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날로그 세대, 젊은이는 디지털 세대, 그리고 공자는 죽간 세대.

2012. 7. 17.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오늘도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가능하면 佳人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보여 드립니다.

순서도 틀리지 않게 말입니다.

제대로 설명하고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무척 지루하실 겁니다.

설령 조금 틀린 설명이 나오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佳人 수준의 한계 때문이니까요.

왜?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심은 무식한 佳人에 대한 여러분의 탐욕이니까요.

 

 

여기서 잠시 배치도를 보고 갑니다.

너무 문만 보고 들어가다 보니 재미도 없습니다.

글 쓰는 佳人이 재미없는데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야 오죽하겠어요? 그쵸?

우리가 들어가는 방향은 아래 남쪽에서 위쪽인 북쪽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아랫부분을 보시면 정말 많은 패방이 있지요?

그래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들어가 보렵니다.

 

 

공묘, 공부, 공림은 1994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합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 선택이야말로 무척 반겼다 합니다.

중국에서는 사유재산이 금지되어 있고 이를 공 씨 사유재산으로 줄 수도 없고 보존은

해야 하고 그렇다고 정부에서 몰수할 수도 없고 난감해하던 차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일시에 이런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말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절에 나온 말이죠?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요.

뭐 당시에 책의 제본 상태가 지금만 했겠어요?

그리고 종이도 없었던 시절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 죽간에 적은 글을

엮어 만들었다니 쉽게 닳아 끊어졌겠지요.

독서에 힘씀을 일컫는 말이지요.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세사에 있는 말이라 합니다.

"공자가 늘그막에 역경(易經)을 좋아해 여러 번 읽다 보니 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라고

기록되어 후세에 알려진 말일 겁니다.

 

 

채륜이 종이를 발견하기 전에는 종이가 세상에 없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기록을 해야 하거나 책을 써야 할 때 비단이나, 거북의 등어리,

또는 대나무나 그냥 나무에 기록을 남겼답니다.

유럽에도 파피루스가 있었지만, 이집트에서는 워낙 귀하기에 외국으로 나가는 양을

조절하거나 아예 금지까지 함으로 주변에 파피루스를 수입하여 사용하던 나라는

양가죽을 무두질하여 아주 얇고 품질 좋은 양피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잖아요.

만약, 이때 佳人이 태어났더라면 비록 볼품없는 이야기지만,

이런 여행기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중국도 비단이나 거북 등껍질은 비싸고 귀하고 구하기도 어려워 주로 대나무를 엮어

사용한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이용하여 책처럼 엮어 사용하게 되었겠지요.

대나무는 마디가 있어 그것을 잘 다듬고 불에 구운 후 그 위에 글자를 썼다 합니다

 

죽간은 일정한 길이와 폭으로 가지런히 엮어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책(冊)이라는

글자 모양인 셈이니 한자로 책(冊)이란 글자를 보면 바로 대나무나 나무를

일정하게 가지런히 묶은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양의 글자를 쓰기 어려워 대나무 하나에 한 줄이나 두 줄로

10여 자 내외로 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하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대나무가 필요하고 이런 대나무를 가지런히

엮으려면 반드시 가죽끈을 이용했다 합니다.

가죽이 당시로는 제법 내구성이 강해 오래 사용할 수 있어서가 아니겠어요?

이때 사용된 가죽끈을 한자로 위(韋)라고 한다는데  위편삼절이라는 말은 이렇게 만든

죽간을 너무 여러 번 읽었기에 죽간을 연결한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역경을 좋아했기에 한 번을 읽어 기본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두 번째로 읽어

역경의 기본적인 요점을 파악하고 이어 세 번째 읽을 때는 책 속에 담겨있는

정신을 깊이 이해했다 합니다.

여기서 공신인 공자의 암기방법이 나오네요.

우리도 암기과목은 이 방법을 이용하면 어떨까요?

기본 내용 파악, 요점 파악, 담긴 의미 파악의 순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라면 이렇게 세 번만 읽은 게 아닐 겁니다.

죽간을 엮은 사람이 아주 가느다란 불량품 가죽끈으로 엮었다면 모를까...

세 번을 또 여러 번 되풀이했다는 말이겠네요.

 

 

그러나 공자는 겸손하게도 "내가 몇 년만 더 공부했더라면 역경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하니... 공자님! 정말 왜 그러세요~

정말 해도 너무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만약, 이런 마음가짐으로 우리도 공부했더라면 이미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佳人도 유명한 여행작가가 되어있지 않았을까요?

공자의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자도 천재가 아니라는 말이고 노력으로

학문을 이루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고 너무 기죽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공자가 컴퓨터에 대해 뭘 알겠어요?

佳人보다 모릅니다.

 

사진도 포토샵을 이용해 올리고 음악도 올리고...

공자님!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못하시죠?

佳人은 흉내는 내걸랑요.

 

 

공자를 듣보잡이로 만든 중국, 이런 대단한 석학 공자도 세월이 흘러 근세에

들어오며 중국은 홍위병이 난리를 칠 때인 문화 대혁명 때 공자를 배척했다지요?

후손은 대만으로 몸을 피했고 결국 몇 년 전 대만에서 죽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중국에 있는 곳곳의 공자 사당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중단되다 보니

제사 지내는 법도 몰라 우리나라 성균관에 배우러 오는 처지가 되었다 했습니다.

 

 

수천 년간 내려오며 천하의 공자를 웃기게 만든 일은 아마도 중국에서 제정한

공자 평화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였던 류사오보(劉曉波)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공자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자 평화상을 만든 겁니다.

공자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세상은 이게 웬 듣보잡이냐고 했지요.

 

 

중국 정부는 이렇게 공자를 웃기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앞장을 섰다는군요.

물론 민간단체에서 주도하여 제1회 수상자로 대만의 부총통이었던 롄잔(連戰)을

첫 수상자로 결정하고 시상식을 하려고 하였으나 롄잔(連戰)은 시상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답니다.

공자가 환장할 일입니다.

후손이 선조를 자랑스럽게 빛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웃기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공자를 대표하는 말이 바로 "옛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한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에 치중하기보다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을 다시 재조명함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로 생각됩니다.

 

사실 공자 자신도 자신이 지어낸 말이기보다 옛날부터 많이 알려졌거나

쓰였던 말을 다듬고 상황에 맞게 변경하여 후학에게 가르친 분이시지요.

이 말이 바로 낡은 아파트를 리모델링하여 새롭게 사용하자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니 리모델링이야 말로 새로운 창조라는 말이 아닐까요?

 

 

저도 공자께서 하신 말 중의 유명한 말을 하나 인용하렵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知之者 不如 好之者 (지지자 불여 호지자)

好之者 不如 樂之者 (호지자 불여 낙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고....

 

저도 공자처럼 리모델링 한번 해보렵니다.

여행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푸~ 하하하~ 별거 아니네요.

공자님보다 한 술 더 떠볼까요?

 

 

즐기는 사람도 직접 배낭 꾸려서 둘러매고 떠나는 사람만 못하다.

어때요?

공자님도 여행에 대해 잘 모르시겠죠?

 

그래요.

당장 배낭 짊어지고 떠나봐야 여행의 참맛을 알지 않겠어요?

떠날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일입니다.

그냥 훌쩍 떠나야 정말 여행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많아 배낭여행이 두렵다고 생각하시는 우리 님들이시여~

자 우리 모두 서늘한 이번 가을에는 훌쩍 한번 떠나 봅시다.

 

 

그때까지 교육은 국가의 몫으로 교육담당을 국가기관에서 했지만,

공자가 처음으로 민간인의 처지에서 교육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교육의 대상이 주로 귀족들 자제만의 전유물이었는데 일반

평민에게 가르쳤고 그 제자들이 다시 일반인을 상대로 교육을 담당했다는 데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교육 말입니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방법이었으니까요.

이로써 학교와는 다른 지금의 학원 운영도 탄생하게 되었나요?

그럼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대치동 학원가의 원조는 공자였다는 말입니까? 헐!!! 

공자의 가치는 이런 교육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가 태어났던 날을 중화권에서는 스승의 날로 정한 것만 보더라도

공자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나 봅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좌우로 문이 보입니다.

하나는 덕모천지(德侔天地)라고 쓴 문이 보입니다.

명나라 영락 13년인 1415년에 만든 문으로 그 문에 쓴 글의 의미는 현자의 덕이란

세상을 통틀어 칭송할만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글자 크기가 달라 언바란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대편의 또 다른 하나는 도관고금(道冠古今)이라 쓴 글입니다.

이 또한 현자의 말은 세월과 관계없이 위대하다는 칭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자가 걷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말일 듯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진리는 모두 공자에게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기둥 아래 돌로 만든 신수가 보입니다.

사자(狮), 용(龍), 천록(天鹿) 등 네 마리의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을 돌로 새겨놓았습니다.

물론 이런 신수의 의미는 악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마음일 겁니다.

아무리 상서로운 동물로 만들어 보호하려고 해도 홍위병의 뻘 짓은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무식하면 제일 용감하다는 말이 생겼지 않았을까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두보가 그랬나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고요.

중국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에 처음 등장한 말이라 한다네요.

원래는 장자(壯者)가 혜시(惠施)의 집에 가서 책이 많은 것을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이라고 하고요.

장자와 혜시라면 우리가 이화원에서 본 지어교(知魚橋)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에 등장했지요.

 

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수레에 죽간으로 만든 책을 가득 실어봐야 그 내용이 얼마나 되었겠어요.

두보 시대에는 이미 종이가 발명된 후라 그렇다 하더라도 장자가 살았던 시기는 죽간에 주로 썼을 겁니다.

다섯 수레의 양은 佳人의 이번 여행기만도 못했을 텐데요.

 

두보는 공연히 폼 잡으려고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우리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남아수독오거서는 비교할 수 없는 말입니다.

 

지금처럼 정보화 시대에 대나무의 글과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배우고 있습니다.

만약 공자께서 지금 세상에 오셨다면 정보의 홍수로 무척 혼란을 겪으셨을 겁니다.

공자님도 아마 그렇지 않겠어요?

디지털 시대에 공자는 죽간 세대, 우리는 아날로그 세대...

젊은 사람은 디지털 세대.

 

그런데 이거 아세요?

아날로그 세대가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세대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끔찍하게도 어렵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