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로마노 마지막 이야기

2016. 9. 5. 09:00이탈리아 여행기 2015/로마

 

포로 로마노에는 사실상 온전한 모습을 지닌 건축물이 거의 없습니다.

유럽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던 로마 제국의 심장이었음에도 말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로마가 이곳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도읍을 라벤나로 이전하며

돌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여기는 로마의 중심에서 졸지에 변두리가 되어버린 셈이잖아요.

 

 

 그다음은 이곳에 닥친 지진의 여파로 포로 로마노가 대부분 파괴된 후 

다시 복원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겠죠.

그뿐만 아니라 이곳은 처음부터 낮은 저지대로 습지였던 곳을 배수시설을 하며

포로 로마노로 개발된 곳인데 그런 로마가 사라지니 점차 낮은 지대가 매몰되기

시작하며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위의 사진을 보니 외로운 원기둥 하나만 달랑 서 있습니다.

이 기둥이 포카 황제 기념 원주(Colonna di Foca)라고 하고 로스트라 연단 앞에

우뚝 서 있는 포카 황제 기념 원주는 608년 동로마 황제 포카에게 바쳐진 것으로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기념비라고 하니 어린 막내인 셈입니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웠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포카 황제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물이라고 하네요.

지금으로 치면 방문 기념식수라는 의미지 싶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 신전으로 그는 티투스의 아버지였다고 하네요.

입구에서 보았던 티투스 개선문의 주인공으로 티투스는 저항하는 예루살렘을 잔인하게

진압한 인물이라 하며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과 사투르누스 신전 사이에 보이는

기둥 세 개만 남은 신전터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 황제 이후 혼란한 시기를 종식한

 황제로 그를 기념하기 위한 신전입니다.

 

 

네로 황제 자살 후 갈바, 오토 그리고 비텔리우스 황제가 몇 개월 사이로 등극했지만,

모두 측근에 의해 살해되거나 자살함으로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는 로마 최초의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라고 하네요.

 

 

캄피돌리오 언덕에 붙어있는 신들의 주랑이라는 포르티코 데글리 데이 콘센티

(Portico degli Dei Consenti)입니다.

19세기 중반 복원한 것으로 열두 개의 기둥이 있고 그 뒤로 열두 개의 방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곱 개만 남아 있으며 바로 이곳 위로는 테라스가 있어 포로 로마노의

전경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죠

 

 

셉티미우스 세베레스 황제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입니다.

포로 로마노 발굴이 시작되며 가장 먼저 발굴된 곳이 바로 이곳이며

포로 로마노의 북쪽 끝에 있어 캄피톨리오(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어 포로 로마노 출입구에 있네요.

 

 

 

셉티미우스 세베레스 황제의 10년 통치를 치하하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의 파르티아,

아라비아, 아시리아 등지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과 시민들이 203년에 세운

개선문으로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자화자찬이 주 내용이지 싶습니다.

 

 

이곳에 새겨진 신들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합니다.

개선문에는 동방원정의 모습인 파르티아(지금의 이란과 이라크)와

아라비아 전투의 모습이 부조로 남아있습니다.

포로로 잡은 적의 병사의 팔을 뒤로 묶어 끌고 가는 모습도 보이네요.

 

 

황제의 모습에서부터 병사의 전투 장면...

본래 문 상단에 세베레스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답니다.

 

 

그러나 세베루스가 죽은 후 카라칼라는 혼자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동생 제타를

죽이고 문 위에 새겨졌던 동생의 이름을 지워버렸답니다.

어쩌면 로마의 시조였던 로물루스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까요?

그러나 역사란 늘 승자만의 역사는 아닙니다.

 

 

역사는 반복되기에 그랬나요?

권력이란 부모, 형제도 제거해야 하는 게 권력의 속성이지 싶습니다.

황제란 늘 자식이나 형제를 감시하고 자식은 언제나 형제와 아비를 주시하고

살았지 싶습니다.

그런 내용을 알고 보면 영광스러운 개선문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취하기 위해

형제까지 살해한 파렴치한의 얼굴입니다.

 

 

여기도 로마 원로원과 시민을 의미하는 S P Q R (SENATUS POPULUS QUE

ROMANUS)라는 말이 보입니다.

사실은 셀프로 만든 개선문을 이렇게 원로원과 시민이 황제의 공덕을

기쁘게 받아들여 세워주었다는 억지 춘양이지요.

로마의 상징인 SPQR이라는 단어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말이죠.

 

 

많은 여행자가 찾는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한 곳인 이곳

포로 로마노는 아름다운 모습만 있지 않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면 무너진 돌무덤뿐이며 폐허로 보이지만,

이곳에 있는 돌덩이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놓여있지 않고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하기에 여행자는 그런 의미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닐까요?

 

 

위의 사진을 눈여겨보십시오.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운 골든 마일스톤이라는

밀리아리움 아우레움(Miliarium Aureum)입니다.

이 황금의 이정표는 너무 평범해 흔히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바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말의 근원이지요.
53.000마일이나 되는 로마 제국의 도로는 놀라움 바로 그 자체로 로마 제국의

번영을 이끈 근간이라고 해야 하며 이 원표가 어디 로마만의 원표겠어요?

세상의 모든 도로의 원표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로의 폭은 직선구간은 8피트, 곡선구간은 16피트, 이정표는 천 걸음마다 세우고...

로마는 도로까지도 이렇게 과학적으로 수치화했습니다.

이런 모든 도로의 원표라고 봐야 하겠지요.

 

 

당시 1마일의 기준은 여기부터 테르미니 역 앞에 있는 세르비안 장벽 문까지로

정했다는데 직선거리로 1.72km 정도 되니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마일은 영국에서

정한 것으로 1마일을 1.6km로 계산하니 거의 비슷하네요.

당시 로마 병사의 행군 거리였던 한 걸음인 두 발자국을 기준으로

천 걸음을 1마일로 정했다고 하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포로 로마노가 이처럼 처참하게 폐허가 된 이유는 로마 공회당의 역할이 없어졌

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이처럼 완전히 파괴된 이유는 이곳에 있던 유적을 모두 떼어가

성당 건축 등에 사용할 때 마구잡이로 떼어내다 보니 재사용이 어려운 깨진 것은

그냥 버렸고 쓸만한 석재는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사용하기 불가능한 이런 것만 남아있기에

지금처럼 안타까운 모습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