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18. 08:00ㆍ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용문석굴에는 참 많은 석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석굴은 많은 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경할 수 있는 석굴은 제법 유명한 몇 곳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듯이 마치 비둘기집처럼 생겼기에 석굴 대부분은 올라갈 수도 없고
만든 길을 따라 구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이곳도 사람 손에 의해 또 자연적으로 훼손이 진행 중입니다.
부처도 자신의 모습이 훼손 중이지만,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렇지요.
칼파라는 세월 속에 세상의 모든 것이 티끌이 되어 평평해지지 않겠어요?
부처가 사라지면 백마 탄 초인 칼키가 온다고 했나요?
예전에 씨엠립을 갔을 때 앙코르 제국이 패망할 때 씨엠립을 침공한 태국의 시암족이 앙코르 제국이 만든
석상 대부분을 훼손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을 지키던 수호신은 머리를 잘라버리고 멋지고 날렵하게 생겼고 엉덩이마저 섹시한 사자상은 아름다운 히프는
남겨두고 얼굴과 꼬리와 숫놈의 주요 부분을 모두 파괴해 버렸더군요.
사진을 보시면 미스 라이언이 섹시한 엉덩이만 보여주며 부끄러워 돌아앉았잖아요.
세상에 저렇게 섹시하고 예쁜 엉덩이를 지닌 사자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게 뭐 앙코르의 정기를 끊는 일이라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
그게 효과가 있었나요?
결국, 동남아시아를 호령했던 앙코르 제국은 그 후 시름 거리며 앓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네요.
위의 사진도 엉덩이와 발 네 개만 남기고 모두 부숴버렸습니다.
심바도 무파사도... 그리고 날라도 모두 사라지는 중입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을 보시면 벽감 속에 조각한 부처상을 모조리 긁어내어 흉한 모습으로 남아있더군요.
그러나 그 아래 있는 요상한 자세의 비천상이라는 압사라는 그대로 두었네요.
부처가 압사라보다 격이 떨어지나요?
앞으로 모든 나라는 전쟁을 하더라도 문화재는 훼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그 나라만의 유물은 아니잖아요.
이제 세계화 시대에 서로가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할 세계인의 문화유산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왜?
혹시 코를 떼어 갈아먹으면 득남을 한다거나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라도 있었나요?
덜수처럼 밤에 식은땀이나 흘리고 눈치나 보는 신랑이 있었나요?
가장 최근에 훼손된 유적 중의 압권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이죠.
2001년 탈레반 정권에 의해 파괴된 높이 53m의 대단한 석불을 폭약을 설치해 1초 만에 가루로 만든 일...
정말 같은 세상에 머리를 하늘로 두고 걷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세계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1.500여 년이나 된 세계유산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릴 수 있는
그들의 머릿속이 궁금합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남은 유산마저 파괴한다면 세상은 파괴의 연속입니다.
차라리 그런 결정을 하고 부순 사람의 머리를 부수고 싶습니다.
그게 역사인가요?
그러면 세상에 무엇이 남을까요?
그런데 유적을 파괴하는 행위나 없던 역사를 날조하는 것이나 모두 야만인이나 하는 일이잖아요.
뭐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만리장성을 엿가락 늘이듯 하는 일은 역사의 날조는 아니겠죠?
그런 일을 문명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부끄러워서 하겠어요.
佳人이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요?
만리장성이라는 명칭을 대한민국 국토지리 정보원에서 붙인 이름입니까?
중국에서 정한 것 아니예요?
그런데 왜 세월이 흐르며 만리가 이만리가 되고 오만리가 되지요?
이제 동산 석굴이 모여있는 언덕을 내려가 이하 강이 흐르는 길로 내려갑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다 했던가요?
백거이가 이 모습에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무측천도 건너편 서산 석굴을 바라보며 시화대회도 제법
여러 번 열었다 합니다.
풍류와 멋을 아는 여인이었나요?
그러나 오늘처럼 가랑비가 내리고 운무가 자욱한 날은 풍경조차도 역시 개털입니다.
백거이는 이런 모습조차 사랑했나 모르겠지만, 佳人은 그리 못합니다.
그 사람은 이곳에 죽치고 살았으니 이 모습도 색다른 모습이라 좋아했을 겁니다,
그러나 평생 한 번 비싼 여행비를 쓰며 여기를 온 우리 부부에게는 이런 날씨가 개뿔도 아니네요.
동산 석굴 아래 간경사(看經寺)라는 석굴이 있습니다.
간경사라는 이름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바로 앞에 흐르는 이하라는 강을 건너다 강에 빠뜨렸다가
이곳에서 말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이 석굴은 무측천이 당나라 고종을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말년에 병약했던 지 서방 끔찍하게도 사랑했나 봅니다.
제법 석굴의 규모가 큽니다.
석굴 입구 양쪽으로 또 역사가 한 손을 치켜들고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과도하게 쓰며 바라봅니다.
왼쪽 역사는 머리에 보관을 썼으며 그 기세가 역발산기개세라고 되어 있네요.
쟤들 원래 저런 모습이 아니었나요?
이 모습이 쿵후의 동작 중 하나라 하네요.
석굴 앞으로 횡목을 대고 지붕을 만든 2층 건물이 있었고 그곳에 청나라 시기에 간경사라는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하여 간경사라 부른다 합니다.
석굴 앞이 새까매진 것으로 보아 혹시 화재로 소실되지나 않았나 모르겠네요.
쇠창살로 가려진 석굴 안을 들여다봅니다.
마치 무슨 설치예술작품을 보는 듯 석굴 한가운데 좌대 하나 달랑 놓고 그 위에 석불을 앉혀놓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우실까?
그러나 천장에 보이는 연화 문양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고귀한 자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쇠창살로 앞을 막아놓아 마치 감옥에 부처를 감금해놓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은 원래 있었던 본존불은 사라지고 지금 다른 곳에 있던 석불을 대신 가져다 놓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남의 집에 집주인을 대신해 집을 봐주는 중인가 봅니다.
아닌가요?
임대해 사는 중인가요?
왼쪽을 바라봅니다.
석굴은 천장에는 연화 문양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벽으로 내려오며 작은 부처를 조각하여 새겨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으로 내려오면 많은 전법나한(傳法羅漢)이라고 부르는 나한상을 만들어 놓았네요.
여기에 새겨진 나한은 당나라 때 만든 나한 중 가장 아름답다 합니다.
가운데로 돌려봅니다.
이 석굴은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신라 시대에 만든 석굴암보다 3-40년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었다 합니다.
우리 석굴암도 주위를 보살상으로 배치했지만, 여기는 나한상으로 배치한 게 다르네요.
오른쪽도 바라봅니다.
이렇게 좌로부터 우로 돌아가며 모두 29 존의 나한상이 있습니다.
나한상의 키는 1m 75cm에서 1m 80cm에 이른다 합니다.
아마도 이 정도의 신장이 당시 사람들이 이상형으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수나라 때 역대법보기(曆代法寶記)에 등장하는 선종(禪宗)의 서토 29조(西土二十九祖)를 새긴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 새겨진 나한상은 사실적이며 약간 과장하였기에 하나같으면서도 모두 다른 특징이 있는 모습으로
질서 정연하면서도 리듬감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 나한상은 용문석굴 중에서 가장 훌륭한 나한상의 걸작으로 생각된다 합니다.
천장의 연화 문양을 올려다보니 우아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비록 훼손되어 희미하지만, 그 주위로 4명의 아름답고 풍만한 비천이라는 압사라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내부가 검게 그을었고 무척 어둡기에 사진으로는 멋진 압사라를 잘 표현할 수 없네요.
높이가 8.25m나 되며 가로 세로가 각각 11.16m와 11.70m의 반듯한 네모형의 방입니다.
간경사는 당나라 때 만든 석굴로 동산 석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굴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곳도 꼭 들려 구경하고 가야 합니다.
할인도 해주지 않은 곳이니까 본전을 뽑아야 할 게 아닙니까?
이곳 간경사에서 잠시 눈을 돌려 건너편도 바라봅니다.
이곳에서는 서산 석굴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간경사를 나와 다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철창으로 무식하게 막아놓은 석굴 하나가 또 보입니다.
여기는 또 누구를 감금한 곳입니까?
이곳은 이연화동(二蓮花洞)이라는 석굴입니다.
당나라 시기에 만든 석굴로 쌍굴로 쌍둥이 석굴입니다.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도록 창틀 앞에 또 철망으로 막아놓아 접근 자체를 원천 봉쇄해 버렸습니다.
들여다봐야 천장에는 연꽃 문양의 조각이 있을 겁니다.
오른쪽 기둥에 역사 혼자 우두커니 지키고 서 있네요.
이제 다시 길을 나섭니다.
서산 석굴 쪽은 사람이 미어터지지만, 이쪽은 찬밥이네요.
멀리 봉선사를 담아보았습니다.
봉선사는 역시 용문석굴의 대표선수가 틀림없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저잣거리처럼 사람이 바글거립니다.
그러면 가까이 한 번 불러보고 가렵니다.
이곳에는 강 건너 봉선사를 바라보고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예불단을 강 아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지금 사진 찍은 이곳에서 무측천은 많은 묵객을 초청해 시화 연을 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바라보며 말입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향산사를 향해 가렵니다.
부처도 너무 많은 부처를 보았더니 점점 세상이 우습게 보입니다.
아직도 가랑비가 내려 꽃잎이 물기를 촉촉이 머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꽃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어느 누구 하나 미소 짓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세상인심이 그런가 봐요.
佳人의 여행기처럼 재미가 없으면 추천은 고사하고 댓글도 남겨주시는 분도 많이 안 계신가 봐요. 그쵸?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람 스스로 운명을 무겁게 짊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걷어차기도 합니다.
운명이 무거운 게 아니라 내가 약하여 운명에 눌려 지낼 뿐입니다.
내가 약한 만큼 운명은 강해지고 내가 강한 만큼 운명은 가벼워집니다.
무측천을 보면 운명이란 바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비록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첫 서방이 죽자 그 아들에게 강력한 육탄공격으로
태클을 들어가 천하를 주무른 중국 최초의 여인이었습니다.
중국 유일의 여황제까지도 되었던 풍운의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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