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망산... 그 허망함이여~

2012. 6. 25.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이제 이곳 북망산에 묻혔던 수많은 무덤도 도시화의 영향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자리를 자꾸 빼앗고 있습니다.

그 옛날 모두가 그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 사람의 한 마디에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지만,

지금은 동네 유기견마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한때는 천하를 호령했던 사람도 죽은 후 세월이 많이 지나니 개털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버리는데 범 털은 무엇이고 족제비 털은 또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세상을 움켜쥐었던 어마어마했던 사람도 지금은 덜수같은 사람에게도 밀려납니다.

 

인간이 삶이란 이리도 허망한 게 아닐까요?

딱 한 번만 왔다 가는 우리네 삶이 말입니다.

살아가는 도중, 가족을 더 사랑하고 주변 사람을 더 격려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지금 가만히 내 눈에 사랑을 가득 담고 또 다른 나의 눈을 바라보세요.

사랑이 보이실 겝니다.

 

 

얼마 전 낙양시 문물 공작대라는 곳에서 이곳의 무덤 700여 기에 대한 조사를

모두 마쳤다고 하며 동주 이후 후당까지 9개 왕조의 도읍으로 수도였던 낙양...

그 북쪽에서 동서로 100여 m의 길이로 높이 300여 m의 나지막한 산이 바로 북망산이랍니다.

그러다 보니 지리적인 이점으로 후당 이전까지 24기의 황제 무덤이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수십만 기의 무덤이 바로 북망산에 있었기에

누구나 죽으면 가는 곳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물론 세월이 지나며 후손이 찾지 않아 대부분 소실되었겠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무덤만 망산에는 진나라 재상이었으며 진시황 영정의 친부였을지도

모르는 여불위를 비롯해 남조의 마지막 왕인 진숙보, 남당의 마지막 왕 이욱, 서진의

사마씨, 한나라의 광무제, 당나라 대시인 두보, 서예가 안진경 등의 무덤이 확인되었답니다.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이 아닌가요?

 

 

여불위가 누굽니까?

지금으로 보면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인 워런 버핏이나 그 외의 어느 사람도

생각하지 못했던 벤처 투자의 달인이 아니겠습니까?

한낱 장사꾼인 그는 어느 날 장사길에 나섰다가 우연히 한단에 들렸다가 운명적으로

이인이라는 덜수처럼 어리 삐리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게 장사꾼 여불위를 천하의 여불위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지요.

 

 

여불위는 속으로  "장사란 이문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야~"라는

마음이 들어 집에 돌아와

아비에게 "아버님~ 농부가 아침 해를 이고 나가 저녁해를 짊어지고 들어오며 1년간 버는 게

얼마나 됩니까?"라고 농사만 짓고 살아온 아비에게 건방진 말로 시작해 아비가 알겠어요?

아니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입니다.

뭐라고요?

"돈으로 한 나라의 군주를 세운다면 도대체 얼마나 벌 수 있을까요?"라는 말로 이인에게

올인하게 되며 세상에 어느 사람도 시도하지 않은 기상천외한 투자를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장사꾼이 상품에 손대지 않고 나라에 투자를 한 겁니다.

 

만약, 잘 나간다는 자식 놈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하며 물어본다면 식겁할 일이 아니겠어요?

이게 지금으로 말하면 서로 대선에 나서겠다고 우글거리는 잡룡이라는 사람에게 선투자를 하는

일일 겁이고 그게 바로 로비고 이런 사람은 나중에 대부분 휠체어 타고 죽어가는 시늉 하며

포토 라인에 멈추어 서서 찍은 사진에 나오고 기어코 민초의 피 같은 세금으로 운영하는

국립호텔에 들어가 무료 숙박에 식사까지 대접받더군요.

물론, 세월이 흘러 사회로 나오면 당시의 일은 정치탄압이고 음해라고 말하지만 말입니다.

 

 

여불위라는 사내가 자기의 여자였던 조희까지 자초인 이인에게 상납하며

헌신적으로 이화접목하여 꿈을 이룬 자입니다.

결국, 여불위는 자초를 통하여 꿈을 이루었고 자초의 아들인(여불위의 아들인지도 모르는 일이죠)

영정인 진시황을 통하여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원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룬 야망이 대단했던

인물도 죽고 나니 무덤조차 돌보는 사람이 없어 버려진 채로 이곳 북망산에 묻혀있네요.

 

여불위는 佳人이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바빠 만나주지 않겠지만...

혹시 압니까?

여불위가 자랑하는 여불위 춘추에 佳人이 일자천금에 태클을 걸고 들어가면 만나줄지 말입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노애 하나 잘 키워 데리고 가면 만나줄지 모르잖아요.

 

 

그 외에도 많은 황제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나 아직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이나

백제의 유민에 대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합니다.

아니면 조사를 끝내고 숨기는 건 아닌지...

어느 학술지에서는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 남생, 셋째 남산, 남생의 아들 현성,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 등의 무덤을 확인했고 고구려 기와와 당삼채 등 유물을 발굴했다고도 합니다.

 

 

부여융의 묘지명은 1920년 북망산에서 이미 발견되어 현재 하남성 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며 백제부흥운동을 벌이다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나라 군부의 실력자로 활약하다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도 이미 1929년 그의 아들인 흑치준의 것과 함께

발견되어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네요.

 

낙양 고묘 박물관은 낙양시 북쪽 교외의 망산총두서촌(邙山塚頭西村)에 있습니다.

역대 대표적인 무덤을 지하와 지상에 전시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북망산일 겁니다.

백제의 의자왕 무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답니다.

 

 

고묘 박물관은 중국 유일의 박물관으로 전체면적 3만 제곱미터에 건축면적만

7600제곱미터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네요.

관내에는 다량의 옛 생활기구와 장식품 등 부장품과 서한, 위진 시기의 토용

그리고 당대의 당삼채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크게 지하와 지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상에는 한대 백옥으로 만든 망루와

서막대전(序幕大殿), 도서자료실, 전시실, 사각루(四角樓), 망경정(望景亭) 등이 있으며, 지하에는

박물관의 핵심으로 서한부터 북송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전형적 형태의

웅대한 고묘 25개가 자리 잡고 있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벽화 묘군이 가장 유명하다고 하네요.

 

 

낙양의 한묘(漢墓) 벽화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현재 모두 10개의 고 벽화묘가

참관할 수 있는데, 서한의 "타귀도(打鬼圖)" 벽화묘, 서한의 귀족인 복천추(卜千秋)의

벽화묘, 동한의 출행도(出行圖) 벽화묘 등이 그것이라 합니다.

죽어서도 심심하지 않도록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나 봅니다.

무덤 안에 그려진 위의 사진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합니다.

이런 그림은 그냥 예술적인 가치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는 무덤 속에 들어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들의 집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생각하네요.

 

이렇게 무덤의 벽화는 당시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네요.

지금 막 상을 차리고 식사를 하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들의 생활은 우리의 안방문화와는 다르게 의자를 이용했나 봅니다.

 

 

또 위의 벽화는 오늘 佳人의 방문을 미리 알고 환영하는 겐 가요?

그럼 오늘 사후 세계도 구경시켜 주는 겁니까?

아마도 귀한 분의 방문을 맞이해 환영연주도 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이렇게 이런 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악기 편제나 풍습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연주 중인 악기는 지금도 볼 수 있는 악기입니다.

 

 

우리 부부는 캄캄한 무덤 속을 다니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서 순간 얼어버렸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캄캄한 지하의 어둠 속을 다니는데 희미한 불빛에 무덤 안에서 누가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네요.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시죠.

 

호대가 보이는데 4개나 되고 네모난 것이라 아무래도 지체 높은 무인의 무덤이 아닌가

생각되며, 무덤 속을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덜수가 문을 빠꼼이 열고

머리만 내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록 죽은 자의 무덤 속이지만, 이렇게 해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만약 저 녀석이 우리 부부에게 들어오라 하면 죽어도 안 들어갈 겁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도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죽은 자의 해학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그들의 삶이 퍽퍽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이렇게 죽은 자와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나 엿볼 수도 있네요.

우리도 언젠가 덜수를 따라 저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사랑할 게 남았고 해야 할 일이 좀 더 남았기에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가렵니다.

 

 

무덤의 벽면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장식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나이가 많은 노부부가 찻잔을 탁자 위에 올리고 차를 마시는 풍경입니다.

당시의 머리 모양이나 복식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풍경입니다.

백년해로한 듯한 모습에서 두 분이 무척 행복한 삶을 사셨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러니 부부간에는 서로 등 돌리고 살아서는 안 되는 일인가 봅니다.

 

 

아래는 쓸데없는 달기와 주왕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이야기를 마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지요?

바로 인육과 인육으로 만든 캡슐 사건 말입니다.

이 사건이 조선족 한 사람의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이런 인육을 먹는 일이 옛날부터 내려온 일이랍니다.

주왕과 달기 이야기의 주 무대가 바로 이 부근이 아닐까 생각하고 말입니다.

달기는 주왕이 유소국을 정벌했을 때 유소국의 왕 유소가 자기 딸을 주왕에 헌상했는데

그녀가 바로 달기였다는군요.

 

달기에 관한 이야기로는 주지육림이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형벌에 대한 이야기가 압권이지요.

포락지형은 둥근 청동 기둥에 기름을 발라 구덩이를 파고 불을 지펴 그 위에 걸쳐놓고

건너가게 하는 형벌로 떨어져 불에 타 죽거나 건너가다 불에 달궈진 청동 기둥에 걸쳐

죽거나 좌우지간 죽이는 방법이라 하지요.

우리는 이런 끔찍한 일을 달기라는 여인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악독한 여인이라 비난했잖아요.

 

 

그때 달기가 했다는 형벌을 살펴보면.... 

해형은 사람을 죽여 살을 저며 젓을 담그는 것이고, 포형은 사람을 죽여 육신을 조각내

육포로 만드는 형벌이라 하며 자형은 사람의 인육을 굽는다 합니다.

 

그런데 사마천이 쓴 사기에 기록된 이런 형벌은 그냥 형벌로 끝낸 게 아니라 사실은

중국에서는 이때부터 인육을 먹는 풍습이 있었고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에는 

이런 것을 팔고 사는 시장까지 정식으로 열렸다 합니다.

그러니 달기 이야기에 나온 형벌은 달기가 고안한 형벌이 아니라 중국에서 인간을 먹는

식인 풍습이 있었기에 나온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해형, 포형, 자형은 사실은 형벌을 이용하여 인육을 요리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라 봐야 할 겁니다.

 

가장 최근에는 1948년 국공내전 기간에도 인육시장이 장춘에 열렸다 합니다.

문화 대혁명이 기간인 60년대 말에 홍위병들이 광서성에서 137명의 반혁명 분자를 잡아서

식인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뉴욕타임스에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만 볼 때

중국인의 이해하기 어려운 음식습관을 알 수 있습니다.

문명국이라 자부하는 중국이 말입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주변 나라에서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한 시체를 좀비라 하던가요?

그러면 죽은 자의 인육을 먹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모두 좀비가 아닌가요?

중국이라는 문명국은 결국 좀비의 나라인가 봅니다.

그 이유로 요즈음 인육을 먹지 못해 역사 날조나 하고 만리장성을

엿가락 늘이듯 늘이고 있잖아요.

모두 빠떼루만 받고 끝낼 일이 아닌가 봐요. 그쵸?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의 공자마저도 해라고 불리는 인육으로 담근 젓갈 없이는 밥을 먹지

못했다는데, 공자의 제자 자로가 위나라 신하로 있다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죽임을 당해

해로 만들어져 자신의 식탁에 오르자 다시는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하며 집안에 고이 보관했던

모든 젓갈을 모두 버리라 했다 이야기도 있습니다.

만세사표라는 공자마저도 말입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공자도 믿지 마세요.

중국이라는 나라도 자꾸 파고 들어가면 모두가 멘붕~

 

이러한 형벌을 보다 못한 제후인 매백(梅伯)이 주왕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형벌을 없애자

했다가 주왕이 화를 내며 매백을 죽이고 시신을 토막 내 젓을 담가 모든 제후에게

먹을 것을 강요함으로 일벌백계(?)로 다스렸다는군요.

그 후에 여러 제후가 간하였으나 모두 골고루 형에 처해져 버렸답니다.

해로 담그고 포로 뜨고 자로 굽고...

아주 인육 파티를 벌렸을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냐를 보는 듯합니다.

Cannibal...

이런 민족이 어찌 문명을 입에 올릴 수 있답니까?

 

 

심지어 서백인 희창은 혼잣말로 탄식하다가 어떤 이가 주왕에 고자질하여 투옥되고

그의 아들을 죽여 국을 끓여 먹였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숙부인 비간(比干)은

해부를 당해 심장을 보이게 되는 형벌도 당했답니다.

아들을 끓인 국을 먹었던 그런 주나라 문왕인 희창은 우여곡절 끝에 국력을 회복하고

살아남았으며 그의 아들인 무왕은 민심이 주왕을 떠난 것을 알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기원전 1046년 은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지금 하남성 위휘(衛輝)인 목야(牧野)에서 3백 승의 병거와 3천 명의 용맹한 무사와 4만 5천 명의

갑사를 거느리고 여러 지방에서 온 지원병을 합쳐 은나라 주왕이 급히 편성한 노예와 포로로

구성된 70만 명의 은나라 군사와  큰 전투를 벌입니다.

병사 숫자에서는 주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러나 전쟁이란 숫자놀음이 아니랍니다.

 

 

출병하여 가는 도중 건방진 백이와 숙제를 만나게 되지요.

건방진 두 사람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문왕의 제사도 지내지 않고 거병을 한 것은 불효라는 둥, 신하의 나라가 주군의

나라를 치는 일은 불충이라는 둥, 정말 들어보면 싹수없는 말만 골라하는 두 사람을 죽이려 했지만,

또 그 유명한 강태공이 나타나 만류합니다.

정말 강태공이 나서서 말리지만 않았다면 세상에 백이숙제는 알려지지도 못하고 단칼에 가버렸을

것인데 천하에 더는 잔인해지기 어려운 인간 주왕에 대한 정벌을 백이숙제는

불충이라고 했단 말입니까?

 

 

결국, 두 사람은 수양산으로 들어가고 주나라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먹다가 어느 날 산나물을 캐러 온 아낙에게 딱 걸려 아낙의 한 마디에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양식도 주나라 땅에서 나고 이 수양산도 주나라 땅이 되었으니 고사리도

주나라 고사리인데 꼴값 떨고 지조를 지킨다고 하면서 왜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고사리는 먹는겨~"라고 한 말이라고 하는 데...

 

그런데 우찌 깊은 산속에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활자화되어

세상 사람이 다 아는지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그러니 중국엣 최고의 역사서라는 사기라는 책도 사실은 사기일까요

백이숙제가 세상에 태어나 한 일이 굶는 일만 했는데 왜 이렇게 유명한가요?

고사리도 주나라 땅에서 나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먹고 유명해지려 했답니까.

결국, 나물 캐러 온 아낙만도 못한 인지능력을 지닌 백이 숙제가 아니겠어요?

 

 

그 유명한 수양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섬서성과 하남성 그리고 산서성이 만나는

귀퉁이에서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갑자기 변심하여 동으로 확 90도 좌회전하며

방향을 트는 모퉁이에 있다네요.

위의 사진을 보시면 왼쪽 아래에 둥근 표시 부분에 수양산이 보이고

그곳에 백이 숙제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무왕이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녹대 위에서 달기와 주색에 빠져있다가

주왕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 목야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중국식 과장법으로 설명한 내용을 보면

'절굿공이가 피에 떠다닐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런 표현은 중국에서나 통하지 않겠어요?

이런 표현을 하는 중국사람을 미워할 수 없잖아요.

왜 절굿공이가 전쟁터에 있었으며 그 절굿공이를 풍선껌으로 만들기 전에야...

 

 

훨씬 많은 군사로 주나라를 상대했지만, 어디 군사가 충성스러운 군사였습니까?

대부분 창을 거꾸로 들고 앞장서 오히려 궁성을 향해 공격의 선봉에 섭니다.

주왕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일단 조가성으로 퇴각을 하는데 그를 따르던 사람이

겨우 백여 명... 주왕은 이제 하늘마저 자신을 버렸음을 직감하고 보옥의(寶玉衣)로 갈아입고

녹대 위에서 한 상 거하게 차려놓고 먹은 뒤 녹대에 불을 놓으라 명하고 죽음을 맞이했답니다.

죽는 순간까지 멋진 최후를 맞이합니다.

 

 

무왕은 마차를 몰고 불타는 녹대에 이르러 화살을 세 발을 날리고 또 검으로 몇 군데 찌르고

마지막으로 청동 도끼로 주왕의 머리를 내려치고는 깃발 끝에 주왕의 시체를 꽂아 은나라의

종말을 세상에 알림과 동시에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음을 세상에 알립니다.

물론, 달기도 마찬가지로 창끝에 매달아 주왕을 망하게 한 여인이 달기였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천자가 되어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선포합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또 돕니다.

하나라가 멸망할 때 마지막 왕인 걸왕의 곁에는 말희가 있었고, 은나라 주왕의 곁에는

달기가 있었으며, 또 은나라를 절단 내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킨 주나라의 마지막 왕인

유왕의 곁에는 포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여인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후대에 전해져 황제에게 간할 때 신하가 하는 레퍼토리가 됩니다.

 

달기에 얽힌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단죄를 통해 중국인들의

인육 습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저들이 주변 나라를 돌아가며 모두 오랑캐라고 비하했지만, 실제로는 중화라는 곳에 살았던

사람은 오랑캐도 하지 않은 인육을 먹는 민족이었던 겁니다.

그런 풍습이 지금도 인육을 캡슐에 담겨 공공연히 팔린다 합니다.

 

이번 조선족 출신의 한 사내가 우리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판사도 그가 한 행동의 목적이 단순한 성폭행이 아니라 인육을 공급하려고 한 짓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판결이라 합니다.

문명국이라는 중국...

그들의 식습관을 우리의 잣대로 마름질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인육을 먹는 문제만큼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고 싶네요.

과연 진정한 오랑캐는 누구일까요?

佳人이 두렵고 무서워하는 것은 은연중에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도 스며들지 않았나 하는 일입니다.

 

 

이밖에도 낙양에서는 관림이라고 관우의 묘가 있어 유명하다고 하네요.

위의 위성사진은 관우의 묘인 관림이라 합니다.

묘 중에 林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일은 중국에서는 오직 여기와 공자의 묘인

공림 두 군데뿐이라 하지요.

황제의 묘는 陵이라 칭한다 했나요?

 

 

황제보다 더 높게 부르는 이유는 성인으로 대우받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곳은 시간 때문에 그냥 들르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이곳 관림을 찾아보았습니다.

내일은 하남성의 성도이며 교통의 요지라는 정저우로 가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모르는 것보다 사실과 다르게 잘못 알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 했습니다.

佳人의 여행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일 겁니다.

그래서 佳人의 여행기는 호환 마마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佳人의 여행기는 슬쩍 오토바이 타고 지나치듯 보셔야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묻고 따지시면 곤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