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2. 23:42ㆍ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사마천의 사기
위풍당당!!!
그러나 이곳에서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조조의 모습을 위무웅풍(魏武雄風)이라고
표현하는데 오늘 위의 사진 속의 조조는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고
칼을 든 군사가로서의 모습입니다.
예전에 삼국지에 등장했던 지역을 직접 돌아본다고 배낭을 메고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조가 건안 5년(AD200년) 불리했던 원소와의 전투였던 관도대전을 극적인 승리로 이끌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건안 15년에 동작대를 처음 만들며 차례로 금호대와 빙정대라는
삼대를 만들었다는 업성에 들렀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세 개의 건축물이 바로 조조가 이곳 업성에 세웠다는 삼대입니다.
가운데 동작대를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듯 빙정대와 금봉대가 보이네요.
업성은 옛날에도 업(邺)이라는 지명으로 불렀던 아주 오래된 마을이지요.
오래도록 지명이 변하지 않는 곳이 중국에서는 그리 많지는 않지요?
업성유지(邺城遺址)가 있는 업성 지역에 조조의 삼대가 있었다고
마을 이름도 산타이(三臺:삼대) 촌이더라고요.
업성 유지는 물 좋다는 한단과 은허 유적으로 유명한 안양 사이에 있더라고요.
위의 사진은 조조가 동작대 위에서 문인을 불러다 대연회를 열어 한판 걸지게 놀고 있는
모습으로 이렇게 인생을 즐겁게 노래하고 많은 문인과 어울리다 보니 건안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조조를 중심으로 탄생하게 되었을 겁니다.
지금 제일 왼쪽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자가 바로 조조의 아들 조식으로
이날 동작대부라는 시를 지어 조조에게 바쳤다 합니다.
조조는 우리가 아는 간웅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천하의 풍류객 조조였지 않나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전각은 우뚝 치솟아 있고 (建高門之嵯峨兮)
두 개의 대궐은 푸른 하늘 위로 떠오른 듯하구나. (浮雙闕平太情)
화려한 궁궐 한복판에 서서 바라보니 (立中天之華觀兮)
구름다리가 서쪽까지 이어졌구나. (連飛閣平西城)
궁궐을 끼고 도는 장하(漳河)는 끝도 없이 이어져 흐르고(臨仰水之長流兮)
저 멀리 과수원에 알차게 여문 과일을 바라본다. (望園果之滋營)
… 조식(曹植) <동작대부(銅雀臺賦)> 中
이렇게 산타이를 찾았을 때 산타이에 있던 업성 유지에 만든 부조 몇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제일 먼저 이 도시를 만든 제나라 환공이 업성을 만들었다는 의미의
제환공건업(齊桓公建邺)이라는 벽에 새긴 조각입니다.
오른쪽 환공 뒤에 선 사람이 그럼 관포지교에 나오는 관중이 아닌가요?
관중이 당시 환공을 도와 선정을 베풀도록 했잖아요.
또 다른 부조를 보겠습니다.
위의 사진이 서문표치업(西門豹治邺)이라는 부조입니다.
서문표가 이곳 업(邺)에 현령으로 와 다스렸던 일화를 부조로 나타냈군요.
서문표의 이야기도 재미난 사연이 있지요.
오늘은 그곳 부조 중 우연히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서문표 부조와 그에 얽힌 이야기의
흔적을 보고 오래전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 읽었던 서문표 이야기가 생각나 적어보려고 합니다.
위의 사진 속의 서문표사라는 사당은 지금의 업성 인근에 있는 사당입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위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서문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문후 때의 인물로 황하 주변에 있는 업현이라는 지역의
현령으로 부임하게 되어 현의 장로들을 불러 이야기를 듣던 중 괴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업현 고을의 장로들은 마을에서 가장 힘든 일을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황하의 수신인 하백(河伯)을 장가보내는 일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 때문에 업현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고 참새가 날아가다 뒤집히는 소리입니까?
하백이라고 하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인물로 물을 다스리는 상상의 신이 아닙니까?
그가 왜 장가를 가며 또 장가를 가는 데 왜 이 마을에서 신경을 쓴답니까?
"연유가 무엇이 오니까? 귀신을 장가보낸다는 말은 무슨 소리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초지종을 말해보세요."라고 서문표가 물어봅니다.
업현의 장로는 입을 모아 "우리 현의 교화를 맡은 삼로와 관리들은 해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백만 전이나 되는 큰돈을 세금으로 부과합니다.
그중에 삼십만 전은 하백을 장가보내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들과 무당들이 나누어 갖습니다.
(그러니 부가세 정도인 10%만 원래 일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삥땅을 친다는 말인데?)
그뿐만이 아니라 무당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예쁜 처녀를 보면 '이 처녀야말로 하백의
부인으로 딱이다.'라며 부모의 동의도 얻지 않고 막무가내로 처녀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딸을 빼앗긴 처녀의 부모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딸을 내주어야 합니다."
이제 바로 답이 나왔지요?
많은 돈을 걷으니 주민이 궁핍해지고 그 돈의 대부분은 삼로와 관리
그리고 그들의 바람잡이 무당이 서로 나누어 갖습니다.
옴마야~~ 게다가 처녀까지?
하백의 부인으로 점지된 처녀의 가족들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무당이 "이 처자가 딱 이야~"라는 한마디만 하면 끝입니다.
그놈의 "딱"이라는 소리만 들리면 부모는 딱하고 기절합니다.
"그들은 처녀를 데려가 목욕시키고 꽃단장시키고 비단옷을 입혀 사당에 머물게 하고는
열흘이 지나면 새로 곱게 화장을 시켜 가마에 앉혀 하수라는 강에 띄웁니다.
위의 그림 속의 모습처럼 처녀는 결국 강물에 떠내려가다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그러다 보니 딸을 가진 집에서는 점차 마을을 떠나고 당연히 고을 인구는 줄게 되고
남은 사람들이 나누어 부담을 하니 점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일은 업현이라는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행하던 것인데 하백에게 신부를
보내지 않으면 하백의 노여움을 사기에 하수가 넘쳐 업현 고을이 물바다가 되고
우리 모두는 물귀신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런 일은 없어졌지만 오래전에는 이런 말이 꽤나 믿음이 가는 말이라.....
그리고 이런 말을 지어낸 자는 빠져나갈 구멍이 늘 있지요.
홍수가 나지 않으면 하백이 마을에서 지내 준 제사와 신부로 바친 처녀에 만족하여 그렇고,
홍수가 나면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정성이 부족하고 누군가 진정으로 빌지 않았다고
진정성을 의심하고 제물이 부족하니 이듬해에는 더 많이 바쳐야 한다고 하지요.
서문표는 장로에게 묻습니다.
"하백을 장가보내는 날이 언제입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내게 미리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하백에게 시집가는 그 여자를 전송하리다."
내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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