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도 한때는 매우 아팠을 겁니다.

2012. 7. 16.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이제 산꽁 중 꽁린을 대강 둘러보았습니다.

다시 걸어서 꽁먀오(孔廟 : 공묘)로 가렵니다.

아까 들어올 때 비가 약간씩 내리더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 비가 그쳤습니다.

역시 공자가 알아서 해결해 주네요.

중국에서는 죽은 사람의 묘에 林을 붙이는 경우는 여기 공자의 묘와 관우의 묘뿐이라 합니다.

공자와 관우는 인구 대국이라는 중국에서도 지금까지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성공한 사람인가 봅니다.

 

복숭아나무 아래 앉아했다는 도원결의고 나발이고...

형님 동생이니 주군과 신하 관계라도 다 소용없습니다.

관우도 죽어 혼자 호강하고 있습니다.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한 세상을 풍미했던 유비도 장비도 제갈량까지도 개털입니다.

혼자만 관림이라는 묘를 쓰고 존경받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의 튀어나온 부분은 암살하려던 자의 얼굴이라 하네요.

공자를 찾아온 황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나무가 알아서 가두어 두었다고....

공자가 나무를 시켜 그랬을까요?

생긴 모습을 보고 후일 말을 꾸며내는 중국인의 생각은 귀엽기까지 합니다.

 

꽁먀오로 가기 전에 먼저 공자의 무덤 앞에 세워둔 비석을 보고 가겠습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고 쓴 글이 보이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비석은 여러 군데가 깨어져 무척 흉물스럽게 보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그렇다고요?

아까 들어오며 벼락을 맞아 벌떡 일어선 벌떡석을 보았는데 여기의 비석은 벼락이라도 맞아

훌러덩 자빠지기라도 하며 박살이라도 났을까요?

 

여기도 얼마 전 신중국이 생기며 붉은 광기가 세상이 휩쓸 때 해머로 휘둘러 깨어버린 현장입니다.

후손이 깨져버린 비석을 모아 숨겨두었다가 다시 퍼즐 맞추기 하듯 재조립하여 세워두었습니다.

붉은 광기는 이렇게 세상을 모두 엎어버리고 싶었나 봅니다.

그들 눈에는 공자고 나발이고 없었던 겁니다.

 

찾지 못한 조각은 보기 흉하게 시멘트로 덧발라 놓았습니다.

그들이 해머로 휘두르며 깬 것은 비석이 아니라 정신이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모두 그들의 조상인 공자가 후세 교육을 잘못시킨 탓이 아니겠어요?

파괴란 재창조를 위한 파괴가 아름답지 과거를 단절하는 파괴는 단지 몰상식한 파괴일 뿐이 아닐까요?

 

이들은 또 공자의 무덤마저 훼손했다 합니다.

그때 무덤 안에는 유골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워낙 오래된 무덤이라 모두 흙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원래 시신도 없이 봉분만 만들어 놓았는지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고 하네요.

 

꽁린을 더 돌아보려고 해도 아직 보지 못한 중요한 곳이 두 군데나 더 있기에 아쉽지만, 발길을 돌립니다.

오래된 나무가 하늘을 가린 이곳 꽁린은 시간이 넉넉하면 산책하기는 그만인 곳이네요.

뒤로 난 길을 따라 걸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봐야 무덤만 보겠지만...

 

취푸인 곡부는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시절에는 수도였다지요?

그래서 시내를 다니다 보면 옛 성벽이 아직 남아 있어 마치 살아있는 공자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금의 곡부는 공자 때문에 먹고사는 동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죽은 공자가 산 후손들에게 아직도 도움을 주고 있다니...

그래요.

佳人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공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다는 일은 얼마 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공 씨 일가가 살던 개인 저택인 공부(孔府)와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그리고 공 씨 일가의 무덤이 있는 공림(孔林)이 있답니다.

쓰리 고면 흔들고 바가지를 씌운다고 이곳에는 쓰리 공인 산꽁(三孔)이 있네요.

 

중국에서는 얼마 전에는 공자도 폐기 대상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수천 년을 이어온 공자에 대한 사랑도 한때 맥이 끊어지며 암흑기에 접어든 적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다시 제사 지내는 방법도 몰래 우리나라 성균관에 와 배워 가기도 했잖아요.

 

공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공자의 후손이 살았다는 대저택 공부와 가까이 붙어있어

한 번에 돌아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묘가 있다는 공림은 조금 떨어져 있지만, 걸어가다 보니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래도 모두 걸어 다닐 정도로 가까이 있습니다.

 

공묘는 2천 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가 살아있고 규모가 웅대할 뿐 아니라 그 건축물의 기세 또한 웅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제일 묘'라고 불리고 있답니다.

이는 중국의 2대 고건축 군에 든다네요.

 

아홉 번 문을 들어가는 9진 정원으로 북경의 자금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고대 건축물입니다.

예전에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황제나 고급 관리만 아홉 번의 문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태안의 대묘(岱廟)와 함께 중국의 3대 고대 건축물에 들어간다 합니다.

그 속에는 한위 육조시대의 귀중한 석각도 22점이나 있다고 하네요.

 

공묘는 기원전 노나라 애(哀) 공이 공자가 죽은 후 이듬해 공자의 집을 개축해 묘당을 만듬으로

지금까지 오랜 세월 이 자리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묘와 공부로 가기 위해서는 위의 사진처럼 궐리(闕里)라고 쓴 패방을 지나게 되네요.

공자님이 계셨던 곳이라 궁궐 마을이라는 의미로 궐리라 하나 봅니다.

 

100여 m의 길이 있고 좌우로 잣나무가 열병하듯 가지런히 서 있어

마치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듯합니다.

곡부 성벽 남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공묘 입구에 도착하지만, 옛날에는 황제와 흠차대신만

남문을 열고 참배했다고 합니다.

그럼 나머지 민초는 어디로 드나들었을까요?

개구멍이라도 있었나요?

오늘 佳人이 황제가 걸어 들어간 아홉 개의 문을 통과하며 들어가 보렵니다.

함께 들어가실까요?

 

이렇게 세상은 힘 있는 자를 위해 모든 편의시설을 만들었나 봅니다.

자...

이제 들어갑니다.

제일 앞에 보이는 입구에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고 새긴 석패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금성옥진...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참 좋은 말이지 싶습니다.

이제 공묘 안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 보려고 노력하지만...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씨가 그리 예술적이지는 못한 듯 보입니다.

또 트집부터 잡고 들어갑니다.

도찰원 우부도위사 누가 썼다고 어쩌구저쩌구 왼쪽에 있나 보네요.

이 패방은 명나라 가정황제 17년(1538)에 세웠다고 하니 벌써 500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네 개의 기둥을 만들어 그 위에 이름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조천후(朝天吼)라는 동물이 냉큼 올라가 앉아 있고

그 사이를 연결하여 지붕을 얹어 놓았습니다.

이 조천후라는 동물은 간밤에 일어났던 일이나 억울한 사연을 모두 하늘에 꼬여 바치는 일을 하는 동물로

지난밤 나쁜 짓을 하신 분은 佳人처럼 이곳을 지날 때 돌아가거나 못 본 척 외면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저 녀석이 언제 알고는 하늘에 꼬여 바칠지 모릅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구면인 셈이죠?

천안문 광장에서 본 화표 위에 냉큼 올라앉아있던 허우라는 녀석이잖아요.

용이 외박하여 바람피운 후에 데려왔다는 용과는 닮지도 않은 개를 닮은 용의 자식 중 한 녀석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정말 용의 자식이지만, 용을 전혀 닮지 않은 개를 닮은 개 같은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절대로 욕한 것 아닙니다.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쓴 글인 금성옥진의 의미는 사상이나 생각을 세상에 널리 알려 존경받게 한다는 의미라

하는데 이 말은 통감 한기 편에 나오는 말로 (唯天子 建中和之極 兼總條貫 金聲而玉振之 以順成天慶 垂萬世之基.)  

그 의미는 "오직 천자는 중화의 표준을 세우고, 겸하여 조관을 총괄하여 金聲而玉振之(금성이옥진지)하여

하늘의 정사를 순히 이름으로써 만세의 기초를 내려야 한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佳人이 쓰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허우라는 개 같은 용의 자식이 네 마리나 냉큼 올라앉아 있네요.

 

옛날에 음악을 연주할 때 금으로 만든 종을 치며 시작해 옥으로 만든 경으로

끝을 맺는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는군요.

예술도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서야...

 

이 패방을 지나면 노란색 글씨로 쓴 영성문(欞星門)이 나타납니다.

欞星門은 공묘의 제1문이나 다름없는 문이라 하네요.

영성이란 글자를 그대로 읽으면 창살을 가늘게 해서 만든 창이라는 말인데 들어가는 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건륭제의 글이라 하는데 건륭제는 간판집 아들이었나 봅니다.

다니다 보니 건륭제는 무척 많은 글을 흘리고 다녔습니다.

무척 글쓰기를 즐긴 황제였나 보네요.

만주족이 오랑캐라고요?

이렇게 황제조차도 공자를 사랑하고 글쓰기를 즐긴 민족인데요?

 

처음 세웠을 때는 명나라 영락제 때 나무로 만든 목조문으로 건륭제가 석조로 바꾸며 글도 남겼다 합니다.

화표석처럼 보이는 기둥 위에는 상상의 동물이 올라가 있지 않고 인물상이 올라가 있는 게 특이합니다.

거기 위에 올라간 사람은 누구슈?

칫! 대답도 하지 않고 먼산만 보고 있네요.

우리를 무시하겠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도 본체만체하면 되니까요.

기둥에 운판도 보입니다.

그 기세가 아주 하늘을 찌르네요.

 

영성문을 지나니 푸른색 글씨의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이 있는데 이 의미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기운이라는

의미니 아마도 공자의 가르침이 이와 같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문마다 글자의 색깔이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패방은 왜 이리도 많습니까?

그 이유가 잘난 공자를 칭송하여 자기 과시를 위한 일이 아닐까요?

공자의 명성에 슬쩍 묻어가기 전략 말입니다.

여기에 방문한 기념으로 佳人도 패방 하나 세우고 갈까요?

 

네 개의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신수가 냉큼 올라앉아 있습니다.

저 녀석도 먼산만 보고 있습니다.

이 패방은 1544년 명나라 가정 23년 산동성 관리 순무사였던 증선(曾铣)이 썼다고 합니다.

덜수가 보니 제법 잘 쓴 글로 보인다 하네요.

 

太和란 천지며 해와 달이고 음과 양을 의미하고 元氣란 우주의 원초적 에너지를 의미하잖아요.

유가 사상에서 말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근원이라 해도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저 문을 통과하면 만사형통할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는 분 모두에게 우주의 기운이 전달되어 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추천이나 댓글 다시는 분에게는 佳人이 특별히 부탁드려 곱빼기로 氣가 도달되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믿어보세요.

안 하시는 분은 기본만 드리겠습니다.

 

그다음에 붉은색 글씨의 지성묘(至聖廟)라고 쓴 지성묘방(至聖廟坊)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이 의미는 성스러운 공자의 사당으로 들어선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명나라 홍치 13년인 1500년에 만든 패방입니다.

지성묘란 박지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선성묘(宣聖廟)라고 새겼다는데 청나라 옹정 7년인 1729년 다시 지으며 지금의 지성묘라고 변경했다네요.

패방 위에 있는 화표 동물은 벽사(辟邪)라는 동물로 요괴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신통방통한 신령스러운 짐승입니다.

이런 신수를 올리는 이유는 위엄을 보이고 권위를 상징함이 아니겠어요?

 

사람이 동물의 힘을 빌려보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옛날 사람은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갔나 봅니다.

내일은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오늘은 문만 보고 왔습니다.

원래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문을 닫고 들어가면 설령 열린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아무것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이곳은 공자를 모신 곳이라 눈과 마음을 활짝 열고 두리번거리며 들러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佳人은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우짜면 좋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