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푸(孔府 : 공부)로 들어갑니다.

2012. 7. 25.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이제 공묘 구경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공부(孔府)로 갑니다.

공묘의 출구로 나서면 궐리라는 길이 나타나고 그 끝이 바로 공부의 입구네요.

공묘가 공자의 사당이라면 공부는 삼공(三孔) 중 공자의 후손이 일하며 살았다는 관청과

살림집에 해당하는 곳이라는군요.

물론, 뒤편은 살림집이지만, 앞쪽은 근무처인 관청이라는 말이 되겠네요.

 

직장이 이렇게 가깝다면 정말 좋겠어요.

요즈음 출근길 정말 짜증 나시죠?

우리나라는 출근을 전쟁에 비유하잖아요.

佳人은 출근전쟁에서 이미 은퇴한지 제법 되었기에

이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곳 공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 제일 앞에 관청 격인 근무처이고 그 뒤가 바로 살림집인 안채로 구분할 수 있겠어요.

그다음이 내택이라는 안채 뒤에 있는 정원인 후화원으로 말입니다.

이제 여기도 두리번거리며 자세히 구경하렵니다.

 

 

문 앞에 걸린 편액에는 공부가 아니라 성부(聖府)라는 글이 걸려있습니다.

공부가 아니고 성부라고 하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게임이 끝났다는 말일 것인데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가 여기만큼은 바티칸처럼

건드릴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성부란 바로 공부(孔府)의 대문을 말합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두 번째 문인 2문이 보입니다.

양쪽으로 돌에 조각한 것이 보이는데 아마도 말을 타고 내릴 때

이용하는 上馬, 下馬石일 겁니다.

그러면 여기가 주차장입니까?

설마 요일제를 시행하지는 않았겠죠?

 

공부가 저택이라는 말이지만 물론, 공자가 살아생전 살았던 곳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공자는 방금 보고 온 공자 고택이라는 곳에 살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곳의 모습도 옛날 공자가 살던 모습이 아니지만...

 

그럼 여기는?

조상 잘 둔 덕분에 공자의 후손이 대대손손 철밥통보다 더 튼튼한 직장을 대를 이어

물려받으며 살았던 곳이라 합니다.

직장은 태어나기 전부터 보장되었지요.

게다가 살림집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가문이었을까요?

공자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혜택을 공자의 후손은

단지 이 가문의 장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을 들어서며 위를 올려다보니 편액에 성인지문(聖人之門)이라고 써놓았군요.

문 안쪽을 바라보니 또 문이 보입니다.

여기도 계속 문을 열고 들어가는 문 투어네요.

 

 

우선 제일 바깥문을 들어가면 2문이 있습니다.

2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앞에 중광문이라는 담이 없이 문만 하나 보입니다.

여느 문과는 달리 무척 예쁜 문입니다.

명나라 홍치 16년에 만든 문으로 의문(仪門)이라고 하니 아마도

귀빈 영접할 때 의식을 위한 문인가 봅니다.

그러면 佳人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하는

의식을 행해야지 이게 무슨 경웁니까?

그러니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는 문인가 봅니다.

 

 

중광문(重光門)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명나라 세종인 주후총(朱厚熜)이

"은사중광(恩賜重光)"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기에 중광문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중광문은 의문(仪門)으로 공자의 종손인 연성공이 황제의 칙사를 마중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등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에 의례를 행하는 곳으로 문임과 동시에 영벽과도

같은 스크린의 역할도 했다 합니다.

그래서 닫아두어야 더 아름다운 문인가 봅니다.

 

 

중광문을 지나 뒤로 돌아가면 정면으로는 대당(大堂)이라는 건물이 보입니다.

대당의 역할은 연성공이 이곳에서 황제의 성지를 받드는 곳입니다.

건물의 높이나 크기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대당 안을 들여다볼까요?

물론 관리도 접견하고 중대한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기도 하지요.

여기가 연성공이라 불린 공자 장손의 근무처가 되겠네요.

 

 

건물 안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의식을 행할 때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오래되어 색깔이 바래고 녹슬어 흉물스럽게 보입니다.

서낭당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꾀죄죄하고 오래돼 보여야 더 역사틱하기는 하겠죠?

 

 

대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측 좌우로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바로 6청이라 부르는 곳으로 당시에 나리가 근무했던 곳이라 합니다.

처음에는 공부의 일반적인 일 처리를 하는 행정부서였지만,

후에는 관청의 업무인 6청의 일을 관장했던 곳이라는군요.

동쪽은 회계업무를 관장했던 지인청(知印廳), 문서수발을 담당했던 전적청(典籍廳),

관구청(管勾廳)이 있고 서쪽에는 책을 관장했던 장서청(掌書廳), 음악을 관장했던

사락청(司樂廳), 민가를 관리했던 백호청(百戶廳)이 있습니다.

 

 

대당은 뒤로 회랑으로 이어진 2당(二堂)이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날씨도 잔뜩 흐린 데다가 실내에는 조명조차 밝히지 않아 무척 어둡습니다.

 

 

2당은 연성공이 고급 관리를 접견하며 차를 마시는 공간이고 지방 예비 과거시험을

치르던 곳으로 이곳에도 동서로 업무시설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동쪽은 공문서를 받거나 보내는 일을 주로 했으며

서쪽은 주로 의전을 담당한 곳이라 합니다.

 

 

다시 2당 뒤로 3당이라는 관청 건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삼당(三堂)은 공 씨 가문 내부의 문제를 논의한 곳으로 동쪽은

접견실이고 서쪽은 글을 쓰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 세 개의 건물이 관청의 핵심 건물이고 대당 양쪽으로 있는

6청이 직원이 근무하는 곳이겠네요.

 

 

그러니 공부란 바로 공자 후손이 조상을 잘 만나 아주 해피하게

평생을 보낸 곳이라는 말일 겁니다.

장손은 집 걱정하지 않고 직업 걱정 없이 대를 이어 이 지방을

관리하는 당연직 벼슬을 한 겁니다.

과거시험도 보지 않았고요.

오직 조상 잘 만난 덕분에...

 

 

살아가며 누구와도 경쟁하지도 않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봉록을 받으며

이 고장을 다스렸던 겁니다.

그것도 대를 이어가며 말입니다.

이런 삶도 나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란 신선들의 삶이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아이가 주식을 얼마 보유했다고 난리 하지만, 여기는 장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비 고을 수령인 겁니다.

평생직장과 거처와 먹고 마실 것이 모두 준비된 바로 그런 가문이 공자 가문인 게지요.

복이 넝쿨째 굴러온 가문이 공자 가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세상은 이렇게 능력 여부를 떠나 조상을 잘 만나도 아주아주 지겹도록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29살에 나라를 상속받고 다스리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네요.

 

 

오늘 돌아본 곳의 약도입니다.

오늘 돌아본 곳은 바로 공부의 관청 부분입니다.

제일 아래 대문으로 들어가 북쪽인 위로 차례로 문을 통과하며 들어갔습니다.

내일은 사진의 제일 위에 보이는 내택문(內宅門)을 통과해 공자 종손이 실제 살았던

살림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부모를 잘 만나면 옛날부터 이런 행운이 넝쿨째 굴러온 집안도 있나 봅니다.

그러나 이런 집안도 그냥 우리가 주변에 흔히 보는 그런 정치인 하고는 달랐을 겁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며 지냈기에

오래도록 존경받는 집안이 되었을 겁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계탐도라는 그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