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22.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일단 오늘밤에 타고 갈 배표를 예약하고 홍애동(洪崖洞)이라는 곳으로 왔습니다.
여기는 참 이상한 동네입니다.
지난밤에 조천문 광장에서 홍애등을 바라보니 야경이 무척 화려했습니다.
호기심이 생겨 직접 찾아왔습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는 이 동네 이름이 홍애동인지도 모르고 왔습니다.
낮은 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제법 구경할 만한 곳입니다.
홍애동은 충칭 전통의 산비탈에 기대어 지은 조각루(吊脚樓)식 건물이라고 봐야 하겠네요.
몇 년 전 구이저우 성을 구경할 때 보았던 먀오족이나 동족의 전통가옥인 조각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조각루는 그야말로 비탈진 곳인 언덕에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 지은 집입니다.
위의 사진이 예전의 모습이었나 봅니다.
먀오족은 우리처럼 치우천황의 후손이라고 하며 치우는 한족의 조상이라 생각하는
황제와의 전투에 패하고 그 후손들조차 한족에게 밀리고 또 밀려서 구이저우의
깊은 산 속으로 도망와 살아가는 그런 민족입니다.
홍애동은 예전에는 홍애문이라 불렀답니다.
그리고 구개팔폐(九開八閉)라고도 불렀으며 오래전부터
군사요새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합니다.
높이가 약 75m나 되는 절벽에 붙여 지은 집으로 보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위의 사진은 건너편에서 홍애동의 야경을 찍은 사진을 제가 다시 찍었습니다.
위에서 보면 1층이지만 그 아래로 내려가며 또 방이 있는 그런 모습이지요.
강에서 올려다보면 까마득한 높은 곳이 위에서 보면 1층이 되는 그런 구조 말입니다.
과거 충칭 12경 중 하나인 홍애동의 폭포 떨어지는 모습이라는
홍애적취(洪崖滴翠)가 바로 여기라는군요.
그 외에도 가릉강의 저녁노을 모습이 아름답다는 가릉석양(嘉陵夕照),
장강과 가릉장의 두 물줄기의 합류(兩江匯流) 또한 볼거리라고 하네요.
이런 풍경을 12개나 만들어 충칭12경이라 불렀나 봅니다.
여기가 바로 홍애동의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지요.
이제 이곳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립니다.
홍애동의 모습을 구경하며 삼국지가 펼쳐졌던 그때로 시간여행을 하렵니다.
이런 곳을 다닐지라도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잊고 다니면 안 되잖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민초의 천하입니다.
따라서 덕을 갖춘 사람이 다스리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덕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누가 덕을 지닌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 당시에 여론조사라도 해 보고 하는 말입니까?
유비를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유비에 바람을 잔뜩 넣어 앞장서라고 하고
그 뒤에서 천하 운운하며 살았나 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사실 앞에 선 사람도 더는 내려올 수 없는 처지가 되잖아요.
덕이라는 게 형체가 있어 눈에 보이기를 합니까?
아니면 냄새가 나기에 맡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덕이라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장송은 이런 말로 머뭇거리는 유비를 서천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장악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장송의 마음이 동하여 스스로 서천을 유비에게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한 일이
형주에서 일어났고 그 덕이라는 말을 장송의 입에서 나오게 만든 공명의 작품으로
서천을 삼키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지요.
사실 장송이 서천을 떠나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는 조조를 만나 군사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조조와 언쟁을 하다 죽도록 터지고 그냥 돌아가기 멋적어 생각해 낸 일이
바로 말머리 돌려 이것으로 오게된 사유가 아닌가요?
만약, 천하가 덕을 갖춘 유비를 모시기 위해 몸이 달고 안달했다면
먼저 이곳으로 왔어야죠.
형주에서 서천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바로 여기가 아닐까요?
옛날 파국(巴國)으로 들어가는 입구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부근을 파촉이라고도 불렀다지요.
이렇게 장강을 따라 오다가 이곳에서 가릉강으로 들어서서 물길을 계속 올라가면
바로 서천 근처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지요.
바로 유비는 집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다가 이곳을 지나 서천으로 들어가
종친이었던 서천의 유장을 고향으로 보내고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빼버리고
황제라 칭하고 삼국지의 가장 화려한 시간을 보냈다죠?
중국에는 짝퉁 싸이도 있나 봅니다.
아래 사진을 보니...
그때 바로 감독이 큐 사인과도 같이 한중의 장로가 서천을 넘보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에 서천의 유장은 책사인 장송을 위나라 조조에 보내 그동안 보내지 않았던 조공을
하며 한중을 손봐달라고 하려 했지만, 장송이 조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곤장 100대를 맞고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지요,
동냥을 주지 않으려면 쪽박이나 깨지 말지...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오려다 장송은 유비가 문득 생각나 형주로 발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공명은 미리 장송이 형주로 온다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멀리까지 조자룡을 보내
영접하고 관우는 숙소에 기다리다 첫날의 여독을 풀게 아주 상다리 부러지도록 접대를 하며
감동 이벤트로 뻑소리나게 보내버립니다.
이렇게 장송은 유비의 환대에 감동한 나머지 천하는 유비 같은 군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자기 최면까지 걸게 됩니다.
장송은 서천 41주의 모든 게 기록된 국가 일급비밀인 지도까지 바치니 공명은 그렇지 않아도
일찍이 유비에게 천하 삼분지계의 완결은 서천을 안면 몰수하고 엉덩이 디밀고 비비고 들어가
자리 잡는 일이라 했으니 그곳을 현미경을 놓고 위성을 통해 골목길까지 내려다보게 생겼습니다.
그 지도가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지 도로표시는 기본이고 동네의 가구 수는 물론 특산물까지도
기록했다고 하며 물론, 군사 주둔지나 군사 숫자까지 사실대로 장송이 직접 그려넣었다 합니다.
그런데 지도까지 건네며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장로를 막아달라고 하니
호박이 넝쿨째 대굴데굴 굴러서?
불행은 함께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했나요?
누가 그따위 소리를 했답니까?
그런데 유장은 장로의 위협으로부터의 불행한 일을 종친이라는 유비와 함께 나누려고
불렀더니 유비는 이참에 유장을 완전히 보내버렸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라도 맡겼나요?
그럼 그때에 있었던 일 중, 장비가 이곳을 지나가며 여기를 지키던 엄안과 있었던 일이
있다고 하는데 평소의 장비답지 않게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하여 오늘 이곳에 온
기념으로 장비를 만나보렵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하게 시각을 맞춘다고 하니
장비라고 늘 엉뚱한 사고만 치겠어요?
이렇게 유비는 형주를 공명에게, 양양은 관우에게, 강릉은 조자룡에게, 강변 4군은
장비에게 맡기고 방통을 군사로 황충과 위연 정도의 장수만 이끌고 서천을 향합니다.
물론, 정예병 5만의 군사는 거느리고 서천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군사가 바로 오랜세월 전쟁터에서 닳고 닳은 싸움꾼이라는 게 문제겠지요.
그 군사는 사흘만 막사에서 쉬라고 하면 몸이 근질거린다니 내 칼이 울고 있다느니 하며
싸움거리가 없나 늘 밖을 기웃거리는 전문 싸움꾼이 아니겠어요?
평생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유장의 군사와는 비교불가입니다.
유비가 유장을 만나 첫마디가 뭐였을까요?
"우리가 남이가?"
결과는 남이라도 그리하기 쉽지는 않은 일을 유비는 하고 말았지요.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유비의 깜짝 쇼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당시까지 제법 이름을 떨친 장수들과 공명은 형주와 그 부근에 그대로 남겨놓고
덜 알려진 황충과 위연, 그리고 군사로는 공명이 아니고
방통을 대동하고 서천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유장에 우리가 서천으로 들어가는 일이 서천을 삼키려는 게 아니라
도우러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페인트 모션이라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함께 들어간 정예병 5만은 지금까지 유비와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투의 달인으로 여태까지 싸움 한번 하지 않은 유장의 군사와는
비교하기조차 되지않는 푸로 선수가 아니겠어요?
조기 축구회 수준인 유장의 병사와는 비교불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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