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29. 18:42ㆍ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여인 열전
달기가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 당시의 정세를 보기로 합니다.
위의 사진 속에 네 글자인 자기동래(紫氣東來)는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이지요.
이 말의 의미는 바로 문명이 동쪽으로부터 온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노자가 했던 말로 성인이 동쪽에서 온다라는 의미기도 하고요.
그냥 쉽게 지나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스러운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동쪽이라는 말은 바로 동이족이 사는 한반도일까요?
오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했던 달기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먼저 그 시대적 배경과 연관지을 수 있는 문명과 지역적인 점 등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조금 하고 진행할까 합니다.
이는 순전히 그동안 佳人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정리해 본 글이기에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춘추시대에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가 죽을 때 자신이 살았던 곳인 취푸(曲阜:곡부)로
그 지역이 예전에 은나라 땅이었기에 자신은 은나라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했으며
은 나라의 유적이 발굴된 은허 유적지는 후기에 천도한 지역으로 처음 수도였던
공자의 고향인 지금의 취푸에서 이전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은나라는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취푸 이전에는 지금의 상추시(商丘市:상구시)에서 처음 도읍을 정했다고도 하고요.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기에 아마도 상추시에서 제일 먼저 은나라가 시작했지 싶네요.
좌우지간, 황하를 중심으로 한 황하문명과 장강을 중심으로 한 장강문명은 각각 華족과
夏족의 고향이고 은나라는 발견된 유물로 볼 때 이들과는 다른 북방 계열의
東夷족으로 구분해야 하겠네요.
이렇게 현재 중국의 시작은 화족과 하족 그리고 동이족이 주류를 이루었지 싶습니다.
그랬던 동이족이 왜 중국에서는 찬밥이 되어 이민족으로 기록되었냐고 하면 동이족의 나라
은나라가 마지막 왕인 주왕이 달기와 신선놀이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으며 서쪽에
근거지를 두었던 주나라가 득세하며 은나라 주민은 모두 폐족이 되다시피 하여 전국으로
흩어져 장사를 하며 연명했기에 중원에서는 동이족이 뿌리조차 찾기 힘들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장사를 하는 사람을 말하는 상인(商人)이라는 말이
상나라(은나라) 사람이라는 말의 시작이 되었겠네요.
위의 사진 속의 무덤이 바로 곡부에 있는 공자가 잠든 묘입니다.
위의 사진 속의 비석이 심하게 훼손된 것은 문화혁명 때 붉은 무리가 이곳에도 들이닥쳐
비석을 부수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영원한 진리는 없고 시류에 따라
공자도 왔다 갔다 하는 모양입니다.
공자 묘를 직접 보니 비석은 부서진 파편을 모아 땜질하다시피 하여 다시 세웠더라고요.
공자의 비석이 무슨 레고 블럭입니까?
위의 사진은 은허박물관에서 보았던 것으로 사람의 머리를 제사에 사용했다는
인두 공양의 모습입니다.
이는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북방민족의 고유한 제사 방법이지요.
그 외에도 은허 박물관에는 이 지역에서 발굴된 순장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더라고요.
이런 제사 방법은 중원에서 살아왔던 화하족과는 완전히 다른 풍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굴된 은 나라의 유적과 그들의 유물과 풍습 등을 비추어 볼 때
북방민족의 전통인 순장이나 인두 제사 등이 발견되었기에 그들이 북쪽에서 서서히 내려간
북방 민족의 한 뿌리인 동이족이라는 설이 있기에 공자가 동이족이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었지요.
이런 이유로 한때 공자의 출신을 두고 한중 네티즌 간에 설전이 있기도 했지만,
민족으로 볼 수 없는 문제이기에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도 있기는 합니다.
은허 유적지를 돌아보면 정말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는데 우리 같은 아마추어 눈에도
완전히 다른 문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은허지역에서는 한자의 뿌리인 갑골문 등이 발견되었기에 지금 중국에서 사용하는
한자도 동이족의 문자라는 설이 나와 한중간의 설전이 벌어진 적도 있지만,
이런 한자의 시작은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 싶습니다.
상나라라는 은을 동이족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도 하겠네요.
위의 구덩이 속에 보이는 파편이 바로 무더기로 발굴된 은허 지역의 갑골입니다.
그렇기에 공자가 동이족이고 한자의 시원도 동이족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동이족이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기에 우리 민족만이라고는
주장하기도 어렵기에 이런 주장의 선뜻 동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자는 중국 고유의 글자도 아니고 동이족으로부터 시작해 우리 한반도로도
흘러들어왔을 것이고 중국 동쪽인 산둥반도로도 들어가 점차 중원으로
번져갔다고 볼 수 있고 중원의 인구가 아무래도 많았기에 많은 사람이
사용했던 글자로 지금의 글자의 발전했을 겁니다.
그러니 어느 선으로 구분하여 획일적으로 정할 일이 아니고 민족이나 문화의 이동도
어느 한 곳으로만 이동이 아니기에 동북아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석학 임어당도 한자는 중국 고유의 글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글자였다고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만약, 은 나라 유적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이 한족의 뿌리인 중원에서 발견된다면
이 가설은 달라지겠지만요.
그러나 그들이 속한 지역이 지금의 중국 영토이기에 다툼은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중국이 역사 공정에 더 속도를 내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중국의 황하문명을 1.000년에서 1.500여 년이나 앞선 유적이 발굴되며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요하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요하문명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끼?
지금까지 세계 4대문명 중 하나가 황하문명이라고 했는데 이보다 앞선 문명이 있었다고요?
아마도 앞으로 중원에서 믿었던 황하문명은 이전의 문명인 요하문명의 방계문명이
될 수 있는 처지에 빠졌으며 황하문명이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세계 문명의 4대 발상지 중
하나였다는 것은 바뀌게 생겼네요.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중국이 지금까지 내세웠던 모든 일이 우수운 꼴이 되었습니다.
이는 사기라는 책을 쓴 사마천마저도 몰라던 역사적인 문명이 얼마 전에 발견되며 활발하게
발굴 중인데 중국에서는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지요.
당시 중국땅이 아닌 곳에서의 유적 발굴은 그와 연관된 나라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그곳에서 발굴된 유물과 같은 유물이 나온 한반도는 알아야 할 것인데도 말입니다.
중국도 놀라서 외부에게 숨기며 지금도 발굴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요하 문명입니다.
그 위치가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고조선의 근거지이기에 우리를 더 흥분시키지요.
그렇기에 동북공정이 필요하며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해야 하고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왜 동북공정이 중국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인지 분명해졌지요?
이제부터 요하문명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놓고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중원에서 발견된 곳을 보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그곳 흥륭와와 사해에서 발굴된 옥장식입니다.
그곳에서 발견된 것과 우리나라 고성 문암리에서 나온 옥 장식이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주은래는 고조선이나 고구려 그리고 발해 모두 한국사라고 역사 공정하려는 자들에게
허튼짓 하지 말라고 했지만, 시진핑은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며 한반도마저 중국의 역사 속으로
넣고 싶어 이미 바람잡기 시작했지요?
"너희들 다 계획이 있었구나?"
문제는 당시에 요하문명이 있었을 때는 한국도 중국도 없었고 국가라는 개념조차 희미해
국경조차도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황하나 장강문명보다 앞선 시기의 위의 사진 속의 요하문명이 생겼고 요하문명의 민족이
동이족이냐 아니냐에 따라 또 다른 결론이 나겠네요.
따라서 현재 요하문명 전부가 고조선의 문명이라고는 할 수 없고 지리적으로 이동경로가
한반도와 중국 산둥반도로도 분명 흘러들어갔을 것으로 보여 중원과 한반도 문명의 시원이
요화문명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러니 어느 한 나라의 문명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요하문명을 발굴하다 보니 유적에서 나온 것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은허 유적에서 보았던 갑골문의 시작이 바로 더 이른 시기에 요하문명에서 발견된
것이기에 그래서 임어당이 한자는 동이족의 글자라고 단언했을 겁니다.
그곳에 살았던 민족은 기후 변화로 점차 아무래도 따뜻한 남으로 이동하며
당연히 한반도와 중국의 동쪽인 산둥반도로 진출했다고 보입니다.
당시 요하지역의 기후는 현재보다 높아 지금의 황하 지역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점차 기온이 내려가며 이곳 요하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 남으로 이동하며 어디로 갔을까요?
지도를 보면 민족의 이동 루트는 누구나 알 수 있지 싶습니다.
북쪽은 추운 곳이기에 갈 수 없고 남쪽이나 동서쪽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동쪽은 바다가 있어
진출로가 막혔고 남쪽으로의 이동은 한반도와 산둥반도 딱 두 곳이고
서쪽으로는 몽골 방향입니다.
또 재미있는 일은 지금의 카자흐스탄이 그들의 조상이 단군(탱그리)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는데 위의 사진은 카자흐스탄에서 발행한 단군전이라고 쓴 기념주화입니다.
단군의 형상 아래에는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념주화는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을 위한 기념주화로 생각되네요.
카자흐스탄의 수도 이름이 아스타나로 고조선의 아사달과 매유 유사하지요.
또 우리는 겨례라는 말이 그곳에서는 같은 의미로 케레이라고 발음하고요.
지금은 아스타나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통령의 이름을 딴
누르술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네요.
우리가 단군을 당골래라고도 부르는데 카자흐스탄 지역에서는 탱그리라고 부르고요.
그렇다면 요하 지역에서 서쪽으로 진출했던 또 다른 무리는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정착했다는 추론이 성립하겠네요.
결국, 세 갈래로 갈라져 동남쪽으로 이동했던 민족은 한반도로 내려갔을 것이고
서남쪽으로의 이동로는 지금의 산둥반도가 분명하잖아요.
산둥인은 그들이 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서쪽으로 이동했던 이들은 몽골을 거쳐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정착했을 것이고요.
물론, 카자흐스탄을 지나 더 멀리 유럽으로 갔을 것이라는 추론도 해볼 수 있습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아마도 위의 민족 이동은 이견이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가설이 정말 재미있지 않나요?
민족의 이동은 문명의 이동이고 문명의 이동은 유물의 발견으로 정의되지 싶습니다.
그렇다면 가설만으로 이야기하기 보다는 발굴된 유물로 살펴보는 게 좋지 싶습니다.
요하문명에서는 웅녀를 모신 신전으로 추정되는 여신전, 동이족 전통의 돌을 쌓아
묘실을 만든 적석총, 곰의 뼈가 발견된 무덤, 대형 제단 등 초기 국가 형태의 유적이
발견됨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 방향을 급하게 돌려야 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위의 사진속에 보이는 것이 바로 빗살문양의 토기입니다.
우리 한반도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는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토기로
물론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대단히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답니다.
이 토기의 발견은 중국의 북쪽인 초원을 연결하는 띠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중원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의미지요.
또 중원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비파형 동검도 요하 지역에서는 대량으로 발견되었고요.
이는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며 청동기의 발전을 인류학자는
국가의 시작으로 정의하기도 하거든요.
일본의 서기가 거짓인 것은 그 역사를 천 년이나 앞으로 당겨 기록했다는 것이지요.
일본 청동기의 시작은 3~4세기였으니 일본 지역에서 국가의 시작은 그때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기에 일본의 서기는 믿음이 가지않는 기록으로 조작되었다고 봐야하겠네요.
우리도 잘 아는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에서는 대단히 많이 발견되었지요?
검의 칼날을 보면 정말 비파라는 악기처럼 예쁘지 않나요?
이 또한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발해만의 끼고 중국의 동부지역인
산둥반도 일부에서도 발견되었고요.
그렇다면 요하문명에서 살았던 민족은 비파형 동검이 발견된 지금 위의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철이 중요한가 하면 중국에서조차 위의 사진에 보이는 사모무정을 대단히 소중하게
자랑하고 있는데 바로 사모무정이라는 대형 청동 솥이 은허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역사적으로 공식적인 국가의 탄생을 알렸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청동솥의 용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함인데 제사란 고대 초기 국가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석기시대에는 국가로 인정할 수 없고 청동기 시대로 진입할 때 비로소 틀이 잡힌
국가라고 역사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네요.
물론, 국가의 성립 요건에 여러갸지 요건이 더 있겠지만요.
중국 정부에서는 은허지역에서 발견된 이 청동솥의 의미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
위의 사진에 보듯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더라고요.
우리 입장에서는 청동솥 하나가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했지만,
국가의 기원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물론, 중원에서도 청동으로 만든 칼이 발견되었지만, 비파형 동검과는
다른 형태의 무기가 발견되었지요
요하문명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칼과 손잡이 그리고 손잡이 끝,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조립식으로 만든 검을 사용했다는 말은 쇠를 이용하는 기술이 무척 발달했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요하 지역에는 국가라는 개념의 집단이
이미 그때부터 존재했다는 말이 되겠네요.
게다가 성을 쌓은 방식이 위의 사진처럼 치(雉)라고 하는 것인데 성벽 외부를 일정한 간격으로
외부로 돌출시켜 효과적으로 외침에 대비해 쌓은 축성 방법은 고구려 축성의 기본으로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방법이 요하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답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도읍이 바로 요하문명이 발생했던 지역이 아닐까요?
이런 발견으로 중국에서는 갑자기 그들의 조상인 황제를 중원에서 장성 밖으로 이사를 시켜
요하 문명의 시조라고 하는 게 동북공정의 주요한 목적이 되었겠네요.
만리장성이라는 의미는 장성 안은 중국땅이요,
외부는 오랑캐 땅이라고 했던 구분선이 아닌가요?
이제 치우 지역까지 황제의 땅이었다고 우기는 겁니다.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치우의 후손은 먀오족이라고 합니다.
먀오족이 사는 가장 큰 마을인 서강 천호묘채에 가보면 치우로부터 시작되어
이어지는 족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먀오족이 중국에서 이야기하는 화하족이 아님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그 예로 그들이 사용했던 족보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지요.
먀오족은 한족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치우를 왜 한족의 조상으로 짝사랑하며 억지를 부립니까?
한족의 조상은 치우와 전쟁을 했다는 황제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위의 사진을 보면 치우로부터 시작해 자손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실 수 있지요.
재미있는 것은 자연부명(子連父名)이라는 족보가 눈길을 끄네요.
이는 아버지의 이름 중 첫자를 아들이 이름 끝자로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예를 들면 홍길동의 아들은 아버지 이름의 첫글자 홍이 아들 이름의 마지막에 두어
00홍이 되고 그의 아들은 또 연자를 마지막에 넣어 00연이 되는
재미있는 법칙이네요.
또 먀오족도 한자와 약간 변형된 그들 나름의 글자를 지니고 있으니 이렇게 한자란
중원을 포함해 동북아시아는 물론 여러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여러 민족이
모두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겠네요.
그러나 그 시원은 화하족의 중원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합니다.
한자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는 나라도 국경도 확실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을 시기로 판단되지요.
그때 중국이 어디 있고 한국이 어디 있었겠어요.
따라서 한자란 중국 고유의 글자가 아니라 중원은 물론, 극동이나 베트남 그리고
일본 까지도 모두 사용했던 지금의 아시아 권의 공동 문자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우리와는 사촌간일지도 모르는 치우족의 후손인 예쁜 먀오족 처자를
다시 한번 보고 갑니다.
지금까지는 가장 오래된 한자의 시원을 은허지역에서 발견된 갑골문으로 보았는데
이곳보다 더 오래된 문명인 요하문명이 일어난 지역에서 발견된 복골이
발견됨으로 더 이른 시기라고 하니...
그렇다면 요하지역에서 점차 민족이 남쪽으로 이동하며 한반도는 물론, 산둥반도로
내려갔을 것이고 산둥반도로 내려간 사람들이 은나라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닌가요?
그런데 이 요하문명이 중국에서 믿었던 중원이 아니라 오랑캐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니 이제 중국은 그들 문명의 시작을 중원에서
오랑캐 지역으로 옮겨야 할 처지에 놓였네요.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는 주변에 살았던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화하족이 오랑캐 본진이었다니...
그래서 황제를 오랑캐 지역으로 주소를 옮기고 동북공정을 통해 화하족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니 사마천의 사기는 그야말로 소설에 이르는 처지가 되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당시에 사마천이 수집했던 자료가 빈약했으니 어쩔 수 없는 처지였지 싶기도 합니다.
지금 먀오족들이 주로 사는 지역은 구이저우 성을 중심으로 멀리 베트남까지도
분포되어 살고 있는데 갑자기 치우가...
이렇게 치우까지도 화하족은 조상으로 모시기 시작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면 황제를 가운데 두고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듯 치우와 염제를
양쪽 포스트에 세우고 역사공정을 마무리하네요.
지금까지는 화하족의 뿌리가 황제라고 했는데 시조가 셋인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진시황 영정도 아니고 아비가 셋이라니!!!!!
진시황은 자초 이인과 여불위 그리고 노애까지 아비 노릇을 했으니
중국의 족보란 믿을 수 없기는 합니다.
정말 중국은 변신의 믿을 수 없게 신속하게 진행 중입니다.
요하문명은 중원에서 시작된 문명이 아니라 오히려 만리장성 외부인
오랑캐 땅에서 시작된 문명이고 서서이 남쪽으로 내려오며 하나는 한반도로 내려갔으며
다른 하나는 중원으로 내려가 황하문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하는데 그러면 지금까지
중국이 자랑하고 내세웠던 황하문명은 요하문명의 방계 문명으로 전락할 처지에 이르렀네요.
그래서 역사공정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제 그 끝을 내고 있지 싶습니다.
요하 문명의 여러 곳 중 한 곳인 우하량(牛河梁) 문명은 중국이 정통으로 내세웠던
황하 문명의 주류인 하, 은, 주나라와는 지리적으로나 형태로나 완전히 다른 문명이고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의 대부분은 우리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같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렇기에 요화 문명이 발생한 지역은 고조선이었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 않겠어요?
왜 중국이 며느리도 모르게 동북공정을 진행하는지 알 듯합니다.
"너희들 다 계획이 있었구나!"
요하 지역에 관한 몇 장의 사진을 첨부합니다.
위의 사진은 적석총이 발견된 지역으로 요하문명의 유적이 발굴되는 곳에서
한반도와 중국 산둥지방이라는 말입니다.
적석총의 대표는 바로 고구려 장군총이 아니겠어요?
따라서 중원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유적군이라지요?
성 축조 방식에서 치라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성벽 밖으로 돌출되게 축성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세 곳에서 방어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으로 이 또한 요하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모든 국가에서 축성한 성벽 형태입니다.
중원에서는 명나라 이후에 이런 형식의 성벽축조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비파형 동검이 발견된 지역을 보여주네요.
이 또한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청동검이지요.
중원에서는 셋으로 분리된 형태가 아닌 하나의 통자로 만든 비슷한 검이 출토되기는 했답니다.
요하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중 곰의 뼈와 곰 발의 모양을 만든 토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웅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신화 속에서는 곰이 사람과 결혼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당시에는 부족을 나눌 때
그 부족의 토템신앙을 중심으로 하기에 곰의 마을의 여자와
호랑이 마을의 여자로 유추할 수 있지 싶습니다.
이런 사실을 신비스럽게 신화로 포장하려고 곰과 호랑이가 여자가 변신했다고 하지 싶습니다.
사학자들은 신화라고 치부해 우리의 역사 기원을 단군으로 보지 않지만,
당시 마을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본다면 곰과 호랑이는 분명 우리 조상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 어느 민족이나 조상은 신비한 형상으로 존중받고 있으니까요.
요하 지역에서 발견된 석곽묘와 인골의 모습입니다.
옥으로 만든 장신구도 많이 보이고 특히 유골 머리 부분에 상투를 묶고 그 위에
상투를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둥근 형태의 옥으로 만든 옥고(玉箍)라는 도구도 보입니다.
상투라고 하면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히 중요시하는 머리카락 관리 방식으로 단발령이 내렸을 때
머리는 잘려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반발했던 민족이 우리 한민족입니다.
이렇게 옥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옥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기술을 지닌 민족이 분명하네요.
오늘의 이 이야기는 개인적인 의견이지 아직은 확실하게 결론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후세 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충분히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요하문명이 아닌가요?
이렇게 은나라 이전의 요하문명과 동이족을 잠시 보았고 다시 동이족의
은 나라의 달기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은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원래 상나라가 반경이라는 왕이 도읍이었던 취푸에서
지금의 은허 지역으로 수도를 옮김으로 마지막까지 은허 지역에 있었기에
전기와 구분하여 은나라라고도 부르지 싶습니다.
따라서 단군 조선을 그냥 신화로만 치부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만 버려둘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로 우리 선조의 역사를 밝혀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쓴이 : 佳人
佳人의 오늘의 생각
일본은 없는 역사를 조작을 통하여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고 그러나 한국은 있는 역사도 몇 몇 사람의 주도에 의해
없애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이 없앤 한국의 역사를 중국 정부의 치밀한 역사공정을 통해
중국의 역사로 둔갑시키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집과 잘못된 역사관에 사로잡혀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고 비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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