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4. 08:00ㆍ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몰락한 귀족으로 하급 무사 출신이었다 합니다.
그는 첫째 부인에게서 9명의 딸을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다는군요.
둘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하나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불구의 몸이었다 합니다.
오매불망 아들사랑에 빠진 공자의 아버지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문지방을 넘어갈 힘만 있다면 도전해야 합니다.
중국이 왜 인구가 많겠어요?
바로 이런 무한도전 정신 때문이 아닌가요?
문지방 한 번 넘어가 실패하면 또 넘어가면 됩니다.
그거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얻은 아들이 바로 공자였다는군요.
늦게 얻은 아들이 대박이 난 겁니다.
무한도전의 정신으로 무장한 65세의 숙량흘은 이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공자는 아비의 氣를 듬뿍 받으며
태어났기에 위대한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지금 세상에서도 65세에 자식을 보았다면 해외토픽에 날 이야기 아닌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은 공자는 그의 친부인 아버지와는 성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또 당시의 복잡한 성, 이름 그리고 子의 사용에 대한 복잡한 사회적인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는군요.
좌우지간 아버지인 숙량흘은 성이 없고 이름이 흘이고 子가 숙량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공자의 성씨는 공이 아니었고 공자로부터 처음 공 씨를 성으로 사용했다고 하네요.
그러니 공자는 부모 없는 아들도 아니었고 더더욱 외계인도 아닌 게 분명합니다.
위의 사진은 이곳 꽁린의 넘버 2인 공자의 아들 공리(孔鲤)의 묘입니다.
자는 백어(伯魚)라 하네요.
공자가 무슨 짓을 했기에 자식을 인간이 아닌 잉어를 낳았답니까?
이름도 잉어라 짓고 자는 고기의 맏이라 했으니...
공리는 일생동안 아버지 그늘 때문에 오히려 불행했을지 모릅니다.
집을 지키고 부모 봉양만 했다고 하네요.
물론 대단한 아버지 아래에서 훌륭한 교육을 돈도 내지 않고 개인지도로 받았겠지만...
그는 공자 사후에 공 씨 가문에 이세조(二世祖)라 불리었답니다.
그 옆에 바로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공자의 묘가 보입니다.
기원전 500년이나 된 무덤이니 지금으로부터 2.500년이나 된 무덤이네요.
세상에서도 존경받는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가요, 유가학파의 창시자요, 세계 10대 문화 명인 중 한 사람이며
세계적으로 성인의 한 사람을 존경받는 공자가 아니겠어요?
무슨 찬사로 공자를 소개할 수 있겠어요? 그쵸?
그러나 여기 꽁린에서는 간단하게 넘버 1로 불립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공자의 아비는 오직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회를 보던 중
셋째 부인을 얻게 되었다는데 그때 숙량흘의 나이가 65세였으며 그의 아내 안징재가
옴마야~ 겨우 이팔청춘이라는 16세랍니다.
여자 나이 16세라면 아직 여자로 성장 중이 아닌가요?
만약 요즈음 이런 사건이 생겼다면 여자들은 사내를 보고 도둑놈이라 할 것이요,
남자들은 사내를 보고 '저 놈 정말 능력 있네.'라고 부러워할 겁니다.
지금으로 보아도 너무 안 어울리는 커플이 아닌가요?
우리는 이런 경우를 속된 말로 도둑놈이라고 표현하지요.
물론 그때도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은 것을 색안경을 쓰고 보았나 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야합으로 규정하고 부적절한 관계로 보았나 봅니다.
野合이라...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립니까?
들판에서 로봇 태권 브이가 "얍~" 하고 합체하듯...
이 말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아주 나쁜 말이 아닌가요?
만세 사표이신 공자께서는 이런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난 분은 아니잖아요.
왜 사마천은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사마천이 사기를 본격적으로 쓰게 된 이유가 바로 궁형이라는 사내로는 수치스러운
생식기가 잘리는 벌을 받고 난 후였다 합니다.
그의 지인 이릉이라는 장수가 매번 시비를 거는 북쪽의 흉노를 토벌하러 갔다가 투항해버린 사건이 생겼다네요.
이때 모두가 이릉을 비난하자 사마천이 나서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어쩌구저쩌구...
佳人이 옆에서 쿡쿡 찌르며 조용히 하라고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네요.
모두가 노라고 할 때 혼자 예스를 외치다 한 무제의 미움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고 1년을 옥살이하며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겠다는 궁형을 자처한 후 옥에서 나와 사기를 완성했다 하네요.
佳人은 최고의 형벌이 빠떼루인데...
한 무제는 봐주어서 궁형이라니?
감옥에 있는 동안 친구란 놈들이 찾아와 자결을 권유한 놈도 있었지만, 사마천은 세상을 향한 분노를
사기를 쓰는 것으로 풀기 위해 고육지책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누구나 궁형을 받는다고 사마천이 되겠어요?
학우선을 든다고 제갈량이 된다면, 佳人은 늘 학우선만 들고 다녔을 겁니다.
그런 사내가 사마천이었기에 65세의 숙량흘이 16세의 새 아내를 맞아 아들을 보았다는 데 속이 편안했겠어요?
자신과 비교하여 어느 날 잘라 버린 상실감에 대한 분노를 공자 아비를 향해 풀지 않았을까요?
나이 많은 사내가 아직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 같은 아내를 맞이해 아들 생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사마천에게는 하늘이 무너지고 지축이 흔들리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겁니다.
궁형을 받은 40대 후반의 사마천이라는 사내는 아직도 사내로써의 유효기간이 많이 남은
쓸만한 나이가 아니겠어요?
佳人은 사마천의 속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내가 사내로써 사내다운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일... 그것은 잔인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공자 아비를 향해 그런 독설을 퍼부었다고 佳人 혼자 생각해 봅니다.
그게 사내 거시기 콤플렉스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이 역시 '아니면 말고'이지만...
아버지마저 공자가 태어난 후 3년째 되던 해 부양의 의무도 저버린 체 "임자! 나 먼저 가네~"라 하며
세상을 뜨니 어쩝니까?
책임도 지지 않고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쩌란 말입니까?
아이는 낳기만 하면 저절로 큽니까?
이렇게 무책임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후일 공자가 대단한 인물로 성장하자 공자의 아비는
늦은 나이에 애썼다고 계성왕(啓星王)에 봉해졌다지요?
이렇게 되면 어머니 손을 잡고 눈물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 외갓집 동네로 가야죠.
외가가 원래 무속인 집안이라 경제력이 전혀 없는 어머니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 무당일을 하며 공자를 키웁니다.
당시 무당의 주 업무는 장례를 치르는 일이었다 하네요.
3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나요?
바로 공자를 두고 생긴 말이 아닌가 합니다.
3살부터 어머니가 하던 장례일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공자도 예를 중요시했고 여든까지는 살지 못했지만,
그 버릇이 거의 여든까지 갔나 봅니다.
그 어머니는 무속인의 딸로 태어나 무속 일을 했지만, 공자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사실 공자가 이렇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근본 이유는 바로 어머니의 깨인 생각이었습니다.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집안일이나 거들며 덜수처럼 살았더라면 공자도 그렇고 그런 덜수같은
필부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들 낳는 일에만 열심이었던 아버지는 어린이날 아들에게 로봇 장난감 하나 제대로 손에 들려주지 않았고,
부자지간의 사랑이 듬뿍 담긴 대화의 시간도 갖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이브 때 아들놈 자는 방에 몰래 들어가 머리맡에 양말 하나 걸어주지 못하고 일찍 가버렸지만,
공자의 어머니는 정말 아들이 성인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어머니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아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 양념치킨 한 조각, 피자 한 토막 제대로 사주지 못한 아비를 대신해
공자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자였나 봅니다.
그런 이유로 후일 노국태부인(魯國太夫人), 계성왕부인(啓星王夫人)으로 봉해져 추앙받고 있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집은 바로 공자의 묘 옆에 있는 건물로 자공려묘처(子貢廬墓處)라는 건물입니다.
공자 문하 72현 중 수제자였다는 자공이 공자가 죽고 난 후 다른 제자와 여기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곡을 하며 머물렀으며 3년 이 지나자 다른 제자는 의무복무기간이 지났다고 모두 떠났지만,
자공은 홀로 남아 다시 3년의 세월 동안 더 시묘를 했다 합니다.
그런 이유는 그래도 공자의 수제자라고 자타가 인정한 자공이 공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상을 등지는 순간
출타 중이라 임종을 함께 하지 못한 자책감이었을 겁니다.
이 말은 자공이 스스로 빠떼루를 청해 엎드렸다는 말일 겁니다.
빠떼루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뻑 빠떼루가 있습니다.
서양인의 눈에는 괴이한 행동이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는 최고의 표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빠떼루 받은 시간의 합이 6년입니다.
공자가 15세에 이르자 당시 노나라의 권력자인 숙손(淑孫)의 집안 아이들과 그 집안 일꾼을 가까이할 기회가
생겼으며 공자는 그들을 옆에서 도와주며 숙손씨 집안에 곰팡이가 나도록 쌓여있는 책을 하나씩 빌려보게 됩니다.
책과의 만남...
佳人도 어린 시절 책과의 만남을 무척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웃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그때 책을 가까이 한 덕분에 지금의 佳人이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佳人의 어린 시절에 책과의 만남은 창피한 이야기지만, 순전히 딱지를 접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읽었다는 책은 딱지를 접을 수 없는 죽간으로 만든 책이었을 겁니다.
사실 죽간으로 만든 딱지치기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우리와 함께 이곳에 온 베이징에서 온 의사는 마치 부모 모시듯 공자 묘 앞에서 소리치며 큰 절을 올립니다.
옆에 함께 온 사람은 아마도 의사를 수행하며 온 집사로 보였습니다.
이때 바로 공자에게는 천재일우라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겁니다.
공자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는 말(十有五而志于學)이 바로 이곳에서의 일이었을 겁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살에 장가를 들고 바로 이듬해 무쏘의 뿔처럼 거침없이 전진하여 첫아이를 생산합니다.
19살의 불타는 젊음이 바로 아들 생산에 성공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닌가요?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불타는 도전정신도 유전이 아닐까요?
이때 태어난 아이가 잉어일지도 모르는 공리(孔鲤)일 겁니다.
공자의 어머니는 공자 나이 24세에 세상을 뜨니 분명 불우한 형편이지만, 늘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니라 자신을 더 강하게 하는 일이 되잖아요.
쇠도 달구면 달굴수록 더 강해진다 했나요?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드는 긍정의 힘.
서서히 그의 학문에 대한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30세에 혼자 설 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탑니다.
바로 개인 서당을 여는 일입니다.
이게 역사상 최초의 개인 사립 서당이었지 싶습니다.
우리의 극성스러운 사교육의 뿌리도 공자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당시만 해도 교육이란 귀족 자녀에게나 있는 일이지 평민까지 대상을 넓혀 교육하던 시대가 아니었다는군요.
이렇게 20여 년간이나 후진 양성에 매진하다 뒤늦게 정치가로서의 문이 열립니다.
51세에 지방 관리인 중도재에 임명되고 이듬해 건설부 장관 격인 사구라는 직책에 오릅니다.
55세에는 외교부 장관과 대법원장 격인 대사구로 등용되어 그야말로 잘 나가는 처지가 됩니다.
잘 나가면 세상 어디나 견제가 들어옵니다.
군주를 둘러싼 무리들이 맨날 바른 소리만 하는 공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자기네가 먹을 게 없어지니까요.
그래도 군주만 공자의 말을 들어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지요.
한때 젊은 시절 노나라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할 때 이웃나라인 제나라로 건너 가
제나라 군주를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나라에서 한자리 차지하려고 말입니다.
그때 군주가 공자에게 묻습니다
"군주는 어찌해야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공자의 답이 "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했더랍니다.
이 말은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와 자식도 모두 그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이렇게 쉽고 멋진 말에 제나라 군주는 공자에 뻑~ 소리 나게 가버려
공자에게 제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마을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언질을 줍니다.
우선 순전히 말로만...
군주가 군주답지 못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때 제나라 군주가 마치 佳人과 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던 가 봅니다.
순전히 말로만 '아니면 말고~' 말입니다.
공자는 우쭐한 마음에 제나라의 안영에게 찾아가 자기가 잘나 그런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말을 건넸으나
안영이 군주에게 공자의 사람됨이 경박하다고 하며 공자가 한 말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라 합니다.
아! 이런~ 공자의 경박한 실수였습니다.
佳人이 하는 말은 여러분께서 대부분 모두 알고 계시는 말이듯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벼슬 한 자리 한 텐데 그만 먼저 안영을 찾아가 자랑질한 게 그만...
견제구에 제대로 걸리면 뛰어보지도 못하고 바로 허망하게 아웃당합니다.
공자도 신중하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생각을 한 겁니다.
말은 "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했지만, 행동은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적인 성인으로 모시는 공자도 이렇게 경박한 실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덜수처럼 살아가는 佳人을 너무 나무라지는 마세요.
완벽하다는 말은 덜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그런 자리를 제수받으면 머리를 숙여야 하는데 자신이 잘나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우쭐함에 그만 너무 일찍 앞서 나가버린 겁니다.
공자도 이런 실수를 했던 겁니다.
군주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공자의 멋진 명언에 벼슬을 내리려 했던 자신이
이미 안영도 아는 말이라는데 충격을 받고 공부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기도 하고
결국 벼슬은 말로만 내리고 말았던가요?
사실 사마천도 자기가 안영을 만나면 그의 마부가 되어 채찍 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극찬한 인물입니다.
공자보다 안영을 더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안영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오히려 공자를 능가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긴 모습은 작고 얼굴도 佳人처럼 볼품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언변이나 외교에 있어서는 무척 뛰어난 인물임에도 우리에게는 공자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안영 이야기는 아래 글을 읽어보세요.
안영 이야기
춘추시대 제나라에 관중이 죽은 지 100여 년 후에 안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공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제나라의 영공, 정공, 경공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면서도 여우가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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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 말 중 유명한 말인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남방의 귤나무가 회수(淮水) 이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듯이 같은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공자도 아마 노나라에서는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제나라에서는 귤이 아니고 탱자처럼 영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귤화위지(橘化爲枳)
귤화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방의 귤나무가 회수(淮水) 이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듯이 같은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같은 귤나무를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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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자는 제나라에서 물만 먹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합니다.
왜?
벼슬을 약속했던 제나라 군주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취중 농담을 진담으로 들었단 말인가?"라고
공자에게 했을 테니까요.
제나라 군주는 공자가 범 털인지 알았으나 안영의 말을 듣고 보니 족제비 털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안영도 공자를 주군에게 군자 중 군자라 표현했으니 혹시 공자를 받아들이면 안영 자기 자리가
위태로워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요?
그 속을 어찌 알겠어요? 그쵸?
그러나 노나라의 군주 또한 맨날 옆에서 하지 말라고만 하는 공자가 예쁘지만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바른 소리라 좋아했지만, 고운 노래도 한두 번이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견제구만 던집니다.
공자 또한 군주라는 자가 나라 다스리기에 관심을 두지 않자 과감히 정계를 은퇴하고
55세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주유천하 합니다.
그렇잖아요?
자꾸 옆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며 딱딱한 말만 하면 군주인들 좋겠어요?
왕의 3대 엔터테인먼트가 술과 여자와 사냥인데 공자가 그걸 모두 하지 말라고
옆에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친구도 별로 없습니다.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 하잖아요.
그렇다고 너무 혼탁해 권력의 핵심에 서서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나중에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더군요.
앞으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면 기억난다고 할 때까지 감옥에 넣어두던지...
14년이나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미 공자는 딱딱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버렸습니다.
공자는 결국, 정치가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한 삶을 산 셈입니다.
그때 제나라 군주가 공자에게 벼슬을 주겠다는 자리에서 "농담일세~ 이 사람아!"라는 말을 들을 때
佳人이 옆에서 물어보았습니다.
"공자님~ 왜 공자님만의 멋진 말로 새로운 말을 하시지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셨어요?"
그러자 공자님이 "답답한 佳人아! 그게 바로 내 콘셉트인 게야~ 내가 늘 이야기했던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아니더냐~
난 새로운 것보다 늘 남이 했던 말이나 경험을 이야기하였던 게야! 알겠느냐?"
그랬습니다.
리바이벌이던 리모델링이던 공자께서의 늘 옛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시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인생철학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 맞나 봅니다.
佳人은 평생을 "아니면 말고!"라는 무책임한 인생철학으로 살아왔는데...
공자님~ 공자님! 우리 공자님~ 아무리 공자님 콘셉트가 그러시더라도 그래도 왜 그러셨어요~
공자가 잠든 곳 바로 앞에도 제법 큰 묘가 하나 있습니다.
이 묘의 주인이 단지 공자의 손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서도 대접받고 있는 공급(孔伋)의 묘입니다.
자는 자사(子思)로 전국시대 초기에 제법 이름을 날린 철학자라고 하네요.
공자가 만든 유가학파의 전승자로 그의 생각은 후일 맹자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공 씨 가문에서는 공급을 삼세조(三世祖)라고 부른다 합니다.
그러니 여기 꽁린에서는 넘버 3이라는 말일 겁니다.
타향살이도 힘이 들지요.
68세가 되자 공자는 귀향을 결심하고 고향에서 논술이나 가르치자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논술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나 봅니다.
귀향 후 잘 나가는 서당 생활에 잠시 즐거운 나날을 보냈으나 아들과 수재자가 세상을 등지는 일이 생기고
마음 병이 생기니 공자 자신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렇게 공자도 갔습니다.
취푸의 꽁린에 가면 이렇게 요란스럽게 세상을 살았던 사람도 갔고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며 살았는지
모르는 사람도 공자의 후손이라는 공 씨 성 하나 때문에 여기 꽁린에 한자리 차지하고 누워있습니다.
장자는 넘버까지 부여받고 누워있습니다.
여기로 오는 길에 보았던 공자 후손 직영점이라는 가게 주인도 죽으면 여기에 묻히려나요?
그리고 아까 결혼식 올리던 신부 孔淑貞씨는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논어라는 책은 공자가 주유천하를 할 때와 귀향 후 제자와의 문답, 그리고 제자 간의 논의했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라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만세 사표라는 공자의 삶도 그리 평탄한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과대 포장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佳人은 제자가 없으니 문답을 모아 놓을 수는 없는 일이고 여행기라도 쓰고 그 댓글과 답글이나
남겨 놓으면 훗날 그게 논어 뺨치는 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뺨치는 거 그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모니터를 그대로 손바닥으로 치면 되걸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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