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빙심(一片氷心) 우물이 있는 드엉럼

2020. 1. 31. 07:30동남아시아 여행기/베트남 2019

드엉럼 마을 구경을 하다 보니 유난히 마을에 우물이 많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우물은 지극히 맑은 마음이라는 의미의 일편빙심(一片氷心)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우물이네요.

이 글자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이었던 왕창령(王昌齡·698~756)의 시에서 따온 글자로 보입니다.

 

왕창령은 부용루라는 누각에 올라 친구 신점(辛漸)을 보내며

애틋한 마음을 시로 토해낸 것이라네요.

 

芙蓉樓送辛漸(부용루송신점) - 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며...

 

寒雨連江夜入吳 찬비 줄곧 내린 강물은 밤에 오 땅으로 흘러들고.

平明送客楚山孤 새벽녘에 친구를 보내자니 초산이 쓸쓸하네.

洛陽親友如相問  낙양의 친구들이 혹시나 내 소식을 묻거들랑.

一片氷心在玉壺 한 조각 맑은 마음은 옥호(옥으로 만든 항아리)에 있다 하소.

 

당림(唐林)이라는 드엉럼은 오랜 역사만큼 이 마을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은 터가 좋은 곳인 듯 왕을 여러 명 배출한 곳이라 합니다.

그중 풍흥(馮興) 왕과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응오꾸옌(吳權) 왕, 두 명의 왕은 부모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왕조를 개척한 사람이라죠.

 

풍흥은 791년 인근 마을의 사람을 모아 당시 중국이 이곳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안남 도호부를 공격하여 이 지역 지배를 끝내게 함으로 2대에 걸쳐 26년 간이나

왕으로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중국 주변의 침략을 예방하기 위해 여섯 개의 도호부를

설치했다는데 지금의 하노이에는 안남도호부를 설치해 베트남과 중부 지방에 있던

참파 왕국 그리고 캄보디아까지 관리하게 했다네요.

 

이런 이민족의 지배에 항거해 대항했기에 포개대왕 풍흥(布蓋大王 馮興)이라고 불렸다네요.

포개대왕이라는 말은 어머니 품과도 같은 왕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비록 짧은 세월인 2대 26년간에 걸쳐 다스렸지만, 그가 이 드엉럼 출신이라고 합니다.

 

또 응오꾸옌은 939년 그 유명한 바익당 강에서의 전투로 중국 천 년 지배를 끝장낸

아주 대단한 일을 했던 위인이라고 하지요.

이로써 응오꾸옌은 베트남 최초의 독립 왕조를 세운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네요.

 

바익당강(白藤)은 베트남 내륙에서 하롱베이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이 강을 이용해야만

중국 남부를 떠난 배가 일시에 빠르고 편리하게 군사를 실어 이동할 수 있고

필요한 물자도 대량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로입니다.

 

바익당(백등:白藤) 강의 전투란 938년 베트남 북부지방에 욕심을 낸 중국 남부의

지방 정권인 남한(南漢)에서 군사를 일으켜 바익당 강을 따라 올라왔답니다.

 

이때 불세출의 영웅인 응오꾸옌은 강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유인해 섬멸했던 전투라네요.

이때의 전술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했던 아주 영리한 전투였다지요?

응오꾸옌 군사는 밀물 때 적과 싸우지 않고 패주하는 척 적이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올라오도록 했답니다.

 

그러나 썰물 때 수심이 낮아지자 미리 강바닥에 박아 둔 말뚝 때문에 퇴각할 수 없이 멈춘

적선을 미리 강 양쪽에 매복해 둔 군사와 상류로 임시 후퇴했던 군사가 삼면으로 공격함으로

일거에 진퇴양난에 빠진 적을 섬멸했던 전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오꾸옌을 왕 중의 왕이라고 추앙한다지요?

 

또 지앙반민(강문명:江文明)이라는 문객을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출입문 위에 강탐화라고 쓴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과거 시험에 장원은 못하고 3등을 했나 보네요.

그는 문인으로 명나라로 사신으로 따라가 숭정제와 만났던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는 왕의 명에 따라 사신의 일원으로 명나라로 들어가 숭정제와 만난 자리에서 숭정제는

비꼬는 말로 구리 기둥이 녹슬어 파랗게 변했다고 하자 그는 바익당 강은

전투로 붉게 물들었다고 답을 하였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은 숭정제는 베트남에도 이런 인물이 있구나 하며 칭찬하더니 돌아서 생각하니

괘씸한 생각이 들어 자기 속이 좁은 것은 둘째고 성질이 우선이라고 그 자리에서

지앙반민을 죽여 배를 갈라 수은으로 채워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구리 기둥이란 한나라 때 독립하려는 베트남에 복파장군이라고 불린 마위엔(마원:馬援)장군을

파견해 공격함으로 무력으로 진압하고 그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의미하고

바익당 강 전투란 위에 언급한 내용대로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일을 입에 올림으로 상대의 아픈 곳을 찔러 욕보이려고 했으니

말대꾸했다고 죽였다지요?

아픈 과거의 상처를 들추어 내고 그 상처에 소금을 톡톡 뿌려댔으니...

 

또 베트남 두 자매인 쯩자매인 하이바쯩의 어머니인 난 티엔(만 선:謾善)이

 태어난 곳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랍니다.

두 자매인 하이바쯩은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 대항했던 여인들이지요.

그렇기에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 어느 도시나 거리 이름을 사용하더라고요.

 

그러니 이곳은 우리나라 민속촌과 비슷한 곳이지만, 인위적으로 꾸민 곳이 아니니

우리나라 민속촌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민 것도 없고 구경거리 자체도

크게 없다는 의미기도 하지요.

따라서 지금 베트남의 집 모습은 앞은 좁고 뒤로 길게 들어가는 기묘한 형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집처럼 기와를 얹은 그런 자연스러운 형태입니다.

물론, 기와의 모습부터 우리나라와는 많이 차이가 나지만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오래된 곳이라서 보호할만한 건축물만도 50여 채가 넘는다고 합니다.

또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축제만도 70여 개라고 하고요.

100년 이상 된 고가만도 37채나 되고 최고로 오래된 가옥이 4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노이에 왔다가 시간이 난다면 한 번 들렀다 갈만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