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孔府)는 연성공부(衍星公府)라는군요.

2012. 7. 26.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공부(孔府)는 성부(聖府) 또는 연성공부(衍星公府)로 불린다 합니다.

그러나 원래 이름은 연성공부라 불러야 한다는군요.

연성공부라는 공부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의 집이라는 말이 되겠네요.

어디 중국뿐일까요?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집안이 여기일 겁니다.

이런 집도 사회주의 정부인 신중국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빼앗아야 인민이 더 행복했나 봅니다.

2.500여 년간 전통을 지켜온 공부도 이제는 중국 정부 소유가 되었나 봅니다.

 

행복이란 스스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남의 불행이 바로 나의 행복이라고 했나요?

행복과 불행은 틀림없이 상대적이라는 말이 맞나 봅니다.

남이 더 불행할수록 나는 더 행복해지고 남이 더 행복하면

상대적으로 나는 더 불행해진다는 말.

 

제일 처음 기원전 195년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 유방이 넉넉한 가슴으로 공자의 9대손인

공등(孔藤)을 봉사군(奉祠君)에 봉함으로 시작된 장자 세습으로 오직 공자의 제사를 전담하는

일종의 공무원으로 임명함으로 이게 이 집안의 장손이 대를 이어 관리로 임명된

시작이 되었나 봅니다.

규모나 방법은 지금과는 달랐겠지만, 그 의미는 같지 않겠어요?

죄송합니다.

지금이 아니고 신중국이 생기기 전인 청나라 시절까지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봉록과도 같은 땅을 주었을 것이고 그 땅의 관리까지 세습하게

했을 것이고 그 후 여러 정권이 이를 묵계적으로 인정하며 공자의 후손은

이 일에만 전념하게 하였다 합니다.

그 후 1.055년 송나라 때부터는 공자의 장손에게 일종의 벼슬인 연성공의 직위를

세습하도록 하였기에 공부를 연성공부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이미 연성공이라는 직위가 천 년이나 된 아주 오랜 전통이었네요.

 

벼슬도 내리고 사저인 동시에 관공서 격인 공부도 지어주며 말입니다.

이로써 위대한 성인의 후손을 제후로 대우하며 어느 왕조나 소홀히 하지 않게 되었다 하네요.

지금의 중국 정부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런 오랜 전통을 무시하는 중국 정부는 빠떼루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처음에 공부는 공묘에 부속된 곳이었으나 명나라 홍무제가 명하여 공부와 공묘를 분리하여

증, 개축에 많은 노력을 했다 합니다.

이로써 지금의 공부가 확정되어 480개의 방을 가진 대저택이 되었다네요.

관청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거구역 앞쪽으로 만들었고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으로

세 개의 통로를 만들어 구획하였다네요.

 

공자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험을 거치지도 않고 특혜를 준 것으로 청문회에 넘겨지면

공자 또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후손은 특혜시비에 휘말릴 것이고 공자 또한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할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에 어느 사람도 태클 걸지 않을 겁니다.

왜?

공자는 만세사표니까요.

현재의 공부는 기본적으로는 명, 청대의 건축물입니다.

역시 9진 원락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공부는 孔家의 저택으로 '천하제일가'라고 불린다는데 이는 공자의 후손은 어느 왕조가

들어서건 아무 상관하지 않고 마르고 닳도록 이 지방을 다스렸으니 그런 말을 해도 될 겁니다.

중국뿐 아니라 세계 역사상 이렇게 오래도록 관리로 등용된 집안이 없을 정도잖아요.

실력이 있건 없건 무조건 공자의 장자는 이 마을을 다스렸으니 어쩌면 수시로 새로 생기고

사라진 여러 왕조의 황제 가문보다 더 무게를 잡았다는 말이 아닐까요?

 

아마도 벼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치가로도 별로였던 공자가 이렇게 죽어서

황제의 반열로 대접받는 사람은 공자 외에는 별로 없을 듯합니다.

아~ 관우도 황제 반열에 올려놓았군요.

그래도 후손이 마르고 닳도록 제후의 자리에 있어 일한 가문은

공자 가문 말고 찾기 어렵지 않겠어요?

 

이는 모두 민초의 마음을 훔치려는 황제들이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공자를 마케팅하려

의도로 더군다나 북방민족인 청나라는 공자를 가장 많이 우려먹은 왕조가 아닌가 의심됩니다.

 

공자는 한족에다가 민초들이 가장 존경하니 이민족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세계 최강이라는

같은 이민족으로 원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지 100년도 유지하지 못하고 삼베바지 뭐 세듯

사라져 버렸으니 이런 전철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중원의 마음을 훔치려고 공자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고 의심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의심병이 조금 많아서요.

 

처음 공묘가 세워졌을 때는 살아생전 공자가 입었던 옷가지와 책, 거문고 등을 공자가

거처했던 세 칸의 집을 사당으로 삼아 보관했던 소박한 장소였으나 그 후 세상이 흐름에 따라

보수와 개축, 그리고 돌보는 사람도 없어 황폐해지기도 했고 심지어는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부숴버리기도 했지요.

홍위병은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민족보다도 못하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2천 년이 넘는 이런 전통을 하루아침에 부숴버린 중국 정부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했을까요?

알 필요 없다고요?

그렇군요.

 

특히 송, 금, 원대에 사당이 증축되고 점차 넓어지게 되었고

청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봐야겠지요.

가만히 보니 송나라를 제외하고는 북에서 만리장성을 월담한 북방민족이네요.

그러다 명, 청대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넓게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합니다.

 

오랑캐의 나라가 중원을 통치할 때도 공자는 대우받았지만, 문명국이라고 자랑질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며 오히려 공자는 사라질 뻔하다가 겨우 목숨만 건진 꼴이 되었습니다.

왜 살려두었을까요?

공자를 존경하니까?

공자를 이용해 돈벌이가 되니까?

그런데 중국 정부는 노벨상 때문에 심기가 거슬렸다고 공자상을 만든다 하지 않았나요?

공자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너나 잘하세요?"

 

오늘 돌아볼 지도부터 보렵니다.

어제는 입구부터 내택문까지의 관청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孔家의 살림집입니다.

아래 내택문으로 들어갑니다.

내택문은 안채와 근무처를 구분하는 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공자 장손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던 생활공간인 셈이지요.

 

우선 눈에 띄는 높은 건물이 보입니다.

규루(奎樓)라는 건물입니다.

나지막한 곳에 제법 불쑥 솟아있기에 금방 눈에 띕니다.

용도가 무엇으로 보이세요?

전망대? 잔치를 벌이는 누각?

 

지금까지 중국 여행을 하며 보았던 피난처랍니다.

위험이 닥치면 공 씨 가족이 피신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대피소입니다.

정말 환장하게도 중국이라는 나라는 난리가 나면 평소 그렇게 섬기던 공자도 없나 봅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네요.

물론, 평소에 공씨네 귀중품도 보관했던 곳이기도 했고 이런 형태의 대피소는

곽욕촌에서 예루, 황성상부에서 하산루라는 이름으로 이미 보았기에 금세 이해가 되는군요.

 

이번에 보이는 문이 내택문(內宅門)입니다.

그러니 집과 직장을 가르는 분기점인 셈입니다.

평소에도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금단의 문인 셈입니다.

그러기에 이문은 지금도 늘 닫혀있습니다.

내택으로 들어가려면 옆으로 돌아들어 가야 합니다.

 

이 문 뒤에는 그 유명한 계탐도라는 채색그림이 그려진 조벽이 있습니다.

그림에 보이는 동물은 상상의 동물로 기린과 매우 닮았습니다.

문을 지날 때마다 공자 집안의 사람은 누구든지 “그대여,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마시오

(公爺過貪了)”라고 외쳐야 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공자 가문의 가훈이었던 셈입니다.

계탐도에 대한 설명은 이미 산동성 여행기의 첫 번째 꼭지로 올려드렸습니다.

보지 못하신 분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blog.daum.net/nhk2375/7164105

 

꽁푸(孔府 : 공부) 계탐도에서 본 탐이라는 동물

공자의 고향인 취푸에 가면 꽁푸(孔府 : 공부)의 외채와 안채를 가르는 문의 조벽에는  한 마리의 동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상상의 동물이지만, 그곳에 그린 동물은 틀

blog.daum.net

 

계탐도를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건물 하나가 있는데 전상방(前上房)이라고 부르는

건물로 이 건물은 객청으로 응접실과 같이 손님을 맞이해 환담을 하는 곳이랍니다.

여기에서 그냥 맹숭거리기 보다 차라도 끓여 방문객에게 한 잔씩 나누어주는

이벤트라도 하면 좋겠어요.

공자님 댁에 들려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셨다 하면 방문객은 큰 영광으로 생각할 게 아니겠어요?

 

아울러 이곳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생일 축하연 등 많은 행사가 열린 곳입니다.

내택문(內宅門)을 지나 여기서부터는 연성공의 사택으로 타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입니다.
동로(東路)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서로(西路)에는 손님을 맞는 빈청이 있습니다.

지금은 주인도 없는 곳이라 관광객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네요.

 

공부에는 황제를 비롯하여 칙사, 고급관리 및 유명 인사의 출입이 빈번했으므로 자연히

손님 접대를 위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이를 공부가식(孔府家食)이라 하고

공부(孔府)에서 여는 잔치를 공부연(孔府宴)이라고 한다는군요.


공부연은 황제가 직접 요리사를 대동하여 차리기도 했으므로 음식문화와 예악(禮樂)

제절(諸節)이 더욱 발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연회의 성격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연성공과 처자 등 직계의 생일잔치인 수연(壽宴),
세습 봉작이나 집안 경사를 축하하는 희경연(喜慶宴),
대신이나 고위 관리를 접대하기 위한 영빈연(迎賓宴),
친지나 친구를 접대하기 위한 가상연(嘉祥宴) 등이라 합니다.

 

전상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전당루(前堂樓)라는 이름의 2층 건물이 있습니다.

76대, 77대 연성공은 청나라 말기와 중국의 근, 현대를 살아오며 그들이 살았다는

전당루와 후당루가 있고 그곳에는 그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77대 연성공인 孔德成은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1949년

대만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전당루는 연성공의 숙소로 76대 연성공과 그의 본처인 도씨와 후처인 풍씨와

왕씨가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놓았다네요.

그런데 난방장치가 되지 않아 겨울에는 무척 춥게 지났을 것 같습니다.

며느님이라도 잘 들였더라면 공자님 후손 댁에 보일러라도 놓아 드렸을 텐데...

 

건물 안에는 "송균영춘(松筠永春)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공령이라는 후손이 손수 쓴 글이라 합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늘 푸름과 변치 않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오랜 세월 황제도 인정했다는 이곳이 사회주의에서는

그 명맥이 끊어지고 이제는 이야기 속에서만 남아 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가장 고민한 점도 이곳이 공 씨 개인의 재산이었는데 국가에서

수용하자니 모양새가 그렇고 그냥 개인 재산으로 인정하자니 이곳만 예외로 해야 하고...

 

더 많은 민초가 행복해진다면 중국 정부도 망설일 수는 없겠지요.

뺏어서 행복해진다면 말입니다.

왜?

중국 정부란 민초를 무섭도록 섬기는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니까요.

 

그래서 중국 정부는 공자 후손의 집마저 빼앗아버렸나 봅니다.

정말 중국 정부가 잘한 일일까요?

그래서 모두 행복해졌을까요?

왜 佳人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죠?

한국사람이기 때문일까요?

 

후당루입니다.

후당루에는 주로 연성공의 가족 중 여자들만의 공간으로 이곳에 살았다 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남자인 佳人이 그만 성큼 들어섰습니다.

 

후당루에는 77대손인 공덕성 부부가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 놓았네요.

원래는 연성공 부부는 전당루에서 기거했으며 후당루에는 주로 여자들만의 공간이었다

하고 좌우 동서 쪽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후동루에는 여자 노비가 거주한 공간으로

당시 사용했던 물품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답니다.

반대편에 있는 후서루는 연성공 부인의 친정 사람이 왔을 때 거주하던 처가 전용 공간입니다.

 

이제 공부의 마지막 건물인 후오간(後五間)이라는 건물입니다.

연성공이 독서를 하던 건물로 청나라 때 만든 곳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조괴헌(棗槐軒)이라고도 불린다 합니다.

 

실제로 역대의 황제는 공자의 장손은 46대 장손부터 연성공(衍聖公)이라는

벼슬을 내려 세습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대를 이어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가의 녹을 먹는 벼슬아치가 되는 겁니다.

왜?

공가의 장손이기 때문에...

 

중국의 역대 황제는 덕치를 표방하여 민심을 얻고자 공자를 받들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부터 공자의 종손에게는 연성공(衍星公)이란 작위를 주어 대성전의

봉제사 외에 제후로의 기능도 갖게 하였다고 볼 수 있고 왕조의 영욕과 부침과 관계없이

천 년을 넘게 제후의 자리를 자자손손 지켜 왔으니 천하에 그런 가문이 어디 또 있겠어요.

그러나 직계 장손은 1949년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부 편을 들어 대만에 건너가 살았다고 합니다.

세상에 조상 한 분 잘 둔 덕분에 자자손손 이렇게 해피하게 보낸 집안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공자도 유효기간이 끝나버렸나 봅니다.

신중국이 들어서며 홍위병이 칼춤을 추기 시작하며 말입니다.

 

살림집인 내택이라는 안채 뒤로는 후화원이라는 정원이 있습니다.

명나라 중기에 만든 정원으로 돌아보니 그냥 아주 평범한 정원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곳을 다니다 보니 먼발치로 담장 너머의 공자님을 잠시나마 뵈온 듯하네요.

 

이제 오늘 하루 더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이번 우리 여행의 마지막 발자국을 찍기 위해

첫 발자국을 찍었던 톈진으로 올라갑니다.

취푸에서 천하의 공자에게 佳人이 감히 말도 되지 않는 투정을 부리고 다녔습니다.

오늘 밤에는 佳人 스스로 파테르를 청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로써 공자의 마을인 취푸 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우리 부부의 취푸 여행은 산꽁 위주로 돌아보는 일이었네요.

그러나 그 안에 이야기를 알고 다닌다면 여행이 더욱 알차겠지만,

佳人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온다면 문만 통과하고 건물만 보다가 가게 되는군요.

그래도 여행은 떠나야 합니다.

 

혹시 중국 여행을 준비하시며 아이들과 오실 계획이시면 취푸를 추천합니다.

마을도 작지만, 한국에서의 접근성도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자라는 아이에게는 앞으로 공자를 접할 기회가 무척 많을 듯합니다.

그러니 미리 공자의 자취를 돌아보고 간다면 개인적으로 아이가 자라며 더 큰 감명을 받지 않을까

생각되며 멀지 않은 곳에 맹자를 모신 곳도 있으니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무척 좋은 여행지라

생각되기에 아이들 손을 잡고 부모가 이곳을 거닐며 옛 성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