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1. 08:00ㆍ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향산사를 구경하고 용문교 방향으로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다리를
막 지나면 위의 사진처럼 바이위엔(白園 : 백원)이라고 쓴 건물이 보입니다.
그 건물 오른편에 바로 백거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입니다.
이 동네를 사랑해 은퇴 후 이 동네서 여덟 노인과 말년을 시를 쓰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술을 즐겼다고 하는데 멋져 보이는 삶이었지만, 사실 백수들의
노는 방법으로 매일 이 짓만 하다 보면 그 또한 지겨운 놀이랍니다.
佳人 거사가 왜 그리 무위도식하며 사냐고 묻자 "냅도유~ 이리 살다 여기에서
죽을래유~"라고 했다고 정말 죽은 후 여기에 묻혔답니다.
여기도 향산사와 같이 역시 처음 용문석굴로 들어올 때 산 문표를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도 문표 검사를 한 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버리고 없다면?
안 들어가거나 돈을 따로 내야 들어간다 합니다.
백거이가 죽으며 원했던 바로 그곳에 묘원을 마련했나 봅니다.
1982년 뤄양시에서 묘원을 중수한 후 그 이듬해부터 외부 공개를 시작했다
하는데 이곳이 지금은 용문석굴의 가장 매력적인 경구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쓰여 있지만, 우리 부부가 갔을 때는 젊은 중국 남자 한 사람과
우리 부부 외에는 구경꾼을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매력적인 곳이 구경하는 사람 하나 보기 어렵습니까?
묘원은 대단히 넓고 전체적으로 묘원을 세 구역으로 나눈다 합니다.
청곡구라고 들어가며 볼 수 있는 숲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제법 운치 있는
계곡이고 풍류를 아는 사람이 묻혔다고 주변 환경을 제법 잘 조성해 놓았습니다.
백거이는 죽어서도 이런 멋진 곳에 누워있으니 아마도 사후 세상에서도
멋진 시를 지으며 지낼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묘원, 마지막으로 그의 시와 관련된 회랑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는데 이 묘원의 특징은 당나라 스타일이라 합니다.
낙천당, 백정, 송풍정 등...
그러니 묘원으로 꾸몄지만, 워낙 아름다운 곳이라 마치 아름다운 정원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드는 곳으로 사실 지금까지 돌산만 다니며 보았으니
숲이 약간만 우거져 이 정도만 보아도 정원이 아름답다 생각되기는 하지요.
잠시 멋진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왼편에 낙천당이 보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니 백거이가 썼다는 시집을 비롯해 많은 서책과 지필묵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러나 모두 한자라 佳人은 읽기조차 어려운 글이 여기저기 많이 있네요.
낙천당 한가운데는 위의 사진처럼 백거이의 형상을 만들어 평소 그가 즐겼다는
자세로 바위 위에 앉혀 놓았습니다.
저게 여름에는 좋은 자리일지 모르지만, 겨울에는 절대로 따라 할 짓이 아닙니다.
왜 겨울에는 바위 위에 저런 자세로 앉으면 안 되는지 잘 아시죠?
항문질환에 걸리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낙천당을 끼고 조금 더 올라가면 제일 위에 커다란 묘가 보이네요.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게 묘소 위에 잘 자란 나무를 키우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묘 위에 나무를 자라게 내버려 두지 않잖아요.
얼마나 도둑이 많아 도굴이 걱정되면 중국은 어느 무덤이나
이렇게 묘 위에 나무를 심잖아요.
그 대단했던 사람도 죽고 나니 이렇게 잡초만 무성한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이곳을 비파봉(琵琶峰)이라는 봉우리인데 아마도 봉우리 모습이 비파라는
악기처럼 생겼기에 붙인 이름이고 여기는 바로 이하라는 강이 내려다보이고
건너편의 용문석굴이 그대로 보이는 아주 풍광이 뛰어난 곳입니다.
위의 사진은 백거이 후손이 쓴 글로 보입니다.
백거이의 시는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알려진 인기 시인이 아닐까
생각되며 그는 자신의 호를 향산 거사(香山居士)로 지었을 만큼, 이곳 향산사를
환장하게 좋아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842년 71세의 나이에 형부상서의 대우로 퇴직했으며, 74세로 타계해 여기에
묻혔다는데 당시 나이로 74세면 천수를 누렸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백거이는 만년에 불교에 심취해 이 향산사에서 계곡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글을
쓰다가 생애를 마감했을 정도로 이 향산사의 왕 팬이었던 모양입니다.
살아서 좋았던 곳이라 죽어서도 묻히기를 바랐다면 정말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생각되며 사람이 죽을 때 행복한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어요?
모두가 슬퍼 울 때 혼자 웃으며 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가는 사람 혼자 슬퍼 울고 다른 사람 대부분은 웃는 삶을 살았다면
반성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 백 거사! 이곳에 묻히셔서 행복하십니까?
죽어서도 행복 중이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묘지명은 그의 시대 또 다른 걸출한 시인 이상은이 썼다고 알려졌습니다.
더군다나 당나라 때 백거이가 이곳 용문의 풍광을 무척 즐겼다고 하며 이곳 향산사에
18년간이나 눌러 빈대 생활도 했다 하니 보기와는 다른 곳이네요.
백거이가 자신을 향산 거사라 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의 은거 생활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香山居士!
佳人居士 다녀가네~
여기 큰 돌에 무수히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제목이 취음선생부(醉吟先生傳)라는 작품을 돌에다 새겨놓았습니다.
저 글을 서서 다 읽고 갈 수 있을까요? 헐!!!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라는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한가야말로 백거이를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시라 하네요.
그런데 그 사랑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이었나요?
원래 양귀비의 오리지널 서방이 누구였나 모르겠습니다.
양귀비는 워낙 출중한 미모를 지녔기에 오히려 불행한 여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불륜의 사랑은 아름답다고 미화한 백거이도 빠떼루 받아야 합니다.
북방 민족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여자를 취하는 풍습은 있으나 살아있는
자식의 여자를 인터셉트하는 법은 없잖아요.
황제가 한 일에 묻거나 따지면 안 되는 일입니다.
장한가(長恨歌)에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blog.daum.net/nhk2375/7164425
長恨歌 (장한가) - 白居易 (백거이)
長恨歌 (장한가) - 白居易 (백거이) 漢皇重色思傾國, 황제는 색을 좋아해 미인을 생각하고 御宇多年求不得。 재위 여러 해 구했지만 구하지 못했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집에 한 처녀 커가자
blog.daum.net
시간이 허락하시면 오늘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시 한 편 읊어 봄이 어떨까요?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 사람입니다.
호는 취음 선생(醉吟先生), 향산 거사(香山居士)이며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낙양 부근의 신정(新鄭)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네요.
과인이 총명하야 5살 때부터 이미 시 짓는 법을 배웠고 27세 때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좌습유(左拾遺) 등을 지냈으나 백거이는 뛰어난 재능에 비해 그리 순탄한
관직 생활은 아니었다고 하며 나이 50이 넘어서야 겨우 항주와 소주의 자사를
역임하게 되었다고 하니 관운은 그리 썩 좋은 편이 아니었나 봅니다.
묘 앞의 석비에는 당소부백공지묘(唐少傳白公之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당나라 태자의 스승이었기에 당소부(唐少傳)라는
비문을 새겨놓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중국에서 많은 문인이 태어나고 스러졌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람이 있잖아요.
이백과 두보라는 두 걸출한 시인이 아마도 우리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문인이 아닐까
생각되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시인은 그가 처한 삶이 달랐기에 그의 시 또한 한 사람은
삶의 즐거움이었고 다른 사람은 슬픔을 이야기했나 봅니다.
자라며 처한 환경이 사람의 인성에 무척 큰 영향을 준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인이 가고 난 뒤 중국 문학계에는 또 하나의 기라성을 방불하는
문인을 맞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백거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사람들이 아름다운 시를 노래했기에 성당 시대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백 씨 종친회에서도 다녀가며 기념비를 남겼나 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에서도 이곳에 비석을 남겼습니다.
백거이는 일본에서도 대단히 유명한 시인인가 봅니다.
일본에서도 이곳에 와 글을 남겼습니다.
백락천 만고유방!!! 백낙천이여~ 영원하라!
실제로 일본에는 안녹산의 난 때 양귀비가 피난 중 죽지 않고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에서 살다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합니다.
정말 그 속을 누가 알까요?
그래서 일본에서도 양귀비는 대단히 널리 알려진 미인인가 봅니다.
그의 시는 무척 서정적이며 평이했기에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시를 쓰고 난 후 이웃집 여인에게 읽게 하고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 정식으로
시를 발표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가 의미하기는 쉽고 대중적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이웃집 여인은 보톤 여인은 아니었지 싶네요.
요즈음 우리 주변에도 보면 난해한 시를 써야 시인으로 인정받나 봅니다.
그런 시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모르겠어요.
사실 그 시를 썼다는 시인조차 무슨 말인지 알까요?
백거이처럼 보통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시를 쓰면 천박해 보이나요?
여기는 백거이가 남긴 시를 돌에 새겨놓은 회랑입니다.
한문을 안다면 이곳을 두리번거리며 백 거사와 함께 시를 읊으며
거닐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佳人도 시 한 수 남기고 싶습니다.
백거이는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중국의 시인 중 한 사람이라 합니다.
중국뿐 아니라 동양권에서는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같은 생각일 겁니다.
이런 대중성은 무엇보다 그의 시가 알기 쉽다는 데 있다는 말일 겁니다.
앞으로 글을 쓰시는 분은 쉽게 써주시면 어떨까요?
이제 이곳 용문석굴의 여행을 마치며 백거이의 시 한 편을 보고 가렵니다.
食後(식후) - 백거이(白居易)
食罷一覺睡 (식파일각수) : 식사 후, 한숨의 잠
起來兩甌茶 (기내량구다) : 깨어나면, 두 잔의 차.
擧頭看日影 (거두간일영) : 머리 들어 해 그림자 보니
已復西南斜 (이복서남사) : 이미 서남쪽으로 기울었다.
樂人惜日促 (낙인석일촉) : 즐거운 사람은 한 날이 짧음 아쉬워하고
憂人厭年賖 (우인염년사) : 우울한 사람은 한 해가 더디 감을 싫어한다.
無憂無樂者 (무우무낙자) : 우울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사람은
長短任生涯 (장단임생애) : 인생의 길고 짧음도 생애에 맡기노라.
그럼 佳人같은 백수는 어디에 속할까요?
혹은 여러분은 어디입니까?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백거이가 했다는 말처럼
인생이란 나그네와 같아서 두 발을 잠시도 머물 수 없습니다.
날마다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앞길이 또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미리 모두 알고 살아가는 그런 삶 또한 재미없지 않을까요?
모르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요.
당나라 때 특히 유명한 시인의 활동이 많았습니다.
이는 종이의 발명과 연관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이는 일단 쓰기 좋고 많은 글을 쓸 수 있고 오래도록 남길 수 있기 때문이잖아요.
대나무인 죽간에 글을 쓴다는 일은 시간이 지나며 썩어 사라지고 보관이나 많은 글을
쓸 수 없고 더군다나 글만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쓴 후 그 모습대로 대나무를 파내야 하기에
무척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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