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락당(湛樂堂) 하립과 삼의당(三宜堂) 김씨 이야기

2022. 12. 16. 04:00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佳人의 이런 저런 그런 이야기

 

얼마 전 마이산을 찾았다가 남부주차장에서 마이산 탑사로 진입하는 도중 위의 사진에

보이는 탑영지라는 호수 근처에서 250여 년 전 이 지방에서 살았던 부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주인공은 담락당(湛樂堂) 하립이라는 남편과 삼의당(三宜堂)

김 씨라는 부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인물이었고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여 이곳에 잠시 옮겨볼까 합니다.

우리가 조선시대 여류 문인으로는 허난설헌이나 신사임당은 이미 알고 있었고

황진이나 이옥봉 그리고 홍랑도 대강은 알고 있지요.

 

 

담락당과 삼의당이라고 호를 사용했던 하립과 그의 부인 김 씨 부부는

마이산 기슭 마령면에서 200년 전 살았던 특이하게도 부부 시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여인이 썼던 글은 대체로 보존되어 전해지지 않았는데 삼의당은 여성의 이름으로

시문집을 출간하여 후대에 전한 희소성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가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나아가 삼의당의 시를 통해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여성의 일상과

시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텅해 당시 시대상마저 엿볼 수 있기도 하다네요.

남편인 하립이 시용했던 호였던 담락(湛樂)이라는 의미는 평화롭고 화락하게

즐김이라고 하니 한평생 살아가며 유유자적 여유로운 삶을 추구했나 봅니다.

 

 

또한 남편 담락당은 자신의 시적 재능을 후세에 남겼을 뿐만 아니라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당시에 부인이었던 삼의당의 시에 대한 열정을 펼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 인물이었기에 더욱 가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랬기에 부부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 후세이 이렇게 이곳에 부부의 시비를 남기고

작으나마 재실도 만들고 또 문학공원 같은 공원도 꾸며두었네요.

이 시비를 통해 진안 부부 시인의 문학적 위업을 확인할 수 있다.

 

 

부인 김 씨는 여성이기에 이름은 전햊지 않고 본관은 김해(金海)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당호는 삼의당(三宜堂)이라고 했고요.

전라도 남원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나 같은 해 같은날 출생이며(1769년)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혼인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부가 같은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이는 하늘이 정한 운명적인 부부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위의 사진 속의 시비에 보이는 부부가 지었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두 사람이 결혼 첫 날밤에 이런 시를 지음으로 백년해로를 하려고 했나 봅니다.

 

初夜唱和(첫날밤에 서로 시를 짓다)

 

夫婦之道人倫始 부부는 인륜에서 비롯되어

所以萬福原於此 만복의 바탕이라

試看桃禾詩一篇 桃禾詩 이 한 편을 마음속 새겨보오

宜當宜家在之子 온 집안 화목해야 온갖 일 이뤄지리

남편 湛樂堂(담락당)

 

왼쪽에는 삼의당 김 씨가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화답의 노래

配匹之際生民始 부부는 백성에서 비롯되어

君子所以造端此 군자의 기본이라

必敬必順惟婦道 공경과 순종함은 오로지 아내의 길

終身不可違夫子 님의 뜻 종신토록 어기지 않으리오

부인 三宜堂(삼의당)

 

 

삼의당 김 씨는 몰락한 양반 댁 규방 출신으로, 257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겨

조선 시대 가장 많은 한시와 문장을 남긴 여성 시인이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 속의 명려각은 이들 부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제실이겠네요.

 

 

한날한시 같은 마을 남원에서 태어난 담락당 하립과 열여덟에 혼인해

서른두 살 진안으로 이사해 살았으며 가난한 살림 가운데

남편을 향한 애정과 전원의 풍치를 담은 시로 서로 화답하며

성리학에서 칭송하는 여성의 덕을 온전히 실현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당시 사회상은 성리학을 토대로 한 유교 사상이 극심했던 때가 아닌가요?

 

 

18세기 조선 후기에 여염집 여인으로서 가장 많은 한시를 남긴 삼의당 김 씨는

 "삼의당 김부인 유고"에서 스스로를 “호남의 어리석은 부녀로 태어나

깊은 규방에서 성장해 경사(經史)를 넓게 살피지는 못했고,

그저 언문으로 소학을 해독하고 글 읽는 법을 깨우치며 여러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대략 섭렵했다”라고 겸손히 본인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익히고 수양한 내용은

유교 가문에서 내려오는 규범이고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였으니,

그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터득하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네요.

 

혼인 후에는 삯바느질로 시부모를 부양하고 남편의 과거 수발을 하느라

오래도록 몹시 고단하게 살았던 그녀,

곤고한 생활 가운데 꾸준하게 작성한 시와 산문 257편은

조선 후기 여성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겠네요.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런 많은 글을 쓰고

남겼다는 것이 정말 놀랍습니다.

 

 

당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전통인 가문의

영달을 위해 남편은 결혼 후 부모 공양은 물론 가사 일체를 아내에게 떠맡긴 채

절에서 공부하고 한양에 올라가서 과거 준비에 매달린 채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는 형편이었겠지요.

 

삼의당은 남원 서봉방 한동네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기이한 운명의 각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아마도 전생에도 부부가 아니었을까요?

그랬기에 떨어져 있는 동안 남편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애달프게 읊은 시(時)들과 함께 초라해지는 감상을 애써 삼가고,

마음을 굳건히 하며 남편에게는 오로지 학업에 정진하실 것을 독려하는

기운 넘치는 당찬 시를 꾸준하게 작성했다고도 보이네요.

 

 

십여 년을 그렇게 소진했으나 남편은 결국 벼슬길에 들지 못한 채 공부를 접고

낙향한 후 이들 부부는 진안으로 이사 후 안빈낙도하는 삶을 지키고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생활을 노래하는 시들로 화답하며 더욱 도타운 사랑을 계속 읊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니러니 하게도 과거에 낙방한 것이 오히려 부부 사이를 도탑게 하고

부부가 더욱 깊게 사랑하게 되었고 많은 글을 날길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평생소원이던 입신양명의 꿈을 접고 시골 살림으로 자족할 각오를 하고

진안에 안주 후에도 남편은 몇 번 더 과거에 응시하고 번번이 낙방했다고 합니다.

예나제나 입신양명을 위한 남자의 길은 쉽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삼의당은 풀리지 않는 인생 항로에 색다른 운치를 담아

고즈넉한 전원시로 읊으면서 실망을 추슬렀다고 하네요.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마치 신선놀음을 하듯 서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인

삼의당과 담락당이라고 서로를 부르며 시로 화답하고 서로의 사랑을 완성해갔다고 보입니다.

 

 

그녀 사후에 출간된 유고 두 권은 총 111편 253수의 시집과 편지 6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지(雜識) 6편 등 총 26편이 실린 산문집으로 되어 있다고 하네요.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남편 하립과 그녀의 합장묘가 있으며

마이산 탑영제 호반가에 이들을 기리는 시비가 있습니다.

삼의당이 태어난 남원 교룡산 관광단지 내에도 그녀의 시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삼의당과 담락당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서로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중년에 선영(先瑩)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안 마령면(馬靈面) 방화리(訪花里)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시문을 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삼의당김씨의 문집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의 평생소원은 남편이 등과 하는 것이어서 산사에서 공부하도록 독려했다지요.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 하지 못하였고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 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죽은 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23년 6월 20일에 5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남편 하립은 1830년에 61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며 묘는 진안 백운면 덕현리에

그 남편과 함께 쌍봉장으로 하였다네요.

 

같은 날 태어나 같은 날 죽지는 못했지만, 남편과 함께 묻혔으니 사후의 사랑도 영원하지

싶은데 그 부부의 업적과 사랑을 기리기 위해 진안 마이산(馬耳山) 탑영지(塔影池) 부근에는

지금 우리가 보았던 시비 "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부부 시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마이산의 두 봉우리에 혹시 두 사람의 사랑이 흠뻑 깃들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