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에 남은 아픈 흔적들

2018. 2. 12. 09:00동유럽, 발트3국, 러시아 2017/폴란드

여기 긴 막대가 있습니다.

그 용도는 무엇일까요?

수감자의 체력단련을 위한 곳일까요?

 

뒤에 보이는 건물은 게슈타포의 관리동으로 그들의 눈에 거리끼면 바로 이곳에 매달아 교수형을 시킨 곳이라네요.

가장 대규모로 교수형에 처했던 일은 1943년 7월 19일 어느 무더운 날...

3명의 수감자를 탈주시키는데 협조했고 바깥세상과 접촉한 혐의로 12명의 폴란드 수감자가 한꺼번에 이곳에서

교수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용도의 막대였습니다.

폴란드 수감자를 교수형에 처한 그런 곳 말입니다.

위의 사진의 왼쪽을 보시면 그때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빨래를 걸어놓은 모습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지옥 같은 곳일지라도 독일 장교를 매수해 이득을 취한 자도 있었답니다.

결국, 그 나치 장교는 그가 저지른 일이 발각돼 바로 이곳에서 함께 교수형에 처했다고도 합니다.

 

이곳에서 죽은 사람은 독가스실에서 죽은 것만 아닐 겁니다.

중노동에 병들어 죽고, 먹지 못해 굶어 죽고...

고문받다 죽고,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죽고...

건강했던 사내도 일시적으로 몸이 아파 일을 못 하거나 비실거리면

즉시 가스실로 보냈고 페놀 주사로 바로 처리했다 합니다.

 

유대 어린이 216.000명, 집시 어린이 11.000명, 폴란드 어린이 3.000명, 슬라브 어린이 1.000명 등

여러 국적의 어린이...

많은 숫자의 유대인 어린이가 바로 이곳 가스실에서 기차로 도착하자마자 살해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232.000명의 어린이를 이곳에서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꽃봉오리는 채 피기도 전에 이렇게 연기와 재로 여기서 사라집니다.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정녕 인간의 광기에 의해 꽃도 피지 못하고 연기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1945년 1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 가스실로 가기 직전이었던 650명의 어린이가 있었고

그중 450명이 15세 이하였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 중간에 보이는 나치 독일군의 손동작 하나로 삶과 죽음이 갈렸다지요?

기차에서 내린 사람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눈 저 사내 말입니다.

 

위의 사진에 제일 오른쪽에 보이는 분이 콜베 신부라 합니다.

종교인도 예외 없이 이렇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합니다.

오늘은 막스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하고 가겠습니다.

 

당시 이곳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 중 한 사람이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면 같은 감방 안에 있는 수용자 10명을

임의로 선발해 별도로 만들어 놓은 굶겨 죽이는 아사 감방에 감금해 그 죄를 물어 열 명을 굶겨 죽였던 모양입니다.

일종의 연좌제인가요?

배추 끓인 멀건 국물을 주며, 먹는 거로 정말로 추접스러운 형벌입니다.

 

어느 날 콜베 신부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강제노동에 견딜 수 없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는 즉시

발각되었고 그러면 같은 방에 있던 나머지 사람에 대한 형벌이 가해졌겠지요.

그때 끌려 나온 10명 중 한 사람이 울부짖으며 나 없는 가족은 어찌 되느냐고 슬피 울었답니다.

이때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16670의 수인번호를 가슴에 단 콜베 신부가 나서며

저 사내 대신 내가 가겠다고 했다네요.

그 길이 그냥 굶는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에 모든 사람이 놀라게 되었겠지요.

 

수용소장 프리츠가 "너는 누구냐?" 묻자 콜베 신부는 그냥 사제라고만 답을 했다네요.

이들 사이에 잠시 시간이 흐르며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가 뱉은 말을 뒤집은 적이 없는 수용소장은

눈을 감은 콜베 신부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자 감히 거절할 수 없어 승낙했다고 합니다.

그때 저녁노을이 아우슈비츠를 비추며 콜베 신부의 얼굴은 저녁노을로 말미암아 평화롭고 인자하게 보이더랍니다.

 

아사 감방은 원래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만 있기에 언제나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합니다.

콜베 신부와 함께 들어온 사람들은 콜베 신부를 따라 아우성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이 노래는 옆 감방으로 전해지고 지금까지 지옥과도 같은 아사 감방은 기도와 노래로 화답하며 점차

다른 수용소로도 옮겨지며 아우슈비츠의 모든 수용소 건물이 노래와 기도로 점철되었다 합니다.

 

한 신부의 사랑으로 지옥과 같은 수용소는 마치 성당과도 같은 곳으로 바뀌어버렸답니다.

콜베 신부는 감방 안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임종을 지켰다고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하직할 때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겁니다.

 

한 신부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아름답습니다.

결국, 수인번호 16670번 콜베 신부에게 1941년 8월 14일 성모승천 대축일 전야에 페놀 주사를 주입함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위의 모형 사진은 지하 가스실과 지상에 설치한 시체를 소각하는 화장장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콜베 신부와 같은 분이 계실까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과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佳人은 우리나라에도 이런 신부님이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나며 많은 사람을 울려버린 이태석 신부 말입니다.

"울지 마 톤즈"라는 TV 프로그램은 울지 말라고 하고는 우리 모두를 울려버렸잖아요.

그러나 이태석 신부 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가스실에서 대량 살상하고 난 후 이렇게 시체를 옮겨 소각했나 봅니다.

 

실내에 이런 당시의 가스실 모형을 만들어 놓아 관람객에게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려 했습니다.

 

당시의 화장했던 화로인가 봅니다.

무척 많은 화구가 보이고 저곳에는 24시간 쉬지 않고 불길이 타올랐을 겁니다.

 

전시된 수감자의 물품을 통하여 잠시 그때 모습을 상상해 보렵니다.

 

장애인이 사용했던 의족이나 기타 장애인보조기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리자마자 우선으로 분류해 바로 가스실로 보냈다 하지요.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살림 도구 일부를 챙겨 온 듯합니다.

당시 법랑이라는 식기는 무척 고가로 알고 있습니다.

생활 수준이 상당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상용품인가 봅니다.

 

그들이 들고 온 가죽 가방입니다.

당시에 여행용 가방은 이런 가죽 가방을 주로 사용했나 봅니다.

이름과 출신 지역을 적어 보관했다 나중에 돌아갈 때 반환한다고 했겠지요.

 

아이의 인형에 자꾸 눈길이 머뭅니다.

1942년 6월 12일 안네는 아버지로부터 13번째 생일을 맞아 일기장을 선물 받습니다.

혹시 그 일기의 주인공 안네 프랑크의 인형이었을까요?

 

아이들의 구두입니다.

 

구두만으로는 부족해 구두 약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로 챙겨 오지 않을 물건입니다.

 

수감 중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의 안경입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입니다.

이 머리카락으로 카펫도 짰는데 카펫에 땋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면도용 솔과 머리 빗는 빗 그리고 칫솔도 보입니다.

5동 건물에는 주로 죽은 자의 유품이 남았습니다.

죽은 자라도 이렇게 우리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일본 총리처럼 살아있어도 우리 기억에 없다면 그게 죽은 자입니다.

인간이라도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 자도 짐승이지 인간이 아니잖아요.

 

위의 사진은 이곳에 수용된 사람의 출신 성분에 따른 인식표입니다.

우리는 주로 별 모양의 삼각형 두 개가 서로 반대로 놓인 유대인 인식표만 기억하지만,

그 이유는 이곳에 수용된 인원 중 유대인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실상 이렇게 많은 부류의 사람이 나치에 의해 강제로 수용되었다 합니다.

국적도 가리지 않고 나치의 장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면 모두 잡아들였나 봅니다.

 

요즈음 남녀를 막론하고 하는 타투라는 문신...

예전에는 무서운 엉아들이나 하는 문신이었지만, 최근에는 멋을 위해 많은 사람이 남녀 구분 없이 하더군요.

그때 이곳에서의 문신은 수감자를 구분하기 위한 표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실험에 이용되다 보니 처음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기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문신을 했다고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러니 당시는 문신은 천형이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하더라고요.

문신도 그 역사를 알고 보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가 봅니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서 운영한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입니다.

물론, 이런 수용소가 여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