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17. 09:00ㆍ발칸반도·모스크바 2018/보스니아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모스타르로 오는 도중 차창을 통해 보았던 모습은
아름다운 곳이었고 평화롭기도 했고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총부리를 겨누고 어제까지 이웃으로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같은 마을 사람을 죽였단 말입니까?
한없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오늘 이야기는 조금 무거운 주제가 되겠네요.
지금까지 사라예보에서 보았고 오늘부터 구경할 모스타르의 우울한 모습을
수없이 자주 볼 것 같은 풍경들...
바로 유럽의 화약고 발칸의 이야기 중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모스타르 시내에 있는 저격수의 타워(Sniper Tower)라고
부르는 건물로 내전 당시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이곳에서 이 지역의 지배를 노리던
크로아티아계 민병대는 저격수를 이 건물 위에 배치해 길거리에 나오는 이곳 주민에 대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당시 주변의 총탄 자국이 벌집과도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건물 외벽에
남아있는데 이들은 이웃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웃으로 살아갈 사람들일진대
왜 총부리를 겨누었을까요?
어제까지 호형호제하며 함께 지냈던 이웃이 오늘은 갑자기 돌변해 적이 된 곳,
바로 사라예보와 모스타르가 아닌가요?
우리가 흔히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 말은 분쟁으로 인한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며 언제든지 다시 내전에 휩싸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분쟁의 원인은 정치적인 문제, 민족적인 문제 그리고 종교적인 문제가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터져 나오며 생긴 결론이지 싶습니다.
그래서 인종학살이니 뭐니 하며 우리 입에 올리기도 쉽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지역의 나라들이지 싶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티토가 수립했던 유고 연방이 티토 사후에 연방에 속했던 나라들이
각각 독립하면서 생겼으며 따라서 이 지역을 여행하려면 어느 정도 당시의 역사를
대강이나마 알고 가야 도움이 되지 싶네요.
알바니아와 코소보 문제도 있었지만, 이번에 우리의 여행이 그곳까지는 가지 않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몬테네그로를 거쳐 다시 크로아티아로 올라가기에
이곳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어났던 일만 잠시 보고 갑니다.
당시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 연방의 해체과정에 많은 나라가 독립하면서
일어난 내전이라고 하네요.
터키 지배하에 있던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1918년 유고슬라비아의 하나의 주가 되었다가 1946년 사라예보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의 보스니아와 모스타르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방의 헤르체고비나가 합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네요.
그러다 1980년 5월 티토가 사망하자 분열조짐을 보이다가 그해 말에 동유럽에 불어닥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며 각자도생의 길로 나서게 되었답니다.
1991년 가장 멀리 떨어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마케도니아가 제일 먼저
독립을 선언하고 떨어져 나가자 보스니아도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가결되어 1992년 3월 3일
'오등은 자에 독립국임을..' 이라고 선언하며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주민이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그리고 크로아티아계가 섞여 살았고
그 민족은 종교 또한 각각 인종에 따라 이슬람과 세르비아 정교회 그리고
로마 가톨릭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네요.
독립 과정에서 유럽연합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자 북부지방에 사는
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의 지원으로 또 다른 독립국을 선언하며 1992년 5월 25일
사라예보에 포격을 가하며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답니다.
이듬해는 크로아티아가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을 지원함으로 모스타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내전으로 이곳 네레트바강 인근에서만 67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54%가 보스니아계고 나머지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의 주민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스니아의 보스니아계는 위에서는 세르비아계의 공격에 고통을 받았고
모스타르를 중심으로 남부에서는 크로아티아계의 공격으로 진퇴양난에 처했다고 합니다.
43개월 내전 기간 동안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23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할 정도로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가 4백만 명도 되지 않은 나라에서 내전으로 죽은 사람이 인구의 5%가 넘고
국민 대다수가 난민이었다고 하니 사실 내전이라고는 하지만, 세르비아의 지원 속에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가 이슬람교도인 보스니아를 공격했고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이슬람계의 보스니아를 공격한 일은 인종청소를 한 것이고
이슬람에 대한 종교전쟁인 셈이겠지요.
이에 유럽연합과 유엔의 개입으로 내전이 끝나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간의
연방(이슬람과 로마 가톨릭)과 세르비아 정교회의 세르비아인이 세운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1 국가 2 체제로 교통정리 되었다네요.
한 지붕 두 가족이라는 말인데 사실은 세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지금 4년 동안 세 지역을 대표하는 공동 대통령이 8개월씩 서로 돌아가며
수석 대통력 직을 맡고 있다고 하니 아직도 깨끗하게 교통정리가 되지 않고
임시 땜질식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그러니 이 지역은 언젠가는 다시 터질 지뢰를 임시로 덮어놓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스릅스카 공화국은 따로 살림을 차리자는 분리독립을 꿈꾸고 있으며 만약,
독립선언이라도 하면 다시 뇌관을 건드리는 격이라 적극적으로
의사 표명은 하지 못한다고 하네요.
이들이 종교와 인종을 떠나 함께 뭉칠 수 있다면 쉬운 해결책이 나오겠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로
임시로 감추고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크로아티아는 만약, 세르비아의 조정을 받는 스릅스카가 독립한다면
군대를 파견해서라도 저지하겠다고 하고...
이에 질세라 만약, 크로아티아가 개입하면 세르비아도 그냥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니 잠시 수면 아래 가라앉은 듯하지만,
아직도 불씨는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있는 셈이겠지요.
누구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요?
이렇게 땜질만 한 연방정부가 지금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곳이 이렇게 유럽의 문제...
아니 또는 화약고로 불리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 때문이겠지요.
지리적인 위치가 여러 민족이 만나는 교차점이었고 그들은
민족마다 다른 종교를 갖게 되었고...
결국, 민족이 다른 것도 문제였지만, 갈등의 가장 큰 이유는 종교가 아니었을까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들이 같은 지역에 모여 살며 왜 민족마다 다른 종교를 가졌나 생각해 보면
이는 이 지역이 전통적인 가톨릭인 유럽의 지배 아래에도 있었고 정교회의 소련의
영향력도 컸고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도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하나의 힘이 강해질 때마다 이 지역은 그 힘에 휩쓸리며 지냈기 때문이겠지요.
원인은 발칸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라 생각되네요.
종교가 결국, 정치체제와 결합하면 무서운 파괴만이 남는 것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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