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고택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2012. 7. 24.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이제 공묘를 오늘로써 모두 보고 가네요.

내용도 없는 이야기로 오랫동안 지루하게 끌었습니다.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하다 하잖아요.

역시 佳人은 빈 수레였나 봅니다.

 

취푸는 그냥 가시기보다는 미리 알고 가셔야 더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흔히 여행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우리 부부처럼 그냥 가보면 비석만 있고 문만 통과하다 보면

끝나버리는 곳이 이곳인 듯합니다.

 

 

제일 뒤쪽 북동 편에는 예전에 공자가 살았다는 공택(孔宅)이라고 부르는 공자 고택(孔子故宅)이

있는데 정말 공자가 여기에 살았느냐고 묻지 마세요.

예전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오랜 세월이 지났잖아요.

그래도 공자가 살았던 집은 사라졌겠지만, 자취는 남아있지 않겠어요?

아마도 공자가 살았던 터에 후손이 더 크게 집을 짓고 살지 않았을까요?

 

 

우선 가묘(家庙)부터 보렵니다.

오늘 날씨도 끄물거리고 실내가 어두워 사진이 그만 흔들렸습니다. 

가묘란 제법 행세깨나 하는 돈 있는 집안의 사당일 겁니다.

당시의 공자가 부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손이 이렇게 집안의 사당을 만들어 조상을

섬겼고 여기 공묘의 모두는 공자가 직접 돈 들여 만든 게 하나도 없을 것이고 모두

후손이나 권력자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뿐일 겁니다.

 

세상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돈을 들이지 않아도 이렇게 황제까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협찬했습니다.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지원하는 처지에서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강탈이겠지만,

공자를 위한 지원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했을 거예요.

공자라는 이름이 지닌 브랜드 가치는 정말 세계적이 아니겠어요?

 

 

가묘는 공자의 후손이 개인적으로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장소라 하네요.

공자와 부인, 그 아들 공리(孔鲤) 부부, 손자인 공급(孔伋) 부부, 그리고 중흥조(中興祖)인

43대 문선공인 공인옥(孔仁玉) 부부까지 모신 곳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고택에도 가을이 깊어만 갑니다.

이곳 공묘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내려앉았네요.

조상신을 모신 곳이라 더 영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황제가 찾아와 시끌벅적하게 공자를 모시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하게 후손이

조상을 모시는 일이 더 공자를 기쁘게 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숭성사(崇聖祠)라는 사당입니다.

이곳은 처음 명나라 홍치 17년 처음 가묘로 만든 곳이라 합니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가묘가 또 있었네요.

 

 

청나라 옹정 원년에 공자 5대조부터 왕의 직위를 내림으로 이름을 숭성사라 바꾸었고

비록 그 조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공자 한 사람 덕분에

5대조 조상까지 특별대우받나 봅니다.

살아생전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았겠지만, 죽어서 후손  때문에 비록 명예직이지만 왕이 되었는데

그런데 5대조부터 대우받고 6대조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면

무척 섭섭하고 억울하지 않겠어요?

 

운강석굴을 만든 담요도 북위의 문성제 5대조부터 부처라 했으니 

중국은 주로 5대조부터 대우 하나 봅니다.

우리나라 용비어천가에서는 海東(해동) 六龍(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天福(천복) 이시니

古聖(고성)이 同符(동부)하시니..

우리는 5+1로 중국보다 조상 한 분 더 모시고 6대조부터...

그러나 이래도 7대조 조상님이 또 슬퍼하시겠어요.

 

 

여기 위의 사진이 공자 5대조부터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네요.

왕의 직위를 내린 것은 명예직입니까?

아니면 실제 왕으로 대접하기 위함입니까.

황제가 공자 5대조를 왕으로 부른다는 일은 제후의 직이 아니겠어요?

 

 

이번에는 석판으로 만든 소 여물통처럼 생긴 돌을 보시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물통이 아니라 가보비(家譜碑)라고 하네요.

그러니 우리말로는 가계보를 새긴 돌이라는 말이겠네요.

공자의 가계도를 새긴 비석을 보고 여물통이라니?

공자께서도 모르고 지껄인 말은 용서하실 겁니다.

이렇게 무식하게 여행을 다니니... 부끄럽습니다.

 

 

공자의 54 손인 공불(孔拂)이라는 사람이 명나라 때 만든 가게도를 새긴 석판입니다.

비록, 생긴 게 소 여물통처럼 생겼지만...

여기에 공자부터 12세 후손까지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합니다.

가운데는 대성지성문선왕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부터 鯉, 伋, 白, 求 순으로

아래로 적어놓았고 그 오른쪽을 보시면 一世, 二世 등으로 넘버를 적어놓았습니다.

사진에 보이세요?

 

 

그 앞으로 가면 뻘쭘하니 이상하게 생긴 칙칙한 색깔의 담벼락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 하여 노벽(魯壁)이라네요.

노벽이라면 노(魯) 나라 담벼락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노나라라고 하면 이게 도대체 언제의 일입니까?

연결된 것도 아니고 거두절미하듯 대부분 사라지고 그냥 일부만 잘라 놓은 듯 남아있습니다.

 

 

진시황 시기에 있었던 분서갱유 사건 때 공자의 9대 손자 공부(孔鲋)가 논어, 상서, 예기,

춘추, 효경 등의 유가 경전을 담벼락에 감추어 보존했다는 노벽입니다.

분서갱유라...

진시황과 이사가 벌인 정말 단순 무식한 행동이었지요.

그러니 담벼락 안에다 감추어버리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버렸다는 말이겠네요.

 

후에 한나라 경제 때 담벼락 안에 숨겼던 것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물론 당시에 숨긴 것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 책이 아니라 죽간이었을 겁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황제로 자리했지만,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빠떼루 받고 또 감점 들어갑니다.

 

 

그 노벽이 우물 앞에 붉은색으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별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담벼락이 공자의 사상을 후세까지 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담벼락도 2천 년이 넘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중국은 정말 신통방통한 일이 많습니다.

나라 전체가 전설의 고향처럼 생각되어 다니다 보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물론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경험도 함께하면서 말입니다. 

제법 중국을 여러 곳 다니고 있지만,

아직도 중국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佳人은 참 여행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나 봅니다.

 

 

중국의 저명한 어느 평론가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을 위대한 업적이라고 칭찬하고
또 한 번 진시황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쓰레기만도 못한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만약 그게 실현되면 후세에 또 다른 노벽이 생겨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佳人의 여행기를 보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보았더라면

제일 먼저 불살라버리자 했을 거예요.

 

요즈음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쇄물이 발간되는 나라가 중국이라고 하더군요.

그곳에 실린 이야기 중 믿을 수 있는 것은 글자는 날짜뿐이고 그 외에는 그날 온도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만큼 중국에서 발간하는 글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노벽(魯壁) 앞에는 공택고정(孔宅故井)이라는 우물 하나가 있습니다.

이 우물은 공자가 살아있을 때 마셨던 것으로 물이 워낙 순수하고

깨끗하여 성수(聖水)라고도 부른다네요.

그러나 비석을 자세히 보세요.

땜질한 게 보이시죠?

왜? 이렇게 상처뿐인 비석일까요?

아시면서...

 

 

명나라 정덕 연간에 돌로 뚜껑을 만들어 밀어서 덮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佳人도 마셔보려고 했지만, 이렇게 철망으로 뚜껑을 만들어 덮어놓았습니다.

혹시 이곳에 오셔서 공자가 마셨다는 우물물이라도 마시려면 기다란 빨대를 미리 준비하세요.

우물이란 계속 퍼야 늘 깨끗함을 유지할 텐데 이렇게 막아놓으면 고여 버리고

고인 물은 썩어버릴 겁니다.

어디 물만 그럴까요?

우리의 마음도 늘 고리타분한 생각은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며 살아야 한 텐데...

우물도 온고지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곳에 와 공자에게 제를 올릴 때 여기 우물의 물을 떠서 마셨다 합니다.

우물 서쪽에 "고택정찬(故宅井贊)"이라고 건륭황제가 직접 쓴 석비가 서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우물 건너편에 서 있습니다.

우물물에까지 글을 남겼던 건륭황제는 이 우물이 공자가 마셨다는 말 때문에

그런 칭송을 했을 겁니다.

같은 우물일지라도 공자가 마셨던 우물은 황제도 칭송하는 글이 남아있네요.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이렇게 가두어두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잖아요?

물이든 생각이든 자꾸 퍼내야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워질 겁니다.

 

 

이번에는 시례당(詩禮堂)이라는 건물입니다.

공자가 아들인 공리(孔鲤)에 시와 예를 교육했다는 일화에 따라 송나라 때

처음 이 건물을 만들었다 합니다.

공자가 아들의 이름을 '리(鲤)'라고 정한 이유는 그가 살았던 동네의 이름이라 하더군요.

그 후 명나라 홍치 연간에 공자가 시와 예를 중시했다고 하여 다시 지었고 청나라 때에는

황제가 수시로 이곳을 찾아와 제를 올렸으며 황제의 아들 교육도 이곳에서 시켰다 합니다.

지금은 장사하는 사람만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네요.

 

 

후동부에는 공자고택문(孔子古宅門)이 있습니다.
송나라와 금나라 양대의 묘택문(廟宅門)이 있던 자리였으므로 공자고택문으로 삼은

것인데 안에는 청나라 고종 건륭(乾隆) 황제가 쓴 고택문찬비(古宅門贊碑)가 있습니다.

 

좌우지간 역대 정권 중 청나라만큼 이곳을 사랑한 정권이 없었나 봅니다.

그만큼 청나라는 같은 이민족으로 얼마 전 원나라가 당하고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고향 앞으로 돌아간 일에 무척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그랬기에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공자의 사당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공을 들였을 겁니다.

 

 

이밖에 시례당(詩禮堂) 안에는 당나라 때 심은 괴목(槐木)인 당괴(唐槐)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송나라 때 심은 은행나무 등 노거수(老巨樹)도 있습니다.

 

 

그 나무가 당나라 때 심은 나무인지 송나라 때 심은 나무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에 자라는 나무는 죽은 후에도 다시 살아나는 힘이 있는 나라이기에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만약 자꾸 의심하며 다니다 보면 여행이 퍽퍽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佳人처럼 투정만 부리며 다니게 됩니다.

 

 

가을이 깊어감에 공자네 집안에 심어 놓은 은행나무는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는 공택을 더욱 아름답게 윤택하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은행나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치 아주 오래된 우리 고향집을 걸으며 보는 그런 분위기네요.

 

 

후서부에는 계성문(啓聖門), 악기고(樂器庫), 금사당(金絲堂), 오현찬비(五賢贊碑),

계성전(啓聖殿), 원가봉계성왕제조비(元加封啓聖王制詔碑), 계성왕침전(啓聖王寢殿) 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곳은 사람이 거의 가지 않는 곳이군요.

 

 

계성왕(啓星王)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을 말하는데,
성인을 낳으심으로 송나라 진종(眞宗) 때는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에는 

제국공(齊國公)에 봉해졌다네요.

아들만 잘 낳아도 이렇게 부모는 저절로 제후에 봉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네요.

명품 가방보다 명품 자식을 키우면 그게 명품 가방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또 공자의 아비는 원나라 지순(支順) 원년(1330)에는 계성왕(啓星王)으로 봉해졌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후서부는 ‘계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공자의 부모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물이 있다네요.
 

 

특히 계성전 북쪽에 있는 3 간의 계성왕 침전은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安徵在)의 사당인데
안 씨 역시 그의 남편이 추존됨에 따라 노국태부인(魯國太夫人), 계성왕부인(啓星王夫人)으로

봉해져 제사를 받고 있었답니다.

원래 직업은 무당이었지만, 아들 잘 둔 덕분에 태부인이니 왕부인이니 하는 칭호를 받았나 봅니다.

사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겠어요.

오히려 공자는 그런 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며 예(禮)를 배우기 시작해 六禮에 통달한 분으로

이름을 떨친 분이 아니겠어요?

 

이제 지루한 공묘는 모두 보았습니다.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냥 대강 눈으로만 훑어보았습니다.

당연히 佳人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신 분은 직접 취푸를 찾아가 보셔야 하는 곳입니다.

자라는 아이에게도 교육적으로 성현의 자취를 따라가며 보여주는 일도

무척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 한국인에게도 깊이 각인된 성현이 공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도 어린 시절부터 무척 자주 들었던 분 중의 한 분이 공자님이시죠.

그러기에 여행을 즐기는 분이시라면 이곳 취푸는 한 번쯤 다녀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를 타고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아이들에게 추천할만한 여행지가 취푸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