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 슈퍼카 그리고 슈퍼스타

2016. 1. 5. 08:00이탈리아 여행기 2015/모데나

위의 사진은 세계 3대 테너인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엔초 페라리의 사진입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걸었지만, 공통점이 있다고 하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두 사람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공통점이라고요?

첫 번째가 바로 이곳 모데나 출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점, 자기 영역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 

야망과 그 야망을 달성한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점등 나이는 페라리가 37살이나 많았지만, 서로를 각별히 존중했던 사이였다고 하네요.

그 이유로는 엔초 페라리의 어린 시절 꿈 중 하나가 바로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꿈을 지닌 페라리였기에 같은 고향 출신인 파바로티를 아끼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파바로티가 이제 성악가로 두각을 나타낼 즈음 엔초 페라리는 그를 마라넬로 공장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네요.

당시 파바로티는 신성으로 아직 유명하지 않았기에 비싼 차는 탈 수 없었고

마세라티 쉐브링 중고차를 가지고 있었다네요.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마세라티 쉐브링이 중고차로 파바로티가 타고 다녔던 바로 그 차입니다.

새 차를 살 수 없었던 파바로티는 신인이라 돈이 많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 내 이담에 돈을 벌면 이런 멋진 슈퍼카를 살 거야!"

평소 차에 관심이 많은 파바로티는 공장을 방문해 공연보다 자동차에 더 눈이 번쩍 띄었을 겁니다.

 

지금 박물관에는 이 두 차가 모두 전시 중이랍니다.

박물관에는 자동차 전시와 함께 영상쇼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엔초와 파바로티라는 영상전입니다.

 

파바로티의 공연 실황이 대형 영상으로 보이고 있고 이 공연 실황을 영상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입장료를 뺄 수 있겠네요.

물론, 늘 하는 게 아니라 2016년 2월까지 한시적으로 한다네요.

이미 고인이 된 파바로티의 공연이 아니겠어요?

 

페라리의 로고인 뛰어오르는 말인 프랜싱 호스(Plancing horse)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이 말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투기 조종사였던 프란체스코 바라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비행기에

그려놓은 것이라 하네요.

그러니 일종의 부적인 셈이죠.

전투기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하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안전에 대한 부적을 지니고 싶어 하니까 어울린다고

하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안전에 대한 기원은 다 같은 것이잖아요.

 

그래서 프랜싱 호스를 다른 말로 바라카의 말이라고도 한답니다.

엔초 페라리는 라벤나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에 참석했을 때 우연히 바라카의 부모를 만났답니다.

평소 페라리를 좋아하는 바라카의 부모가 아들이 전투기에 그려놓은 말 그림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이야기하며

페라리가 타는 경주용 차에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했다 합니다.

 

페라리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말에 솔깃해 그냥 검은색의 말보다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 모데나의 상징색

노란 바탕에 부적 같은 바라카의 말을 그려 넣었고 이게 바로 지금의 페라리 로고의 시발점이 되었다네요.

방패형 프레임은 페라리 레이싱 팀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로고 아래에 보이는 영문 S와 F는 마구간을 의미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의 첫 글자로

1929년 페라리가 그의 공장을 세울 때 사용한 이름이며 F1 레이싱 팀을 창설할 때 사용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는 열 살 때 볼로냐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를 보고 그게 자기의 운명임을 깨닫고 이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네요.

어린 나이지만, 이렇게 세상을 개척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네요.

꺼진 불만 잘피지 마시고 열 살 된 손자도 눈여겨봅시다.

 

13살에 운전을 배우고 스무 살에 트럭 운전사가 되었지만,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였던

페리체 나지로를 만나며 그의 소개로 스포츠카 제작사로 직장을 옮기며 그곳에서 레이싱 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서로 출발하게 되었다네요.

레이서로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레이싱 자동차를 개조하며 나중에 결국, 그만의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하며

지금의 페라리 자동차가 탄생하게 되었다네요.

 

그가 설립한 스쿠데리아 페라리 레이싱 팀은 1988년까지 무려 5천 번의 우승을 했다고 하니 대단하네요.

그는 90세의 일기로 1988년 지금의 공장이 있는 마라넬로에서 마지막 역작인

F40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숨졌다 합니다.

F40은 슈퍼카의 큰 획을 그은 차라고 하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그가 처음으로 페라리를 손으로 두드려 만든 연구소 겸 공장입니다.

2012년 개조한 후 지금은 엔초 페라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죠.

 

원래 아버지였던 알프레도 페라리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곳인데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해 전시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주로 엔진 위주로 전시하고 그 뒤로 보이는 외계인이 지은 듯한 건물은

영상실과 식당과 일부 클래식카도 전시 중입니다.

그리고 초창기 경주용 차가 전시되어 있지요.

 

헉!!!

개집 너마저도?

페라리인가?

페라리는 신차 개발을 위해 한때 돈이 모자라 이 건물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곳이 노란색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노란색은 모데나의 색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지역이 폭격으로 일부 파괴되며

지금의 공장이 있는 마라넬로로 옮겨 지금에 이르렀다네요.

 

페라리는 전통적으로 V12 엔진을 사용했다 하네요.

작은 엔진을 싫어한 이유가 전문 레이서였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강한 엔진만이 승리라고 생각했지 싶습니다.

 

그는 아들인 알프레도 페라리를 위해 만든 차에도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디노라고 불렀답니다.

그 이유가 V12 엔진이 아니고 V8, V6 엔진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네요.

그는 V12 엔진만이 진정한 스포츠 카고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나 봅니다.

 

좌우지간 그는 진정한 경주용 차는 V12 엔진이 기본이라 여겼나 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일은 이번 이탈리아로 여행하며 슈퍼카라는 페라리는

박물관에서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페라리의 도시인 모데나는 물론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도 말입니다.

 

이탈리아 도로를 달리는 페라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았으나 단언컨대 한 대도 찾지 못했습니다.

여기도 페라리는 상상 속의 슈퍼카일 뿐 차를 운전하는 대부분 운전자는

저렴하고 작은 차만 몰고 다닐 뿐이었습니다.

 

몇 대 더 보고 오늘 이야기를 마칩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이런 차를 구경할 수 있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페라리는 역시 꿈의 슈퍼카인가 봅니다.

공장이 있는 모데나 마라넬로에서는 공장 앞에서 시승을 권하는 불법 영업하는 차량 외에는 페라리를 볼 수

없었고 3주간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도중 한 대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들도 페라리는 그림의 떡인가요?

이태리에는 페라리뿐 아니라 우리나라 목욕탕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태리 타월도 없더이다.

그럼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커피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