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성 박물관

2013. 1. 21.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업성박물관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업성박물관은 사전정보 없이 찾아갑니다.

츠시엔에서 업성유지를 버스로 가다 보면 40여 분 지나 들판 가운데

생뚱맞게 거대한 건물 하나다 보입니다.

그게 바로 업성박물관입니다.

 

업성유지에서 가는 방법은 어제 설명해 드렸고 우리는 걸어서 찾아갔습니다.

업성유지를 오는 도중 우연히 길가에 세운 간판을 보고 버스 기사에 확인하니

박물관 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하기에 무작정 걸어서 찾아갑니다.

아까 버스를 타고 산타이촌까지 오면서 그곳까지 가는 거리도 짐작으로 확인했지요.

 

이렇게 한적한 중국의 시골 길을 걷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옛날 어린 시절 보았던 신작로 길이네요. 

산타이촌에서 큰길을 따라 3km를 나오다 보면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이 부근에 귀곡자의 옛집이 있나 봅니다.

바로 여기서 왼쪽으로 좌회전해 들어가야 합니다.

츠시엔에서 올 때는 반대편이기에 우회전이고요.

 

귀곡자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지금도 우리 정치판에 보듯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합종연횡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그 말의 창시자라 봐야 할 겁니다.

그러니 소진과 장의로 대변되는 전국칠웅의 합종연횡을 이끈 사람의 스승인 셈이라네요.

쉽게 설명하면 짝짓기의 대가라는 말이겠네요.

 

 

소진은 당시 칠웅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진나라를 빼고 나머지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다녔고 그와 같이 공부했던 장의는

그 합종의 맹약을 하나씩 깨며 다녔던 사람이라고 했나요?

같은 스승의 제자라도 이렇게 다르네요.

 

이제 박물관도 얼마 전에 새로 지어 많은 유물을 전시합니다.

특히 박물관 건물은 조조가 세웠다는 삼대를 본 따 만든 듯합니다.

박물관 건물 왼쪽으로 두 개의 큰 망루가 보입니다.

저런 형태의 건물을 궐(闕)이라고 부른다네요.

 

그야말로 허허벌판 가운데 파만 무성히 자라는 저곳에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중국의 박물관을 여러 곳 다녔지만, 이렇게 황당한 자리에 박물관을 지은 곳은 처음 봅니다.

어디 파밭만 있습니까?

어제 보았던 가지밭도 있습니다.

가지는 길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우리 눈에는 그야말로 둥근 가지는 반전입니다.

그 크기가 야구공보다 더 큰 소프트볼의 공 크기만 하네요

 

여러분은 이런 박물관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여기다 지은 이유가 박물관에 오지 말라는 말이죠? 그쵸?

佳人도 제법 중국 여행을 하고 있지만.....

유적이 없어 황당해하는 우리에게 박물관은 설상가상입니다.

이게 무슨 혐오시설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다 지은 이유는 이곳이 앞으로 중국의 풍경 경구 중

최대로 큰 곳이 될 예정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부근이 육조의 도읍으로 지금 유적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고 박물관은

그 풍경구의 중심에 서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죠.

그만큼 장하라는 강을 중심으로 중국 문명의 한 축을 담당한 곳이 바로 여기기 때문이죠.

이제 이곳에 새로운 도시가 다시 세워질 예정이라 지금은 주변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유적이 모두 사라졌을까요?

바로 지난 꼭지에서 말씀드린 대로 명 대에 큰 홍수가 장하를 범람시켜

모든 유적을 벌판 아래에 감추었답니다.

이미 그 크기와 규모가 확인되었기에 박물관을 이 벌판에 만든 게 아닐까요?

입구에서 표를 팔지 않아 여기도 무료라고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관람하러 오는 사람은 없고 근무자만 바글거리고 여기다 책상을 놓고 임시로 표를 팔고 있습니다.

젊은 아가씨들이라 그 중 영어도 하는 아가씨가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는 따로 표도 팔지만, 아까 보고 온 업성유지와 같이 통표도 판다고 하며

통표를 사지 않은 우리에게 통표가격으로 할인해 주어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까지 구경 올 한국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깎아주지 않으면 그냥 나가려고 했으나

워낙 아가씨들이 佳人 오빠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해 그냥 통표가격인 30원만

더 내고 들어가 구경합니다.

방명록도 써달라 사인도 해달라...

佳人 오빠는 너무 힘들어요.

아니군요?

佳人 오빠는 감독이기에 사진만 찍고 울 마눌님이 이야기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감독은 워낙 생각하고 작전을 짜는 고독한 사람이라 직접 운동장에서 공을 찰 수 없죠. 

 

나중에 구경을 마치고 다시 나와 아가씨들이 점심으로 준비해온 만두인 빠오즈를 나누어 주고

사이의 "오빤 강남 스타일"을 틀고 함께 말춤도 추고 놀다 왔어요. 

지금 저렴할 때 미리 보고 갑니다.

나중에 모두 만들고 나면 그때는 큰돈을 내셔야 구경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박물관 앞에는 육조를 상징하는 여섯 개의 대형 부조상을 만들어 놓아

그곳에 간략한 역사를 조각으로 새겨놓았습니다.

그만큼 이 지방이 예전에는 명당 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땅의 氣마저 사라지게 하나 봅니다.

 

담장 아래로는 장랑을 만들어 걷거나 쉴 수 있도록 하였고 박물관 앞뜰에는

연못을 만들고 조형물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높다란 궐(闕)이라고 부르는 건축물을 세워놓았는데, 궐이라는 건축물의 용도는

우선 망루로 사용된다 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백성에게 포고할 일이 있으면 이곳에 방을 붙여놓았다 합니다.

 

때로는 죄인의 목을 효수해 이곳에 걸어두어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로 삼기도 했다 합니다.

이 궐이라는 조형물은 그 크기에 따라 궁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도이기에

대궐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지금 여기는 그냥 상징적으로 앞뜰에 장식용으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중국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궐의 모습으로 대문을 만든 곳을 자주 볼 수 있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부조는 육조의 모습이네요.

오늘 우리 말고 여기에 구경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박물관을 보는 내내 우리 외에는 일하는 직원뿐이라 오늘 완전히 전세 내고 본 셈이네요.

아직 여기 박물관은 완공된 게 아닌가 봅니다.

내부의 진열 유물도 아직 빈자리도 많고 새로 옮겨오며 작업 중이었어요.

 

 

이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ㅁ자형 건물 안에 업성유지와 육조의 황궁을 복원할 모형도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여기를 새롭게 만들 것 같습니다.

이곳의 규모는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크기라 합니다.

 

제일 가운데 건물이 황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로 근처에 조조의 무덤마저 발견되었다 하니 야심 차게 개발을 시작하지 않겠어요?

일설에 의하면 조조가 죽을 때 서문표 사당이 있는 언덕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방금 다녀온 금봉대는 업성의 육조 도성 중 귀퉁이에 불과합니다.

바로 그 아래 보이는 장하가 범람해 금봉대 터만 남기고 두 개의 유적과

언덕마저 쓸어버렸다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금봉대를 제외하고 언덕 하나 보이지 않고 아주 평평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 지역은 문명이 태동하며 황하문명과 그 시기를 같이 할 겁니다.

바로 아래가 갑골문이 발견된 안양과 인접해 있기에...

그래서 발견되는 유물은 위의 사진처럼 돌도끼부터 보인답니다.

원시인 덜수 가족이 살 때 저 돌도끼로 사냥했을 겁니다.

 

덜수가족이 죽은 모습도 그대로 보이네요.

아주 영원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누구나 빠지는 그런 잠 말입니다.

당시 사용했던 술잔에 보온밥솥 그리고 주기도 그대로 함께 넣어주었군요?

이 사람을 묻어준 사람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역시 조조의 위수 지역이라 조조의 옛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00년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끌 때 모습입니다.

적은 군사로 당시 최대 군벌인 원소의 대군을 궤멸시키고 이곳 원소의 땅을 통일했지요.

박물관 안에 이런 조형물을 만들고 조명장치로 번쩍이며 말발굽 소리와 병사의 고함까지

음향효과를 더해 깜짝 놀랐어요.

 

왜?

캄캄한 박물관에는 우리만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시커먼 저 암흑의 군사 놈들이 담장을 넘어 나오는 줄 알고...

 

역시 조조의 업적이군요?

삼대를 짓는 모습입니다.

그 이전에도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었지만, 조조가 삼대를 이곳에 지으며

이곳이 중원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죠.

변방에서 수도이전이 되면 주변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잖아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업성은 춘추시대에 이미 번창하기 시작해 동한 말에 조조가 이곳을 점령함으로

계획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던 시대인 220-265년 사이에 조조의 위나라, 오호십육국 시대에

후조, 염위, 전연, 북조 시대의 동위, 북제. 이렇게 여섯 나라의 도읍이었기에

규모가 대단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