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린(孔林 : 공림)부터 보렵니다.

2012. 7. 12. 08:00중국 여행기/산동성(山東省)

11월 7일 여행 28일째

 

오늘 일정은 취푸의 핵심인 산꽁(三孔 : 삼공)을 모두 보려고 합니다.

삼공(三孔) 중 우선 먼저 제일 멀리 있다는 공자의 묘가 있는 꽁린(孔林 : 공림)부터 가보려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젠장... 비가 내립니다.

내일 태산을 취소하려고 생각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중국에서 죽은 사람에의 무덤을 林으로 부르는 곳이 이곳 공림하고 관우의 무덤 관림 두 곳이지요.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비옷 여럿 나란히 타고 갑니다.

파란 비옷 깜장 비옷 찢어진 비옷 널따란 출근길에 비옷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갑니다.

앗! 오토바이도 있군요?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정겨운 동요가 생각납니다.

 

여기 사람은 대부분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기에 우산보다는 비옷을 입고 다니나 봅니다.

주변은 산이 보이지 않고 평야 지대라 자전거를 타고 생활하기는 썩 좋은 조건인 듯합니다.

여행 중 비를 만나는 일은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계획대로 오늘 일정을 진행해야 하겠어요.

비가 온다고 여행을 쉰다는 일은 우리 부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지도에서 대강 공림을 가는 방향을 알아두었기에 그 방향인 북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있는

노선표를 보니 공림이라는 정류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낙에게 물어보니 뭐라고 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다만, 멀지 않다고 서너 정류장 가서 내려서 다시 걸어가야 한다는 듯합니다.

 

이럴 때는 우리 부부가 잘하는 게 있잖아요.

무조건 걷는 겝니다.

어차피 오늘 밤에도 이곳에서 하루 더 자고 가는데 시간이 넉넉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부부는 걷기 시작합니다.

걸어가며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인사하는 일도 즐겁습니다.

이게 바로 여행이니까요.

 

잠시 걷다 보니 방금까지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오히려 날씨도 시원해 상쾌합니다.

꽁린으로 가는 길은 노나라 성벽을 지나며 아주 잘 관리된 길이었습니다.  

대성지성선사공자신도(大成至聖先師孔子神道)라는 비석이 있네요.

아마도 공자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죽은 공자 만나기 위해 산 사람이 가는 길이라 무척 잘 만들어 놓았네요.

 

만고장춘(萬古長春)이라고 쓴 멋진 패방도 보입니다.

만고장춘이나 만고유방이나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석고에는 기린이 조각되었고 그 위는 사자가 보입니다. 

기둥에는 용이 꿈틀거리네요.

이 패방은 청나라 옹정 10년 7월에 만든 것이라 합니다.

글도 옹정이 쓰지 않았을까요?

만주족인 청나라가 공자에 대한 정성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지극정성이었습니다.

공자 마케팅 때문에 청나라는 이웃마을 사람이 만든 원나라보다 3배나 더 오래 중원 경영에 성공했을 겁니다.

 

꽁린으로 가는 길은 가운데는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신도(神道)라 이름 지었나 봅니다.

아주 오래된 듯한 향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석축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있네요.

 

어디 나무만 세월의 무게에 힘겨워하나요?

공자 후손이 직영한다고 한글로도 광고했지만, 공자도 유효기간이 지났나 봅니다.

페인트값도 없어 쇠마저 녹아내리는 중입니다.

아무리 공자 후손이라도 장사에 재능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조상 팔아 돈 좀 벌어보려고 했지만, 조상 덕을 보기는 글렀나 봅니다.

 

아래 사진은 아마도 오늘 결혼식이 열리나 봐요.

그런데 신부가?

네~ 바로 공자의 후손인가 봐요.

공숙정씨!

행복하세요~

위에 장식한 용과 봉황이 뱀과 닭으로 보이네요.

그래도 행복해야 혀~

 

그래요.

세상에 모두 아는 만물박사는 없나 봐요.

어느 날, 제자가 공자에게 농사에 관한 질문을 하자 공자는 "나는 농사에 대하여 늙은 농부만도 못하다."라고 했답니다.

아무리 공자의 후손이라도 조상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았나 봐요.

여기 가게를 연 후손이 공자에게 장사에 대하여 질문을 했다면 공자가 뭐라 했을까요?

"나는 장사에 대해 중국인을 상대로 명동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한국 사람보다 못하다."라고 했을 겁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佳人처럼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드디어 꽁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이라 들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은 현지 가이드입니다.

중국을 구경 다니다 보니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입구에서 한 명의 가이드를 대동하고 설명을 듣더군요.

물론, 가이드 비용은 개인별로 나누기하겠죠.

특이 취푸의 산꽁 입구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국어를 모르는 우리 부부에게는 우이독경이 아니겠어요?

 

취푸의 문표값입니다.

연표라고 산꽁 모두 들어가는 통합표가 150원이고 각각 표를 따로 사면 가장 많이 가는 꽁먀오가 90원,

그 옆에 있는 꽁푸가 60원 그리고 제일 멀어 잘 가지 않는 공자의 묘가 있는 꽁린이 40원입니다.

결국, 꽁먀오와 꽁푸 들어가는 입장료가 합하여 150원이니 그냥 연표를 사면 덤으로

40원짜리 꽁린도 볼 수 있다는 말이네요.

그러니 공자의 시신이 있는 무덤인 꽁린은 덤이라는 말입니다.

죽고 나니 공자도 별수가 없네요.

마트에서 하는 2+1 행사에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공자의 묘를 구경하는 값은 딱 50% 할증에 해당하는가 봐요.

 

그래도 공자가 살았던 곳이라 뤄양의 용문석굴과는 달리 나이 든 사람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되네요.

뤄양의 무식한 사람과는 다른 효를 제법 아는 동네로군요?

우리 부부는 물론 연표를 샀습니다.

70살이 넘으면 무료라네요.

 

이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도 없는 아주 잘 정돈된 멋진 길이 앞에 펼쳐져 있네요.

이곳이 얼마나 넓은지 경내를 운행하는 전기차가 보입니다.

물론 우리 부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경내 관광차가 다니는 길인가 봅니다.

물론, 모두 돌아보면 무척 좋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자부터 그 모든 후손의 족보를 따져가며 돌아볼 일이 아니라면,

노란 원으로 표시한 곳만 돌아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전부 가봐야 사실 보는 것은 무덤뿐입니다.

아무리 꽁씨네 집안이 유명하다 해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꽁 서방을 모두 만날 필요가 있겠어요?

공자와 넘버 2와 넘버 3가 있는 노란 선 안만 보고 나오렵니다.

 

우리 부부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베이징에서 왔다는 의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영어도 잘하는 은퇴한 노인으로 우리 부부와 함께 이곳을 돌아보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울 마눌님은 벌써 그 의사와 말을 트고 들어오고 있네요.

저렇게 함께 구경한다는 의미는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아주 잘하는 가이드를 대동하고 걷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의미고 외국 여행에서 안전하고 즐겁게 여행하는 방법 중 한 가지가

현지 여행자와 함께 구경하는 일일 겁니다.

우리 부부는 넉살 좋게 자주 접근해 말을 트고 다닙니다.

 

앞에 커다란 문이 나타납니다.

꽁린의 두 번째 도문(道門)인 지성림(至聖林)이라는 문입니다.

제일 처음에 세워진 때는 元代라고 하니 무척 오래되었네요.

 

원나라도 공자 마케팅을 했지만,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고향 앞으로 갔으니

중원을 경영하는 데 실패한 정권이지요.

그게 융화를 멀리하고 지배만 하려고 했지 않나 싶어요.

소수의 이민족이 다수를 지배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후 명나라 홍치 7년인 1494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고 하네요.

지금은 꽁린의 담장이 연결되어 있는데 원래 노나라 도성의 성벽을 동서로 건설한 것으로

 북문인 용문 자리라 하는데 문의 자태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꽁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꽁린 안에는 공자를 위시해 그 후손의 묘가 3.000기가 넘고 세워진 비석만 4.000기가 넘는다 합니다.

귀한 수목이 9천 그루가 넘고 심어놓은 수목은 모두 10만 그루가 넘게 심어져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 꽁린은 공자님 후손의 가족묘라는 의미이기도 하네요.

 

사실 신중국도 처음에 이 지역을 관리하려고 생각했지만, 중국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잖아요.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다 합니다.

국유화를 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이 지역은 중국의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지 공자의 후손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인정받은 곳이잖아요.

그러니 이탈리아 속에 바티칸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마오쩌둥이 강심장이라도 해도 국유화한다는 일이 무척 찝찝했을 겁니다.

그래서 국유화를 하여 관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고

중국의 모든 인민이 생각하는 공자의 재산을 함부로 몰수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거주춤하던 그러던 차에 유네스코에서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게 되자

얼씨구나 좋다고 했을 겁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봉분은 모두 공자의 후손이지만,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무덤입니다.

장손만 이곳에 넘버를 붙여놓아 그나마 몇 대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제일 뒤에 가면 78대손까지는 묘소 번호가 붙어있다 합니다.

너무 많은 후손 때문에 공자의 후손이라 모두 대접받는 것도 아닌가 봅니다.

 

공자가 밤에도 점잔 빼는 공자였을까요?

밤에는 덜수처럼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그런 사내였을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후손이 번창해 여기에 누워있잖아요.

끙!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꽁린(孔林 : 공림)은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큰 가족묘지가 아닐까요?

그런데 면적만 컸을까요?

이곳에 묻힌 가족 숫자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묻힌 곳이잖아요.

좌우지간 공자는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네요.

 

이 여행기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엉뚱한 상상만으로 다니며 생각했던 것을 모아 쓰는 여행기입니다.

오류도 많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쓰기에 정통 여행기가 아니오니 미리 양해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호환 마마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