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삼채와 그 밖의 도기들

2012. 6. 29.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정신이 빠져 유물을 살펴보고 있으려니까 정복을 입은 사내가 뭐라고 합니다.

눈치를 보니 이제 박물원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진 듯합니다.

잠시 시간을 보내려 박물원을 찾아왔지만, 이곳에는 볼 게 무척 많습니다.

그만 유적에 눈이 팔려 정신없이 바라보다 보니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아직 보지 못한 곳이 많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볼 게 많다는 말이 되겠네요.

 

당삼채라는 도자기도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당삼채(唐三彩)는 중국 당나라 시기의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이라 합니다.

당나라 때 삼채 유약을 사용해 만들었기에 당삼채라는 이름을 붙였나 봅니다.

주로 장안이나 낙양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었고 묘 능에 함께 묻어두는 풍습이 있었고

물론, 후기로 접어들며 여인들의 장식으로도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고요.

 

그러니 이곳에 전시된 당삼채는 실생활에 사용하는 도자기가 아니라 잘난 사람 죽으면

무덤 안에 넣어주어 귀신이 심심하지 않게 가지고 놀라는 의미인가 봅니다.

그러니 귀신 전용 장난감인가요?

죽고 나면 귀신이 무얼 안다고 이런 짓을 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죽은 후 무덤 속에서 당삼채만 가지고 놀다 보면 그 귀신은 심심해

죽을 것 같아 그래서 이런 해학적인 상상 속의 동물도 도자기로 만들어 넣어주었나 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짐승은 예전에 보았던 그렘린이라는

영화의 동물 캐릭터였던 기즈모가 연상되네요.

혹시 그 감독이 이곳에 와 당삼채 인형을 보고 영화의 캐릭터를 생각한 게 아닌가요? 

 

어때요?

정말 다양한 모양의 도자기가 아니겠어요?

이 사람은 생전에 장수였나 보군요?

그러니 도자기로 만든 군사를 넣어주어 훈련도 하며 심심하지 말라고 했나 봐요.

 

위키 백과에 보면 도질(陶質)의 소지에 화장한 다음 녹·갈·황·백의 연유로 화려하게 칠하였으며,

코발트의 남유(藍釉)를 칠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기형은 용수호, 만년호와 반(盤), 완 외에 여러 가지 형태의 남녀 인물상, 신상, 진묘수(鎭墓獸),

말, 낙타 등의 각종 명기와 당대 귀족의 취미, 생활양상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 유행한

서아시아풍 의장과 복식이 가끔 보인다고도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만이 아닌가 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고대광실도 지어 무덤에 넣어주었나 봅니다.

아마도 측천무후(재위 690∼705) 경부터 출현하여 후장(厚葬)의 풍습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유행하였으나, 안녹산의 난(756) 이후에는 제작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러나 발해 삼채, 요 삼채, 송 삼채 등과 페르시아 삼채 등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는군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도자기는 사람의 모습이나 옷차림이 특이합니다.

아마도 중동지방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요?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당나라까지 왔다가 죽기라도 했나요?

그래도 많은 돈을 벌고 죽었기에 이런 고향의 모습을 한 도자기를 무덤에 넣어주었을 겁니다.

이런 인형 하나를 모티브로 하여 하나의 멋진 소설도 써보고 싶습니다.

아라비아에서 낙타를 끌고 당나라로 장사 다니다 큰돈을 벌었던 대상들의 이야기에

그 주인공이었던 덜수 이야기 말입니다.

아라비아의 덜수도 장사를 와 이곳 당나라 소저와 첫눈에 뻑~ 소리 나게 눈이 맞아

사랑을 했을 것이고...

파란만장한 아라비아 덜수의 삶을 말입니다.

 

이 도자기는 아마도 여자의 무덤에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바로 아라비아 덜수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었던 그 소저의 무덤에서?

오늘 두 남녀의 사랑이 이곳 무덤 부장품에서 시작되나 봅니다.

 

위의 사진은 신당서의 예악부의 기록에 따르면 궁중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라 합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홀 가운데 앉거나 서서 악기를 연주했다 합니다.

제일 끝 양쪽으로는 악기 연주자가 아니고 무희라고 합니다.

 

여자의 평소 생활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자기는 아마도 지체 높은 아녀자의 무덤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럼 혹시 덜순이?

 

남자는 맨날 전쟁하는 모습만 만들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래 둥근 물건은 아마도 말이나 소를 이용해 곡식을 빻는 그런 기구로 보입니다.

지금도 중국 시골 마을을 다니다 보면 저런 모습의 맷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덜수가 "마님! 맷돌이나 돌릴까요?"라고 했던 그 맷돌이었나요?

 

역시 남자는 이렇게 맨날 싸우러 다녔나 봅니다.

나폴레옹의 무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사내를 나타내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모습뿐인가요?

사실 사내도 사랑에 눈물 흘리고 마음 졸이며 사는 그런 사람인데...

 

백희도용군(百戏陶俑群)이라 하네요.

기원전 200여 년 이상 된 한나라 시대의 자기로 백희(百戏)란 글자 그대로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자세를 의미한다 합니다.

그 자세는 아크로바틱도 있고, 격투기 모습도 있습니다.

물론 마술 하는 모습도 보이고 게임을 하는 것도 있지요.

 

보통사람들이 즐기며 체력단련도 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많은 사람이 즐겼다 합니다.

그러니 지금도 중국의 작은 마을을 가도 아침마다 동네 아녀자들이 모두 나와 열심히

집단 체조를 하는 일이 이미 오래전 한나라 시대부터 있었다는 말이 되나요? 

 

끄~ 하하하!!

19금 도자기입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내의 모습이네요.

너무 야한가요?

따식~

 

애마 부인이 아니고 애마 덜수인가 봅니다.

기원전 200여 년 서한 시대에 만든 도자기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형상이네요.

활과 화살은 모두 사라졌지만, 아직 자세는 변치 않는 옛날 한나라 때 그대로입니다.

 

풍구와 방아입니다.

한나라 시대의 유물로 기원전 200여 년 전에 만든 것이라 합니다.

이미 당시에 쌀이 주식이었고 지금과 다르지 않게 쌀을 찧고 바람에 껍질을 날렸나 봅니다.

쌀이 아니라 옥수수일 수도 있겠네요.

 

당삼채가 아니라 조금은 다르지만, 역시 북위 시대는 누가 뭐라 해도

종교적인 조각상입니다.

전연화조상(田延和造像)이라는 석상입니다.

불교가 없는 북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양쪽으로 협시보살을 거느린 부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모습의 조각품을 봅니다.

색다르다고 하니 정말 색깔이 다르죠?

우리가 여행할 이때가 한국은 한창 김장철일 겁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위의 사진은 배추네요.

우리나라 김장 배추처럼 배추의 속이 꽉 찬 모습은 아니지만, 저걸 뜯어다

고추장에 푹~찍어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았다고 배추 위에 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여행이 조금 길어지니 저런 모습만 보아도 우리 음식이 그립습니다.

 

이번에는 무를 볼까요?

김장할 때 배추만 있고 무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배추나 무는 모두 청나라 때 상아로 만든 상아백채(象牙白菜)와 상아라복(象牙萝卜)이라는

작품으로 무 위에 앉아 있는 게 메뚜기인가요?

정말 정교하고 예쁘게 만들었네요.

 

한참을 서서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려는데 뭐라고 합니다.

4시 45분이 되자 아마도 폐문 시간이 다되었다고 나가라 하는 가 봅니다.

정말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찌합니까?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야지요.

그러나 다음 날 다시 와 마저 보았습니다.

원래 황하 풍경구를 가려했지만...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흘러가는 강물은 오늘도 쉼 없이 흐르건만

그래도 예전에 흐르던 그 물이 아니어라...

예전에도 사람이 이곳에 서서 바라보았겠지만, 오늘도 바라보고 있구나.

그가 바라본 물이 오늘과 같을지언정 생각 또한 같은 텐가?

내일은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청명상하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