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로 운강석굴 찾아가기.

2012. 2. 16. 08:00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10월 20일 여행 10일째

 

여행을 하다보니 면 잠이 적어지나 보네요.

이른 새벽에 몇 번 깨어나며 더는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구시렁거립니다.

어제는 멀리 떨어진 쉬앤콩쓰를 다녀왔으니 마음이 느긋해집니다.

오늘은 가까운 윈강스쿠(원강석굴)를 갔다가 오후에 다퉁 박물관과 선화사나 다녀올까 합니다.

 

어제 오전까지는 날씨가 좋아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어제 오후부터 하늘이 컴컴해지며

빗방울마저 조금씩 뿌려대네요.

중국 내륙의 겨울 날씨인 안개가 잔뜩 끼고 비가 자주 내리는 날이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아마도 이곳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 태항산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오늘도 운무로 세상이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죽하면 촉견폐일이라는 말도 있습니까?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은 개만도 못한 사람들입니까?

 

산시성(山西省)은 타이항(太行) 산맥 서쪽에 산동성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원래 지명이라는 것을 지을 때 특별한 것도 없고 생각나지 않을 때 짓는 게 그런 것 아닌가요?

지명을 처음 지을 때 누구나 쉽게 기억하고 알게 하기 위함이거나 무척 게으른 사람이 지었나 보네요.

 

우리나라도 군청 소재지 북쪽에 있는 마을은 군북면이 되고 남쪽에 있으면

군남면이라고 부르는 동네가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런 이름은 佳人도 생각해낼 수 있네요.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지명이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오리지널 중국도 별수 없네요.

마찬가지로 황하의 북쪽을 하북성이라 했고 그 남쪽은 하남성이라 했습니다.

중국은 좀 더 폼나게 이름 짓는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허접 그 자체네요.

차라리 인디언에게 부탁해 지으라 하면 더 멋지게 짓지 않을까요?

 

중국의 100년을 보려면 상하이(上海, 상해)로 가고, 중국의 천 년의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가고,

중국의 오천 년 역사를 보려면 산시(山西, 산서)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산서성의 성도는 타이위안(太原 : 태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깊은 역사의 고장인 산서의 성도 타이위안에서는 정작 유적이나

그런 것들이 볼 게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대장간 집에 식칼이 없다는 말인가요?

 

아무리 부처라고 하지만, 코끼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올린 것은 아닌가요?

코끼리 다리 사이에 역사가 두 손으로 코끼리 배를 받혀준다 하지만...

 

또, 중국의 지하 문화는 산시(陕西省,섬서성)에 있고, 지상 문화는 산시(山西省, 산서성)에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두 산시성은 중국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서성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황하를 경계로 서로 째려보고

이웃에 있는 섬서성과 함께 중국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북쪽으로는 기마민족인 몽골의 영향을 받았고 남쪽의 황하문명과 함께 일찍이 문명과 문명의 충돌지점에 있습니다.

물론 당나라가 시안으로 도성을 정하고 그 후 베이징이 여러 왕조가 흥하며 사라지는 바람에

변방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발달했던 문명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주어진다면 중화라고 폼 잡고 주변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며 살았던

개떡 같은 한족의 중화사상의 허울을 모두 벗겨버리고 싶습니다.

"한족이란 없다."로 말입니다.

 

무풍삼촌토, 우만지니천(無風三寸土, 雨滿地泥天)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글자 그대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먼지가 세 치나 쌓이고 비가 내리면 거리는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중국은 예전부터 황사로 말미암아 늘 먼지바람이 불고 그나마 비가 내리면

먼지바람은 없지만, 길거리가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면 이곳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인가 봅니다.

 

그래서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아무리 시골 길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은 모두 돌을 주워다 길에 깔아놓았고

널빤지처럼 생긴 돌이 나는 곳에는 석판로를 깔았고 자갈만 있는 지역은

자갈을 땅에 촘촘히 박아 포장하였습니다.

심지어 다랑논으로 유명한 롱지 티티엔에도 산꼭대기까지 돌로 석판로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일찍부터 도로포장에 노력했구나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기후가 만든 생활의 하나였습니다.

 

산서성은 그 면적이 남한의 1.5배보다 크다고 합니다.

이 지역의 기후 특성이 봄만 되면 계절풍의 영향으로 황사가 무척 많이 날아오는 지역입니다.

그 영향은 우리나라에도 미치기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삼국지에 나오는 동탁이 양아들로 삼았던 여포의 방천화극에 맞아 죽던 날...

황제의 전갈을 받고 궁으로 향할 때 그날도 무척 황사가 심해 동탁이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보이지 않았다 하죠.

만약 동탁이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천기를 읽고 그날이 제삿날임을 눈치챘어야 하는데...

 

둔한 머리 때문에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보면

그 당시도 황사가 무척 심한 지역이었나 보네요.

어디 그게 일이 년 사이의 문제였겠습니까?

아닌가요? 그런 기후를 그는 이미 자기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 산서성과 그리고 이웃하고 있는 섬서성은 그 대부분이 수천, 수 만 년 동안

봄만 되면 어김없이 계절풍을 타고 고비와 내몽골 서부지역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쌓여 깊은 곳은 100여 m,

얕은 곳은 3, 40여 m나 쌓인 황토 고원지대라 합니다.

그러나 이 황사가 가져다주는 것은 다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강의 어귀에 있는 삼각주가 비옥한 농토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이곳에도 봄만 되면 날아오는 황사는 유기질이 풍부한 비옥한 것으로 농사짓기에는 정말 좋은 흙이기에

일찍이 황하 주변인 이곳에서는 중국 문명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야말로 농사짓기에는 최적의 농토가 되는 겁니다.

 

중국 한족의 시조라고 하는 염황제라는 영감이 이 동네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놀았을 것이고

중국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요, 순, 우는 물론 하왕조도 이 부근이라고 추정만 하고 갑골문자로 유명해진

은왕조는 허난성이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중국의 시작이네요.

그럼 이 지방이 중화의 본점에 해당하는 곳인가요?

그런 자랑스러운 중화가 북위의 거점이었다니...

 

한때는 이곳이 어마어마했거든요.

그 이유가 바로 사람이 살기 가장 좋은 지역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예전에 살기 좋은 곳이란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기름진 농토와 물이 아니겠어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라는 게 대단한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 수 있는 농사 지을 땅이 있다는 의미지요.

 

그 후에도 진(晉) 나라가 이곳을 근거지로 융성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곳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진(晉)으로 시작하잖아요.

산동은 공자께서 계셨던 노(魯) 나라였기에 번호판도 노(魯)이고 북경은 서울 경(京) 자를 사용하던가요?  

그러나 다퉁이 역사의 전면에 제법 품위를 갖추고 나타날 때가 북위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리 이곳에 나라가 융성했다 하더라도 후손이 먹고살 유적이라도 남겨주어야

후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겠어요?

바로 다퉁의 대표선수인 윈강스쿠(云岗石窟 : 운강석굴)가 이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상이 아무리 잘나면 뭐합니까?

이런 거라도 만들어 후손이 입장수입이라도 챙겨야 제삿밥이라도 제대로 얻어먹지요.

 

오늘은 다퉁의 대표선수 중에도 으뜸이라는 운강석굴을 시내버스를 타고 다녀오렵니다.

7시 10분에 다퉁역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4번 버스를 탑니다. {1원/1인)

어제 구룡벽을 보고 숙소로 돌아올 때 구룡벽 앞에서 4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거든요.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면 公交四公司라는 정류장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내려 방금 우회전한 사거리로 잠시 뒤로 걸어가면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가면

그곳에 윈강행 3번 버스가 옵니다.

미리 버스 안에서 윈강을 간다는 말을 안내양에게 하면 내리는 곳을 알려주고 다른 사람도 미리 알려줍니다.

 

도로 이정표에도 석굴로 가는 길을 표시하여 놓았습니다.

이 석굴이 다통을 먹여 살리는 화수분인가 봅니다.

 

이곳이 종점이고 우리가 가는 곳도 종점이니까 말도 필요 없이 앉아 가기만 하면 되는 아주 편한 곳입니다.

잠시 기다리니 8시에 3번 버스가 오고 버스를 타고 시외로 30분 정도 달리니 윈강쓰쿠가 종점입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아래 사진처럼 입구가 보입니다.

 

입구에 있는 문 중 제일 왼쪽으로 들어가면 미안한 일이지만, 화단을 건너 들어가야

 바로 문표 파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길을 따라 위로 계속 올라가면 주차장까지 올라갔다 다시 유턴하여 내려와야 하네요.

8시 45분에 입구를 통과합니다.

내일은 안으로 들어가 비싼 입장료의 본전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제일 저렴한 시내버스를 타고 왔지만 말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산시성은 역사적으로 무척 중요한 곳인가 봅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문명이 시작되었고 중원이라는 자랑거리도 생겼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이민족이라는 선비족도 이곳에서 문명을 꽃피웠는데 중화라는 단어가 어색합니다. 

그러나 황사로 말미암아 기후는 최악이라 하네요.

황사가 없는 요즈음에는 안개 때문에 도통 보이는 게 없습니다.

오랜 세월 날아온 황사가 지표를 덮어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합니다.

그래서 야오동(窯洞:요동)이라는 독특한 주거양식이 이 지방에는 아직도 남아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