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원, 대수법과 관수볍

2012. 12. 28.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서양루(西洋樓)는 원명원에서 가장 멋진 핵심 볼거리일 듯하네요.

이곳은 입장료가 15원입니다.

그러나 들어올 때 통표를 끊었으면 여기는 그냥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반표가 10원이니 무척 효율적입니다.

 

서양루 경구는 유럽풍의 건축물을 본떠 만든 지역으로 전성기에는 10여 채의 건축물이 이곳에

있었다는데 이곳 건축물 대부분은 이탈리아 건축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이라 합니다.

그가 환생해 지금 이런 폐허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무척 슬퍼할 것 같습니다. 

 

해안당(海晏堂)이라는 멋진 건축물을 보고 그다음 유적으로 갑니다.

그 뒤에는 분수로 보낼 물을 저장했던 물탱크였던 축수지(蓄水池)라는 유적입니다.

용도가 물 저장 탱크라 생긴 게 역시 다른 유적과는 달리 단순하게 생겼습니다.

 

외관상 동서방향에서 보면 2층으로 보입니다.

안에는 물을 끌어올려 저장할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안에는 전부 160 입방미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하니 제법 큰 물 저장통이네요.

 

가던 발길 멈추고 잠시 귀 기울여 봅시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물소리가 들리고 매 두 시간 마다 시간에 맞추어 동물의 얼굴을 한

주둥이에서 토수를 통해 물을 뿜어내며 그 물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오늘 같은 날에는

하늘에 고운 무지개를 그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오늘 같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말입니다.

 

이제 서양루의 하이라이트인 대수법을 보렵니다.

위의 사진에 기둥이 보이고 아치 모양의 멋진 예술품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바로 대수법(大水法)이라는 서양식 분수라 하네요.

 

1759년 건륭 24년 건설한 이 건축물은 서양루라는 원림의 구성물 중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 건축물은 거대한 석감(石龛)형식으로 만들었다 합니다.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답니까?

 

전면에는 사자 머리에서 물이 나와 7단계로 물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분수 폭포로 만들었다

하고 그 아래에는 달걀형태의 둥근 모습으로 국화꽃 연못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그 형태만 볼 수 있지만, 완성되어 분수에서 물을 뿜을 때는 그 아름다움을

글로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분수의 가운데는 청동 사슴을 만들어 그 뿔에서 물이 여덟 줄기로 뿜어져 나오게 장치했던

모양인데 사슴 좌우로 열 마리의 청동으로 만든 개가 사슴을 향하여 물을 뿜게 하여 놓았다 합니다.

분수는 제 분수도 모르고 너무 화려했나 봅니다.

 

이렇게 사슴을 향해 열 마리의 개가 물을 뿜는 의미는 옛말에 나오는 사냥개가 사슴사냥을

한다는 엽구축록(猎狗逐鹿)이라는 말이지만, 사실은 축록(逐鹿)이라는 말은 그 이면에

천하를 다툰다는 깊은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권력이나 지위를 얻기 위해 다툼을 이르는 말이라 하니 이미 황제는 천하를 얻었는데

또 무슨 욕심이란 말입니까?

아닌가요?

황제는 이미 천하를 손바닥 안에 움켜쥐었기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여기다 천하를 숨겨놓기라도 했나 봅니다.

 

대수법 앞에는 좌우로 서양풍의 대형 분수탑이 또 두 개가 서 있었다 합니다.

버로 위의 사진에 분수탑이 서 있던 연못이 있고 가운데 분수탑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냥 바라보아 마치 로마의 유적을 바라보는 그런 느낌입니다.

지금은 바라보아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생각만 드네요.

 

대수법(大水法)이라고 부르는 유적을 다시 복원한다면, 바로 위의 사진 같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구리로 만든 사슴이 분수 가운데 있고 그 사슴뿔에서 여덟 줄기의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주변에 수많은 개떼가 사슴사냥을 위해 맹렬하게 짓고...

사슴이 너무 불쌍해...

 

그러나 지금은 살아있는 동네 똥개가 근처를 서성입니다.

세월은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했던 곳에 동네 똥개마저 우습게 보나 봅니다.

개야~ 개야~ 짖지 마라.

네가 짖으면 사슴이 슬프단다.

 

그 건너편에는 서양식 분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황제의 관람석인 관수볍(觀水法)이라고

있는데 비록 서구의 약탈 때문에 파괴되었지만,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위의 사진 중앙에 황제는 보좌를 놓고 앞에 있는 대수법에서 뿜어내는 엽구축록(猎狗逐鹿)의

분수를 바라보며 천하가 내 손에 있음을 마음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사는 게 바로 이 맛이야~ 인생 까이 꺼 모 있겠어?"

정말 좋았겠어요. 그쵸?

 

뒤로는 다섯 개의 석 병풍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석 병풍의 장식은 서양식 군대깃발인 군기, 갑옷, 도검, 대포를 조각해 놓았습니다.

이런 서양풍의 돌 병풍을 만들어 뒤에 놓으면 좋은가요?

폼 날까요?

아니면, 그런 것이 황제를 지켜준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양쪽으로는 한백옥으로 만든 탑이 좌우로 하나씩 만들어 놓았네요.

관수법이 파괴된 이후 여기에 있는 다섯 개의 석 병풍과 석탑 두 개는 사라졌고 후에

베이징 대학 구내에서 발견되어 1977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합니다.

 

여기 중국인이 만든 빅토르 위고의 흉상이 있습니다.

유리로 덮어놓아 사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전쟁이 끝난 후인 1861년 이런 말을 글로 남겼다 합니다.

"어느 날 두 명의 도적이 원명원에 침입했다. 한 도적은 물건을 훔치고 다른 도적은 불을

질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면 약탈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서 두 명의 도적은 영국과 프랑스입니다.

 

문명국임을 자부하는 영국과 프랑스는 아마도 여기서 약탈해간 유적을 지금도 공개하지 않고

박물관 창고 깊숙히 감추어 놓고 지들끼리 가끔 꺼내보며 키득거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얼마나 더 도둑질하고 얼마나 더 감추어야 문명국이 되는 겁니까?

그런데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사람이 아닌가요?

그래서 여기 서양루에는 중국정부에서 빅토르 위고가 자기편을 들어 주었다고

흉상을 세워주었습니다.

 

터키의 튀르크 족은 전쟁을 할 때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려고 어느 지역을 점령하면 3일간

파괴와 약탈을 허용했다 합니다.

파괴와 약탈을 통해 전쟁의 공포와 스트레스도 풀고 굶주린 병사에 욕구도 해결하게 하고

주머니까지 두둑이 채우게 했나 봅니다.

이런 군사운영이 유럽의 많은 곳을 점령하고 다스렸던 오스만제국을 만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런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플인 이스탄불을 접수하고 약탈을 하지 못하게 했답니다.

그래서 카톨릭 성당인 성 소피아 사원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었겠지요. 

이 정도로 폐허가 될 지경이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은 죽었을까요?

 

선인승로대(仙人承露臺)라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신선이 황제의 무병장수를 위해 손수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받고 있는

모습의 석상입니다.

한심한 신선입니다.

신선이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이렇게 오랜 세월 이곳에서 이슬이나 받고 있습니까?

이슬만 먹고 살 수 있어요?

 

원명원은 돌아보며 마음 한구석이 칼로 도려낸 듯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네요.

황족의 휴식을 위해 만든 원림이 여러 개 있지만, 여기는 다른 곳과는 많이 다릅니다.

건물 양식도 중국풍이 아니라 유럽의 정원을 보는 듯하고...

 

이런 아름다운 곳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있네요.

아픔이 아름다움으로 보인다는 게 아이러니하군요.

돌아보면 전혀 중국답지 않고 마치 로마의 유적 사이로 걸어 다닌 듯합니다.

 

역설적으로 폐허로 남아있어 더 아름다운 곳...

그 이유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디 화려한 모습만 좋다고 하겠어요?

이런 곳도 거닐다 보면 쓰러진 유적이 당시의 아픈 모습을 말하잖아요.

지금은 퇴색되고 바래버린 곳이지만, 이게 바로 세월의 흔적이 아니겠어요?

 

서구열강세력에 의해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는 보기 드물게 웅장하고 우아한 정원인

원명원. 그 옆에 있는 중국식 정원 이화원과 더불어 중국 정원의 두 걸작으로 꼽힌다 합니다.


그 후 건륭제가 서양 바로크 건축양식을 더하여 이곳을 넓히고 장춘원과 기춘원을 새로 지었답니다.

이처럼 원명원은 강남의 유명 정원과 전통 중국 정원의 예술 정화를 한데 모으고

거기에 서양의 바로크 양식을 덧붙인 터라 중국인들 사이에서 일만 개 정원 중의 정원

(万圓之圓)이라고도 불린다고 하네요.

 

원명원에는 구주(九州), 청연(淸宴)을 비롯한 9동의 부속건물이 있고 장춘원 북쪽에는

유럽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건물인 서양루(西洋樓)가 있습니다.
또 원명원 주위의 호수인 푸하이(福海 : 복해)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를 뜻하는 작은 3개의 섬이 있어 뛰어난 경치를 자랑했다고 하네요.

이런 걸 만들어 놓으면 만수무강할까요?

 

그러나 황궁의 정원으로서 약 160년간 황제가 기거하며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었던 원명원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에 타 지금은 폐허로 남아

원명원유적공원(圓明圓遺跡公圓)이라 불리며 아쉽게도 그 웅장함과

우아함의 흔적만을 느낄 수 있네요.

 

이런 아름다운 곳을 파괴한 사람이야말로 야만인이 아닐까요?

그날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잡초는 자라고 아이들을 그 폐허 속을 뛰어다닙니다.

폐허라서 더 많이 생각나고, 영화로운 시간이 지났기에 더 많이 가슴이 아려오고...

 

오늘은 철저하게 파괴된 잔해의 모습만 구경했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원명원은 기대보다 훨씬....

입장료보다 몇십 배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상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 여기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모두 보고 나온다고 하지만, 자꾸 무언가 잃어버린 게 있는 듯 뒤를 돌아봅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에도 모두 사연이 있지 않을까요?

살며시 버려진 둘을 들춰보면 무슨 이야기가 그 안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세히 구경했다 하지만 돌아본 곳은 반도 되지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