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무정이 출토된 곳

2013. 1. 31.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번에는 짐승을 제사에 이용한 수제갱 유지(獸祭坑遺址)로 갑니다.

당시 사회는 사람만 제사의 제물로 사용한 게 아니라 짐승도 사용했다 합니다.

그래도 짐승을 사용했으니 다행이네요.

전부 사람으로만 하라고 하면 여기저기 곡소리가 많이 났을 텐데...

 

 

여기는 상나라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시한 제사와 순장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주변에 수천 개의 제사갱이 발견되었고 여기에 순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희생된

사람의 유골이 거의 2천여 명에 육박한다 합니다.

상나라의 제사풍습을 연구할 수 있는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봐야 하겠네요.

 

이곳의 제사갱이 아주 규칙적으로 만들어졌고 안에 있는 유골은 대부분 목이 잘린 모습으로

묻혔으며 여자나 아이의 유골도 발견되었다고 하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로 당시의 인간은 인간의 두뇌와 형태를 갖춘 고도로 영리한

짐승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순장제도는 춘추시대까지 이어졌다 합니다.

이런 풍습이 진나라나 한나라로 넘어오며 도용(陶俑)으로 점차 대치되며

그 화려함은 당나라 시기에 만든 당삼채라는 예술품으로 바뀌게 되었지요.

비인간적인 순장이라는 풍습은 결국, 아름다운 예술품인 당삼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인간다운 중국인이 되었나 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인육을 먹는 풍습은 얼마 전까지도 계속되었지만요.

 

 

어디 사람의 유골만 발견되나요?

개도 있고 말도 있고 양도 있지요.

수제갱유지에는 많은 동물도 함께 묻혔다 합니다.

 

 

상나라 사람들이 말을 순장시킨 것은 마차를 순장시킨 것처럼 망자의 능력에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고 그랬기에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를 모셨던 사람을

모두 함께 순장시켰고 여기는 수천 명의 사람을 목을 잘라 함께 묻었네요.

많이 죽여 묻는 자가 큰 권력을 가진 자라...

얼마나 더 죽여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겁니까?

 

 

여기 왕릉 유지에는 제사갱만 천여 개라 합니다.

사람을 묻은 인갱, 차마를 묻은 차마갱, 동물갱, 기물갱....

그중 가장 많은 무덤이 사람을 묻은 인갱이라 합니다.

 

 

아마도 이곳에서만 수천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하니...

대부분 머리와 몸은 분리되어 인두 제사라도 지냈나 봅니다.

위의 사진처럼 구리 시루에 사람의 두개골이 들어있습니다.

몸을 묻은 무덤은 장방형이고 머리만 묻은 곳은 방형으로 구분했다 하니

중남미 문명이 사라질 때 이런 방법으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

하늘에 제사 지낸 일도 큰 몫을 했다지요?

 

 

이번에는 왕릉 장묘전람관이라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은 이 부근에서 발굴된 묘 중에 가장 큰 대묘로 상나라 왕 중에

가장 힘이 강했던 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합니다.

그는 무정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를 기리며 만들었다는 사모무정(司母戊鼎)이라는

대형 솥이 바로 여기서 발굴된 곳이죠.

여기는 상나라 왕조의 무덤군이자 제사 장소로 사용된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사모무정(司母戊鼎)...

솥단지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떤다고 생각하겠지만, 솥도 솥 나름이지요.

중국이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솥입니다.

아직 중국은 압력솥의 보급이 되지 않아 밥맛이 별로지만,

이 솥만큼은 자랑스러워하겠지요.

위의 사진 속의 사모무정은 모조품으로 제일 처음 발견된 곳에

당시 모습 그대로 두었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사모무정이 진품으로 안양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크기로 따진다면 중국에서 발굴된 솥 중에 가장 큰 솥으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크기뿐만이 아니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런 크기의 청동 솥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그 구성성분을 분석해보니 구리가 84.77%, 주석 11.64%, 아연 2.79%, 기타 0.8%로

구성되었다 하니 지금이야 크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당시로는 하이테크 최점단 기술이

동원돼 만들었을 겁니다.

왜?

그때까지 만들어본 적이 없는 크기니까요.

 

 

무덤의 모습은 한자로 “甲”자 형태를 하고 있으며 묘도는 묘실의 남부로 연결되어

있고 묘실은 장방형의 한 개의 갱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시신 한 구와 옥으로 만든

커다란 도끼가 있었다고 하네요.

이 외에도 메워진 구덩이에서 또 다른 6구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곽실(槨室)에서는

5구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되었다네요.

묘실의 서북 모서리에 있던 매워진 갱에서는 8개의 목제 가래가 발견되었고,

묘도에서는 22개의 사람 두개골이 발견되었다네요.

 

 

묘지의 평면도인가 봅니다.

유물이 발견된 위치도 표시했네요.

제일 깊은 곳에 사모무라는 대형 솥이 발견되었다네요.

 

 

발굴 당시의 사진입니다.

사람의 두개골도 보이고...

 

 

........

개뼈다귀도 보이고 말 뼈다귀도 보입니다.

 

 

사모무정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예상 모형인가 봅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그 안에 쇳물을 붓고...

다리와 몸체는 하나의 틀로 만들었고 귀두 부분은 따로 만들어 붙였다 합니다.

 

 

거푸집을 자세하게 이해를 돕게 설명한 그림입니다.

 

 

사모무정이 있던 곳에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습니다.

진품은 물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요.

 

 

그 깊이가 상당히 깊습니다.

그런데 이 깊은 곳에 사모무정이 있었다는 일을

어떻게 알고 파내려 갔을까요?

 

 

이곳 전청은 은허 왕릉 유적 중에서 다른 곳과는 달리 유일하게 발굴 후 그 모습이

보존된 곳으로 다른 무덤들은 인접한 무덤들과의 거리가 좁아 물리적으로 전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판단되고 상나라 왕릉의 매장 습관과 등급제도 등, 은허의

장례제도에 관한 진귀한 실물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발굴 당시 인골의 위치에 모형으로 전시해 놓았습니다.

저들은 이곳에 묻힐 때 어떤 느낌일까요?

억울한 느낌이었을까요?

아니면 운명이라 받아들였을까요.

혹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죽었을까요?

 

 

말 뼈다귀, 개뼈다귀...

처음 발굴 당시의 모습은 이랬나 봅니다.

 

 

당시 묘를 만들 때의 상상도이네요.

저기 작업한 사람을 저 위치에 그대로 묻었을까요?

조폭들이 이걸 배워 가끔 생사람을 이렇게 묻는 협박을 하나 봅니다. 

 

 

넌 누구냐?

말이랍니다.

말을 먼저 죽여 이렇게 얌전하게 묻었나 봅니다.

모든 동물은 묻기 전에 먼저 죽인 후 모양을 잘 잡아 묻었다고 하네요.

그렇기에 마치 잠든 듯 가지런하게 얌전히 누워있지요.

 

 

세월이 지나면 살은 먼저 사라지고...

그래도 뼈는 오래도록 남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네요. 

 중국에는 이런 유물도 제법 많이 발굴됩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뼈가 사라지지 않고 무더기로 남아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지금도 중국에는 많은 왕릉이 있지만, 여기야 말로 왕릉의 교과서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 이유가 가장 먼저 만든 곳으로 가장 완벽하게 발굴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발굴되므로 중국의 역사교과서도 다시 쓰였을 것이고 중화문명의 기원은

그 세월을 한참 끌어올린 곳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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