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0. 08:00ㆍ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오늘은 어제에 이어 향산사를 더 산책해 보렵니다.
아무래도 향산사는 백거이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연을 맺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호가 향산거사이며 그가 말년에 향산사를 보수하는데 큰돈을 내놓았다 하고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이 대부분 백거이를 생각하며 찾기 때문일 겝니다.
사실 향산사는 크게 볼만한 사찰이 아닙니다.
그러나 of the 백거이, by the 백거이, for the 백거이라 해야 하나요?
먼저 그가 지었다는 시 한 편 보고 갑니다.
이 시는 그가 벼슬길에 있으며 느낀 이야기를 시로 나타낸 것이랍니다.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세상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
위로는 그물에 걸릴까 근심하고 아래로는 함정에 빠질까 염려한다.
언제나 천지가 좁다고 느끼면서 심신의 편안함을 맛보지 못한다.
20년 세월 헛되이 보내고 나니 턱밑에는 흰 수염만 생겼구나.
향산 거사!
佳人거사도 턱밑에 흰 수염이 이미 났수~
그런데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하 수상합니다.
특히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보니 그게 세상의 그물에 걸려들고 함정에 빠진다고
백거이는 이야기했지만, 전혀 아닌가 봐요.
민초가 표를 주지 않아도 지들끼리 순번 정해 당선되었다고
그것도 벼슬이라고 아무나 개기면 큰일 나겠죠?
백거이는 이미 다섯 살 때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고
29살에 진사과에 최연소로 합격해 자랑하고 싶어 시안의 대안탑 안에 글을 남겼으며
세상을 살며 거칠 게 없었던 백거이도 항주 지사로 제수되어 가는 도중 말 위에서
문득 자신이 느꼈던 일을 쓴 시라 합니다.
개념 있다는 의미는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천하의 백거이도 벼슬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그대로 표현한 게 아닌가 생각되지만, 佳人이야 당연히 그런 일을
해보지 못했기에 알 수 없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장치판을 보니 자기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그물에 걸리고
남의 핑계만 대고 웃기고 자빠졌더군요.
무능하면 깨끗하기라도 해야 하고 더러우면 유능하기라도 해야 하건만 하는 짓이
하도 가관이기에 한숨만 나오는데 시거든 떫지나 말지...
향산사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닙니다.
그런데 비석 하나가 비각 아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비각을 세워 보호한다는 의미는 보통 비석이 아니라는 말일 겁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비석을 누각만으로 부족했는지 유리로 가려놓아
아마도 훼손 방지를 하나 봅니다.
이 비석이 바로 건륭어비라고 건륭황제가 남긴 글인가 봅니다.
향산사를 빛낸 또 한 사람이 바로 건륭황제라는군요.
그러니 1750년 건륭 15년 어느 가을 건륭황제가 낙양의 용문석굴로 순유를 왔다 합니다.
말이 좋아 순유지 사실 패키지로 놀러 온 게 맞는 말일 겁니다.
이때 건륭제는 이곳에 시를 두 수 남기며 용문의 열 개 사원 중
향산이 으뜸이라고 칭송하였다 합니다.
뭐 그냥 추천서 써달라고 하면 좋은 말로 하기는 하죠?
이 시를 후세 사람이 비석으로 남겼나 봅니다.
오늘 佳人도 향산사에 왔걸랑요?
글 하나 남겨도 좋겠습니까?
낙서한 휴지는 돌아갈 때 쓰레기통에 꼭 버리고 가라고요?
청나라 고종인 건륭이 이곳 향산사 돌계단에 도착해 한 발자국씩 계단을 오르며
흥이 났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점심식사를 마치고 낮술이라고 탁배기라도 걸치고 오다 보니 작고
앙증맞고 공기마저 신선하고 조용한 향산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시상이 떠올라 향산사를 칭송하는 두 수의 시를 즉흥적으로 지었다 합니다.
제법 풍류가 뭔지 아는 멋진 친구였나 봅니다.
사실 佳人도 이런 곳에 오르면 공연히 글 하나 남기고 싶습니다.
건륭제는 이곳 향산사와 건너편의 서산 사이로 흐르는 이하의 아름다움에 빠져
신선놀음하며 말년을 보낸 백거이를 생각하며 시를 지으며 마지막 구절에 백거이가
자기 인격 완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재능이 자기보다 월등함을 이야기하며
백거이의 이야기에 감동받아 자기가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썼다고 합니다.
(慮輸白少傳, 己著祖生鞭.)
뭐 佳人의 생각도 모두 건륭황제와 같은 생각이지만, 사는 방법은 다르네요.
쉽게 이야기하면 위대한 황제가 겸손을 떨었다는 말이 되겠네요.
시뿐 아니라 여기에 쓴 글자는 행초서의 예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글자라 합니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구로당(九老堂)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구로동이 아니고 구로당이라 합니다.
미타보전 앞에서 보면 지하에 있고 왼쪽으로 돌아와 보면 1층입니다.
백거이와 그 일행 아홉 사람이 그 당시에 카페를 하나 만든 모양입니다.
구로회라는 카페 말입니다.
구로회란 아홉 늙은이 모임이라는 말일 겁니다.
말이 좋아 카페지 사실 경로당이 아니겠어요?
백거이가 카페지기라고 제일 가운데에 전신상으로 만들어 주었네요.
오른쪽을 보면 4명의 현인이 있습니다.
이 현인들은 전신상이 아니고 그냥 여권용 사진 정도로 만들었습니다.
주로 여기에서 만나 술도 한 잔 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도 부르고...
오잉? 이게 음주가무지요? 그쵸?
주색잡기 중 색만 빼고 인가요?
왼쪽으로도 또 4명의 현인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백거이가 가운데 서 있으니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셨나요?
그냥 쉽게 생각하면 경로당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백거이와 그 백수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두 백수 거사 놀이에 세월 가는 지 몰랐을 겁니다.
佳人도 오랜 백수생활을 보내다 보니 그것도 빠져들면
도낏자루 썩는지 모르게 세월이 지나가대요.
이곳은 늙은이들 소일하던 곳입니다.
모두 젊은 시절 한가닥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나이가 들면
이렇게 골방 늙은이가 되는 게 현실이지요.
그러니 이 노인네들은 그냥 경로당 화투나 치지 않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시도 지으며 제법 기품 있게 놀았던 모양입니다.
회원 명부와 증명사진을 모두 한 사람씩 올려드려야 하지만, 지면 관계상 줄입니다.
백거이(772-846)의 자는 낙천이고 말년에 향산사에 은거하며
호를 향산 거사라 불렸다 합니다.
당나라 시기의 위대한 자연주의 시인의 대표주자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향산사에는 18 나한을 모신 나한전도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전면으로 8 존, 그리고 좌우로 각 5 존씩
모두 18 나한을 모셔두었습니다.
나한은 아라한이라고도 한다는군요.
보통 16 나한이나 500 나한을 주로 만들어 놓지 않나요?
이곳도 모두 올려드리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도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이제 향산사를 모두 둘러보고 백거이가 안식을 취한다는 백원으로 가봅니다.
백원으로 가는 도중 오른쪽으로 동산삔관이라는 숙소가 있습니다.
경구 안에 누가 배짱 좋게 영업할 수 있답니까?
내 바로 인민을 하늘처럼 모시는 나리님들의 숙소라 합니다.
여기도 나리나리 개나리가 활짝 피었나 봅니다.
돈을 내야 들어오는 풍경구 안에 나리님을 위한 숙소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불철주야 어떻게 해야 인민이 행복할까를 고민하다 보니
이런 곳에 숙소를 마련하고 연구하나 봅니다.
백거이가 놀았다고 나리들이 여기서 논다고 백거이가 된다면
佳人은 학우선 하나 사 들고 다니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백거이를 더욱 백거이 답게 만든 시가 비파행이라는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혹시 비파행(琵琶行)이라는 글에 관심이 있으시면 클릭해 보세요.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http://blog.daum.net/nhk2375/7164424
琵琶行(비파행) - 백거이(白居易)
(사진은 뤄양 용문석굴의 봉선사 입니다.) 琵琶行(비파행) - 백거이(白居易) 潯陽江頭夜送客(심양강두야송객) : 심양강 어구에서 손님을 보내는 밤 楓葉荻花秋瑟瑟(풍엽적화추슬슬) : 단풍잎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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