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비엥침(Oswiecim) 그리고 아우슈비츠(Auschwitz)

2013. 12. 23. 08:00동유럽 여행기/폴란드

오늘은 우리에게는 아우슈비츠로 더 많이 알려진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침에 체코의 올로모우츠를 구경하고 방금 국경을 넘어 폴란드 땅으로 들어왔다는 말이군요.

동유럽 여행이란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왔네요.

 

원래 이곳의 지명이 오시비엥침이나 독일이 이곳에 수용소를 만들어 운영함으로 독일에서 부르는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곳이지요.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인구 5만 명의 아주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랍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 나치 독일은 천인공노할 짓을 했더란 말입니다.

 

당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크기인가 봅니다.

항공사진으로 찍었나요?

그 규모가 정말 엄청나게 큰 곳이네요.

 

독일이 이곳에 수용소를 만든 이유는 풍수지리에 따른 것도 아니고...

아마도 독일과 가깝고 중부 유럽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기에 수용소로 이송 관리하기가

가장 좋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기차선로가 있고 크라쿠프라는 도시가 있어 오고 가기 편했을 겁니다.

 

오시비엥침의 위성사진입니다.

우리가 구경한 곳은 오른쪽 아래의 작은 원 안에 보이는 제1 수용소입니다.

그러나 사실 제2 수용소가 엄청나게 큰 곳이죠.

제3 수용소 모노비츠는 셋 중에 가장 큰 수용소로 독일이 패망하며 대부분 폭파해 흔적뿐이라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폭파하지 않았을까요? 

 

위에 보이는 기차역은 현재도 사용하는 기차역이고 아래에 보이는 역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역으로

당시 강제로 이곳에 끌고 온 사람이 내린 곳이랍니다.

이 작은 도시에 이런 엄청난 기차역을 두 개나 만들어 운영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끌고 왔을까요?

위의 사진을 보면 헝가리로부터 지금 막 도착하는 유대인이군요.

 

물론 그 기찻길에서 이곳 수용소까지 기차선로만 잠시 연결하면 아주 쉽게 수송하리라 생각했겠지요.

어떻게요?

바로 위의 사진이 답을 대신합니다.

그런 생각에 여기다 수용소를 만들었고 운영했을 겁니다.

물론, 새롭게 만든 것은 아니고 원래 폴란드 군영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을 폴란드 침공 때 접수했을 겁니다.

 

올로모우츠에서 10시 40분경 출발한 버스는 체코와 폴란드 국경을 지나 1시가 조금 넘어 오시비엥침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식사부터 해야 합니다.

감자채와 국수처럼 생긴 음식 그릇에 뜨거운 육수를 부어 수프로 먼저 먹습니다.

 

우리 일행이 먹은 음식은 우리나라 감자전 같은 폴란드 전통음식인 플라츠키라는 음식입니다.

맛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아주 잘 맞는 음식이네요.

다만, 식당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후식으로 먹은 아이스크림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나오는 수프를 담아오는 큰 그릇이 서빙 도중 너무 무거워 아가씨가 그만 떨어뜨려 박살이

나는 일이 벌어졌고 두 번째로는 플라츠키라는 음식을 서빙하던 아가씨가 아까 수프를 쏟은 장소가

미끄러워 다시 넘어지며 양손에 든 도자기 그릇이 또 박살이 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폴란드는 우리 일행을 아주 지나치게 환영하나 봅니다.

이 지방에서는 그릇이 깨지면 길조라 했나요?

마음이 따뜻한 예쁜 아가씨가 크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식사를 한 식당은 오시비엥침에 있는 곳으로 바로 부근에 수용소 건물이 있어 1시간의 여유가 있어 좋습니다.

입구에 도착해보니 엄청난 인파입니다.

2시 20분 오시비엥침 입장을 하는데 역시 폴란드에 사는 현지 한국인 가이드가 식당에서부터 동행합니다.

아주 재미있고 명랑한 아가씨네요.

 

프라하에서 합류했던 아가씨는 그곳 쇼핑센터 직원으로 보였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살게 되었냐고

인사치레로 물었더니 '그걸 내가 왜 대답해야죠?' 하며 쏘아붙여 민망했다고 하더군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함께하는 사람에 즐거움을 주고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찬바람이 부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런 사람은 혼자 산에 들어가 도나 닦지 왜 속세에 내려와 관광가이드를 하나 모르겠습니다.

뭐... 그런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도를 닦는다고 쥐뿔이나 닦겠어요?

 

우선 박물관 앞에 도착하면 각 언어별로 현지인 가이드의 지시를 받고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 가이드인가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어제처럼 아닙니다.

오늘도 현지 가이드는 그냥 또 공 먹은 가이드입니다.

 

우리는 아까 식당에서 이곳을 설명해 줄 한국인 현지 가이드를 만나 여기에 왔으니까요.

우선 수신기가 하나씩 주어집니다.

실내에서 방만 다르면 들리지 않는 아주 짧은 거리의 수신기지만, 무척 편리한 것입니다.

 

폴란드 가이드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웃음만 주고받는 역할입니다.

전시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도 있고 허용되는 곳도 있고 플래시는 금하지만

찍을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물론, 외부에서는 마음껏 사진을 찍어도 누가 뭐라지 않습니다.

 

이제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정문 안으로 큰 나무가 서 있습니다.

저 나무는 정문을 통해 드나들던 그때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까요?

가을을 알리는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계절은 알아도 사람 드나드는 것은 알지 못할 겁니다.

 

우리 눈에 아주 익숙한 정문이지요.

이곳을 소개할 때마다 언제나 시작은 이 정문입니다.

정문 위의 저 글은 이곳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를 소개할 때마다 언제나 보이는 글일 겁니다.

 

"ARBEIT MACHT FREI"

"노동만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한 자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영어로 "WORK MAKES FREE"라 해도 되겠지요?

이 문을 통해 드나들며 수용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며 그들이 내세우는 얄팍한 잔꾀...

 

그런데 말이죠.

'B'라는 글자를 자세히 보세요.

거꾸로 달아놓은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답니다.

바로 이 문을 만든 수용소 사람이 저항의 의미로 이렇게 거꾸로 글자를 달았다는 말이 있답니다.

 

오시비엥침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바로 이문을 통해 드나들며 12시간이 넘는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겁니다.

그래도 그나마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더라도 이 문을 드나들며 다녔던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은 기차에 내리는 순간 바로 독가스실로 보내졌다 합니다.

 

내일은 안으로 들어가 더 살펴보렵니다.

이곳은 우리 민족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그런 곳이라 생각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이곳 아우슈비츠에서 느끼는 감정은 유대인보다는 못하겠지만,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사후처리 방법과 일본을 비교하면 일본은 정말 구제불능의 민족임이 분명합니다.

일본이 이웃이며 영원히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문제입니다.

 

감춘다고 감추어질 일이라면 오죽 좋겠습니까?

지금 일본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고 어둠 속에 과거의 잘못을 모두 감추었고 숨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얼마 전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무릎을 꿇고 그때의 일을 다시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총리는 사과는커녕 진실마저 감추려고만 하며 과거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거짓말만 합니다.

 

일본은 독일의 그런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생각이나 하겠어요?

개도 잘못을 저지르면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