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 - 측천무후

2009. 8. 22. 00:14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여인 열전

우리나라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여걸이 있지요.

그녀는 중국 당나라 제3대 임금인 고종의 황후로 성은 무(武), 본명은 조(照)라고 한답니다.

중국의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690∼705) 동안 천하를 호령했다지요.

그녀의 묘는 서안에서 60km 떨어진 건릉(乾陵)에 두 번째 남편인 고종과 합장되어 묻혔답니다.

 

찢어진 눈에 참 못났다. 내부는 이미 도굴되어 버렸지만, 능으로 들어가는 500m나 되는 참도(參道)에는 고종의 장례식에 참배했다는 주변국 사절과 그들이 보낸 동물을 본뜬 120개의 석상이 줄지어 서 있답니다.

이 참도 제일 안쪽에 무후의 비가 있는데 그 비를 무자비라고 부른답니다. 여기서 무자비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냉혹하고 모질다는 無慈悲가 아니라 비석에 글자가 하나도 없이 세워져 있어  無字碑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생전에 한 일을 보면 無慈悲가 맞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름께나 있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무자비를 세운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 있다는데 나머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중국 역사상 가장 풍류적인 인물이라고 불리우는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이라는 사람으로 비수라는 곳에서 8만의 군사로 전진(前晉)의 100만의 대군을 무찔렀답니다.

그는  사후에 "위대한 업적과 공로는 글로 써서 모두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하여 글자를 새기지 않은 무자비를  남겼고, 또 한 사람은 남송시기에 금나라와 치열한 싸움울 할 때 악비(岳飛)라는 충신을 모함하여 죽게 만든 진회라는 인물로 "더럽고 추한 행위를 글로 담을 수가 없다"라고 하여 무자비로 만들고 후손도 모른 체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는 스스로 자신이 이룬 업적이 너무 많아 작은 비석에는 모두 적어 놓을 수 없다고 그냥 비워두라고 하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공과는 후세 사람들이 판단하도록 하면 된다고 유언을 하였는지는 佳人이 마지막 들이마신 숨을 내뱉지 못하는 순간 그 자리에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후계자가 자신을 핍박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글을 새기지 않았는지 후세 사람들이 이미 새겨진 글을 지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살아생전 저지른 잘못이 너무 크기에 글로써 남기기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회의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전자의 경우겠지만..... 자신감의 발로인지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란 후세 사람들에 의해 평가받지요,

  그래서 그 비석에는 글자가 한 자도 없어 무자비(無字碑)라고 한답니다. 사후에 비석을 세울 때 후손들은 측천무후의 유지를 받들어 그리했겠지만 비석을 만든 석공이나 

 

일반 민초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럼 무자비를 남긴 무후의 무자비한 일생을 잠시 살펴볼까요?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들어와 자식을 낳지 못하면 태종 사후에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야 하기에 젊고 싱싱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태종의 9번째 아들인 이치(후에 고종이 됨)를 미리 보험을든다는 마음으로 홀리고 꼬리를 쳐 결국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섬긴 불륜의 죄. 

 

자기를 다시 궁으로 불러준 황후를 자기 딸 100일 잔치에 부르고 축하차 들른 황후가 돌아간 즉시 자신의 손으로 100일짜리 딸을 목 졸라 죽인 죄.

 

그 죄를 황후에게 뒤집어 씌우고 황후와 소숙비를 한꺼번에 폐서인으로 만들어 가두고 측은지심이발동한 고종이 나중에 은밀히 그녀들 숙소에 들리자 황제의 눈을 어지럽힌다는 엉뚱한 죄를 물어 살과피가 튀기는 각각 곤장 100대 씩을 치고 팔과 다리를 잘라 술독에 빠뜨려 죽인 죄.

 

황제 고종이 병약한 사이 권력을 장악하고 수렴이라고 발을 치고 배후에서 조정하는 수렴 정치라는 새로운 통치기술을 도입하고 독단으로 정사를 농단한 죄.

 

고종이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정사의 전면에 등장하려고 하자 막아서고, 고종은 재상인 상관의와 함께 복귀를 모의하며 무후를 폐비시키려고 했으나 이미 조정은 무후가 심어놓은 밀고자가 많아금새 발각이 되고 모의를 한 상관의를 처참하게 죽여버린 죄. 

 

이미 정해진 황태자 이충을 폐하고 자기가 낳은 아들인  이홍으로 교체하고 그마저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아침 먹고 급살 한 것처럼 독살하여 죽인 죄.

 

이홍 다음에 태자의 자리에 오른 이현(李賢)을 정변을 일으켜 모반을 꾀한다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를유배를 보내고 몇 년 후 유배지로 자객을 보내 이현과 그 세 아들을 단 칼에 날려버린 죄.

 

다음 아들인 이현(李顯)을 태자로 올리고 그 해 고종이 죽자 이현이 중종이 되고 어머니인 무후를 견제하기 위하여 장인을 시중 자리에 올리려고 하자 무후 세력이 태클을 걸고 화가 난 중종은 무심코 소리친다.소리친다.

"짐이 황제다. 천하를 위현정에게 준다한들 무슨 잘못인가?"

큰 잘못입니다. 천하를 준다니요?

이 말이 빌미가 되어 말 한마디 때문에 무후는 54일 만에 중종이 천하를 넘기려고 한다고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죄.

 

그다음 동생인 이단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고 곤룡포 대신 바지저고리만 입혀놓고 모든 정사를 혼자 전횡한 죄. 

 

나라 이름을 당나라에서 주나라로 마음대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죄.

 

나이가 여든 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장역지와 장창종이라는장 부라더스를 남자 첩으로 두고 부끄러운 짓거리를 하다가 그 녀석들이 무후의 힘만 믿고 분란을 일으켜 마침내 정변을 초래한 죄.

 

이 정변으로 인해 무후는 감금이 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녀 나이 82세...

그래도 죽기 전에 자신을 황제라고 생각하지 말고 황후였을 뿐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여보 나 먼저 가네~"하며 떠난 고종의 무덤인 건릉에 합장하여 묻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 그대.... 한 움큼밖에 되지 않는 가녀린 여인의 손으로 무엇을 움켜쥐려고 하셨는가?

 그리고 작은 가슴에 무엇을 품으려고 하셨는가?

 

뭐라고요?

여자는 남자보다 가슴이 크다고요?

그대가 글래머여서 가슴이 크고 그곳에 담을 게 많았다면 할 말이 없지요.

그대 살아생전 천하를 품었다만 남는 건 도굴당한 무덤과 글자 한 자 없는 빈 비석뿐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