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화신 서태후 10 - 자희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2011. 9. 2. 07:48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여인 열전

우여곡적 끝에 서안에 도착한 서태후는 순무아문을 행궁으로 삼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호사롭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립니다.

끼니마다 100여 종의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서안의 요리사에게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안의 요리사들이 개발한 만두가 108가지로 유명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렇게 소요되는 비용이 하루에 은자 200냥이 넘었다 합니다.

 

이홍장을 다시 발탁해 전권대신으로 삼아 8국 연합국과 강화를 하게 하고 광서제의 이름으로

어지를 내려 자신의 책임을 감추고 의화단과 주전파 대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의화단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을 참살하는 들 서양의 비위를 맞추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8국 연합국은 물론 전쟁의 책임이 자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중국을 관리하는데는 자희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알고도 모른척 넘어가 주기로 합니다.

 

그해 말 연합국은 12개 조항의 의화대강이라는 협상안을 내놓자 자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모든 조항을 승낙하라."라고 재촉하여 별다른 줄다리기도 없이 조약이 체결됩니다.

 

그 내용은...

각국은 중국과 전쟁을 하며 군비로 소비한 비용 4억 5천만 냥을 배상하되,

39년에 걸쳐 원금과 이자를 합한 9억 8천만 냥을 갚는다.

이를 위해 관세와 염세 등을 차압한다.

 

각국이 북경과 천진, 산해관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을 허락한다.

청나라는 국내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중의 활동을 금지할 것을 보증한다.

 

이는 청나라가 서구 열강을 위한 주구가 되어 자국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앞잡이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킬수 있어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광서 27년(1901) 8월 자희는 피신중이던 서안을 떠나 북경으로 금의환향합니다.

3.000여 대의 마차에 각종 금은보화를 싣고 의기양양하게...

피신할 때와는 다르게 너무너무 화려하게 컴백 홈합니다.

돌아온 뒤 열흘 후 성대한 연회를 배풀어 각국 사절과 부인을 초대해 위로하기까지 합니다.

 

북경에 돌아온 후에도 자희는 광서제를 영대에 감금하고 대권을 계속 휘두릅니다.

그리고 서양법을 참조하여 모든 법령을 바꾸어나갑니다.

이런 일은 순한 양이 되어 서양의 요구에 하나하나 따르는 일이기도 했지요.

자희는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정무를 바로잡는 행위는 이 후에 여러 나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함이다,"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지경에 이르르니 서구 열강은 마음놓고 중국대륙을 약탈할 수 있었으며

자희는 앞장 서서 법을 만들어 줍니다.

 

세상은 어디 그들이 그렇게 좋은 시절만 보내게 하나요?

서서히 자각의 눈을 뜨고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민중운동이 일어납니다.

손중산이 이끄는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일어나자 자희는 광서 32년(1906) 날로 커지는

혁명운동을 저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예비입헌"이라는

사기극을 연출하며 대대적인 개량정책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가고 하늘은 더 이상 자희의 편이 아닙니다.

드디어 자희의 마지막을 향하여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도끼자를 썪는지 몰랐고 세상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산 여인입니다.

 

광서 29년(1903) 자희는 불현듯 기차를 타고 동,서릉(순치제 이하의 능을 북경의 동서쪽

100km 떨어진 곳에 만들었기 때문에 동릉, 서릉이라고 합니다.)을 참배하겠다 합니다.

환장합니다.

그곳은 기차길이 없는 곳이기에 서둘러 기차길을 놓아야 합니다.

동릉에 이르는 철로를 건설하는 데에만 153만 냥이 넘는 백은이 지출되었습니다.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