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3. 08:00ㆍ스페인 여행기 2014/코르도바
코르도바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로 풍요롭고 귀한 도시라는 의미라 합니다.
화려한 이슬람 문화가 꽃피었던 코르도바.
코르도바는 당시 유럽에 진출한 이슬람 문화의 중심점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문화를 지닌 곳이지만, 구경 다니다 보니 왠지 쓸쓸한 느낌이 있는
곳으로 패퇴한 세력의 문화라서 그럴까요?
만약, 그들이 지금 이곳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의 자랑거리였던 메스키타는 닫혀있습니다.
화려했던 황금색 문을 닫고 말입니다.
비록 문은 닫혀있지만, 문양이며 균형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어느 날 홀연히 건너와 화려하게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그들이 아니겠어요?
코르도바는 아브드 알라흐만이 929년 칼리프(Caliph)를 선언했을 당시
전성기를 맞이했다지요.
칼리프란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최고 권위의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하며 왕이
칼리프를 선언한다는 말은 종교 지도자를 왕이라는 술탄이 겸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인간으로서의 최고 권위를 갖는 술탄에 신의 뜻을 대신하는
전지전능한 권력을 갖는다는 말이 아닐까요?
칼리프란 신과 대등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인 걸요.
당시에 인구만 100만 명에 가까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살았던 융성했던 도시라 하니
세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 중 하나였지 싶습니다.
그런 곳을 통치하는 술탄이기에 인간으로서 최고에 오르는 칼리프가 탐이라도 났던 모양이지요?
이 말은 이슬람 세력이 유럽 대륙에 건설했던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라는 말이고
그런 도시를 지배한다는 말이지 싶네요.
그때 이베리아 반도뿐 아니라 북아프리카까지 그의 힘이 미쳤다 하니 맹주라고 해도
되겠는데 그래서 코르도바를 서양속의 동양이라고도 하고
유럽의 콘스탄티노플이라고도 불렀나 봅니다.
코르도바에는 모스크만 천여 개에 목욕탕이 300여 개라 하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 많은 모스크 중 오직 하나만 남아 그 화려했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메스키타(Mezquita-catedral de Córdoba)로 부르는 모스크입니다.
저 젊은이는 골목 색깔에 맞추어 옷 색깔도 비슷하게 통일했을까요?
이곳에는 그때 대학도 있어 모든 학문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 하네요.
당시 도서관에는 필사본으로만 100만 여권의 책을 소장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말이겠죠.
이미 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 시 세 개의 통치령으로 나누어 관리할 때
그중 하나였던 바에티카의 수도였다지요?
스토아학파를 이끈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와 로마의 대시인
루카누스가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지 싶습니다.
711년 처음 이곳에 발을 디밀고 들어온 이슬람의 무어족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둔 우마이야 왕조에 예속된 지방정부로 시작했다 합니다.
어느 날 시리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왕자는 이곳으로 건너와 새로운 세상을 열었지
싶은데 그러니 나중에 따로 왕국을 만들며 홀로서기에 성공해 다마스쿠스 못지않은
문화를 만들었다는 말이네요.
이때 이 지역을 카르투바(Kartuba) 또는 쿠르투바(Qurtuba)라고 불리며
지금의 코르도바가 되었답니다.
756년 압둘 라만 1세가 후에 안달루시아 지방의 이름이 된 안 달랄루스 왕국을 건설했고
766년 드디어 코르도바 왕국을 정식으로 선포하며 하나의 독립된 왕국으로
출발하게 되었다네요.
우리가 구경하며 감탄했던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와는 다르게 먼저 코르도바에서 화려하게
발달했지만, 나중에 그만 먼저 사라져 버린 왕조가 되며 그 후 이곳의 귀족으로 지냈던 사람이
나스르 왕조를 만들며 무어족의 전통을 이어받아 독자생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시가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과달키비르 강이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 강이 바로 세비야로 흘러들어 가 콜럼버스의 대항해가 시작되기도 했던 바로
그 강으로 그때 이곳 알카사르에서 이사벨 여왕과 그의 부군인 페르난도 2세를
처음 만난 콜럼버스가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베리아 반도에서 과달키비르 강이 대단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756년 이슬람이 이곳에 발을 디딘 후 여기는 바로 우마이야 왕조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후일 우마이야 왕조는 북으로부터 나날이 융성해지며 세력을 키워 내려오는 가톨릭 세력에
스스로 더는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해 이 도시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이곳 우마이야 왕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지요?
우마이야 왕조가 스스로 사라지자 이곳에서 귀족으로 지냈던 이븐 알 아마르가 스스로
무하마드 1세라 하고 1237년 세력을 규합하고 이듬해 나스르 왕조를 세우고 점차 밀고
내려오는 가톨릭 세력과 담판을 짓고 코르도바를 고스란히 넘겨주고 대신 그 아래 안달루시아
지방의 자치권을 얻어 그라나다로 도읍을 옮기고 알람브라 궁전을 짓기 시작해
나스르 왕조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호랑이 떠난 굴에 토끼가 호랑이 가면을 쓰고 술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가톨릭 세력의 카스티야 왕에게 공물까지 바치는 비굴한 조건으로
지탱하기 시작했답니다.
뭐 이런 비굴한 방법이 배 째고 들어가나요?
후일 힘을 키워 모로코에 있는 같은 민족의 왕국과 힘을 합쳐 대항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쳐 실패로 돌아가며 지는 태양이 되었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그 이듬해인 1238년 사비카 언덕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귀족으로 지내다 나라 하나를 거저 주은 셈인가요?
코르도바는 그라나다와 같은 무어인의 나라지만, 이렇게 태생이 다른 나라였습니다.
1237년부터 시작한 나스르 왕조는 1492년 마지막 왕인 보아브딜이 보따리를 챙겨
알람브라를 버리고 시에라 네바다 산맥 한탄의 고개를 넘어 아프리카 모로코로
돌아갈 때까지 제법 긴 시간인 255년간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지 뭡니까?
사실 공물을 계속 바치고 더 오래도록 살 수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자존심 때문에
공물을 거부함으로 카스티야 왕궁에 미운털이 박혀 결국 알람브라 궁전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거덜 나고 말았다는데 그놈의 자존심만 꺾었더라도 더 그곳에서 왕 노릇하며
더 오래도록 살았을 텐데...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온 이슬람은 가톨릭과 유대인을 핍박하지 않았으므로
3대 종교와 문명이 이곳에서 용광로처럼 서로 교류하고 융합하여 암흑시대의
구덩이에 빠져 있던 유럽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지금도 유대인이 살았던 흔적이 유대인의 거리(Judios)라고 남아있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무어인들은 그냥 그들을 포용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유대인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그들의 뛰어난 상술과 재능을 활용했다고
했으며 덕분에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거리를 꾸미고 살아갈 수 있었답니다.
귀족이나 왕실에서는 유대인에게 재산관리를 시켰고 교육이나 많은 부분에서
이들의 능력을 활용해 나라가 번성했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당시 코르도바는 국제적인 도시였고 개방된 세계화된 도시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 후 레콩키스타로 무어인을 몰아낸 기독교 세력은 개종을 강요하고 따르지 않는 이들을
추방하며 한때 문화적으로 암흑기를 맞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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