아! 나는 떠나리 운명이 쇠했으니..."

 

정말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들켜 죽었다고요?

단식한다고 밥은 먹지 않고 고기와 라면만 먹어도 단식이 됩니까?

그런 일로 단식에 들어간다면 물도 마시지 말아야 하지 않나요?

너무 심한 말인가요?

 

이렇게 주나라는 시작되었고 잘 살다가 12대 왕 유왕인 궁열은 그만 포사라는 여자에 또 빠집니다.

달기에 빠진 은나라는 황제의 후손이라는 탕왕이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폭군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세운 이래 31대 주왕에 이르러 달기와의 주지육림에 빠져 절딴나버렸다네요.

그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자손인 유왕은 또 같은 전철을 밟으며 포사라는 여인에 빠져 같은 길을 걸었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결국, 나라가 망할 때는 꼭 여자가 나타나네요.

아니면 일부러 여자를 출연시키나요?

이렇게 주나라는 제후국에서 군주국을 정벌하고 넘버원인 군주국으로 올라섭니다.

이때부터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을 유지한 나라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 역사가 약 800여 년 정도라네요.

 

800년이라고 하면 대단히 오랫동안 유지한 나라에 들 겁니다.

세상에 신라처럼 천 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는 흔치 않습니다.

결국, 궁열은 포사 때문에 나라를 홀랑 털어먹고 말았지요.

 

그러나 그의 아들인 의구가 주변 제후국의 도움으로 도읍을 호경(지금의 시안 부근)에서

낙읍(지금의 낙양)으로 옮기며 지금까지의 주나라를 서주라 부르고 서주의 동쪽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 만든 주나라를 동주라 부른다 하네요.

그러니 바로 여기에 있는 유적은 바로 서주에서 옮겨온 동주의 유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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