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간포와 문성공주

2013. 9. 9. 08:00중국 여행기/구채구, 쑹판

우리가 흔히 송반(松潘 : 쑹판)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버스를 타고 들어오다 보니

입구에 송주고성(松州古城)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송반은 무엇이고 송주는 또 무슨 말입니까?

그 이름의 유래는 명나라 홍무 12년(1379년)에 이곳 송주(松州)와 주변에 반주(潘州)라는 곳에

두 개 위(衛)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두 개의 주를 하나로 합쳐서 한꺼번에 송반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하네요.

이런 이유로 이곳 지명을 송반이라고 정했다 합니다.

그러나 성문과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패방에는 아직도 송주라고 표기했습니다.

 

이곳과 이 주변은 한족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주로 한(漢), 장(藏), 회(回), 강(羌)의 네 민족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생활양식으로 살아가지만,

서로 다툼도 없이 어울려서 함께 생활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이곳은 그야말로 옛날부터 중원과 주변의 나라가 서로 머리를 들이밀고 첨예하게 대립도 하고

이렇게 어울리며 살았던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바로 차마호시라고 해 중원의 문물과 차(茶)가 여기에서 주변의 소수민족이 생산한 물건이나 말을 교환했던

큰 시장이 열렸던 의미가 아닐까요? 

 

쑹판은 해발 2.850m의 고원 도시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높은 곳이 없잖아요.

그러니 백두산보다도 더 높은 곳이란 말이네요.

그저께 구채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곳을 통과하며 머리도 약간 어지럽고

가슴도 두근거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여러 번 심호흡을 했었습니다.

그래도 구채구에서 더 높은 3.100m를 올랐기에 오늘은 아무 증상이 없습니다.

 

쑹판은 구채구와 황룡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성입니다.

행정구역상 구채구와 황룡은 이 쑹판 시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이미 통일 진나라 이전에 지금 쓰촨 지방의 촉을 공략한 일은 우리가 금우 고역도를 통해 보았습니다.

 

왜 있잖아요.

금 똥 누는 소에 욕심부리며 길을 닦아 놓았더니 한걸음에 그 길로 달려와 나라가 절단난 일 말입니다.

그때 이곳도 진나라의 지역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그때는 티베트는 여러 작은 부족으로 나누어 유목 생활을 했던 시기라고 해 나라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때였다네요.

그로부터 중원의 정권은 이곳이 서부지역의 최전방으로 늘 싸움이 잦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정관 12년(638년) 8월에 토번의 수령인 송찬간포는 당나라에 혼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이곳 송주를 공격했고, 결국은 641년 당태종은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답니다.

이후 당나라의 서부지역은 100여 년 이상 평화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아마도 문성공주의 유효기간이 100여 년이나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곳을 돌아보며 이렇게 역사가 바뀌어 새로운 역사로 변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는 티베탄과 중원의 한족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요?

지금은 마치 한족의 오랜 고향인 것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송찬간포가 군사를 이끌고 공주를 달라고 요구하자 식겁한 당태종은 수차례 군사를 파견했으나 번번이 패하며

체면을 구긴 역사는 사라지고 이 또한 역사 공정인 티베트의 역사 말살 정책이란 말입니까?

한장화친(漢藏和親)의 현장이랍니다.

지금도 밀월 관계가 앞으로 영원히 티베트는 중국의 한 지역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남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을 대표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두 사람...

자랑스럽게 쑹판의 홍보대사로 임명되어 북문 앞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이렇게 서 있습니다.

바로 문성공주와 토번의 찬보라는 송찬간포(松贊干布 : 송첸 감포. Songtsen Gampo)입니다.

 아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는 행복한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 티베탄에게는 불행의 시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 이 두 남녀는 밤낮으로 부끄러움도 모르고 서로 껴안고 성문 앞에 서 있단 말인가요?

과연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왜 북쪽을 바라보고 서 있을까요?

오늘은 하늘도 눈이 시리도록 참 파랗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는 한장화친(漢藏和親)이라는 석비가 서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두 남녀를 내세운 이유는 바로 중원의 정권이 티베탄을 향해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미일 겁니다.

티베트에서는 "그래 남이지!' 하며 오늘도 분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당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있었던 두 사람의 혼인은 윈윈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당나라는 변방의 평화와 안정을 얻었으며 서쪽을 안정시키고 동쪽의 고구려와의 전쟁에 힘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티베트는 중원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임으로 그때까지 유목생활로 집조차 제대로 짓지 못하고 떠돌며 살았으나

농사기술과 양잠의 도입으로 의식주 모두가 천지개벽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게 지금 티베트의 눈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남이가?"

혼인 한 번 잘못해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이 생겨버렸습니다.

다시 송찬간포와 같은 지도자가 탄생해 옛날의 티베트가 된다는 일은

이제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분신 소식이 통제되고 설령 알려진다 해도 폭동이라는 국내문제라고 치부하더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당했던 내선일체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사 왜곡과 무슨 공정이니 뻘짓하는 이유는 옛날을 모두 바꾸자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면 옛날 고구려 땅을...

주인이 배제된 일본과 체결한 간도협약을...

모두 원래대로 돌려야 할 텐데...

 

그래서 역사 왜곡과 동북공정을 반드시 해야 하는 처지에 처했을 겁니다.

이런 공정이 이곳 서쪽에서는 아주 제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왜?

지금 실질지배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그 옛날 두 사람의 좋았던 시절인 그때로 돌아가 보렵니다.

세상에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자부심 하나로 살았던 중원도 때로는 주변과의 역학 관계로

아양도 부리며 살아야 하나 봅니다.

그 대표적인 일이 바로 중원의 여자를 국가적으로 주변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나라로 시집보내는 일이지요.

 

물론 많은 여자가 그리 시집갔겠지만, 제법 유명한 여자가 유비가 그토록 다시 세우고자 했던 할아버지 나라인

한나라 원제 때 흉노족의 선우라는 왕에게 보낸 왕소군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왕소군이야 중국의 사대 미녀 중 하나라고 소문난 여자가 아니겠어요?

원제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리베이트를 챙겼다는 화공을 죽여버렸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이 오늘의 주인공인 문성 공주일 겁니다.

조공은 아닐지라도 주는 처지에서는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왜?

처음부터 주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보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시 토번에 시달림을 받던 당나라는 공주를 뇌물로 보내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토번은 중원의 패자인

당나라의 부마국이 되며 행세깨나 하며 살 수 있으니 서로 윈-윈 게임이 아닌가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가 아니라 이런 경우는 사위 좋고 장인 좋고이네요.

또한, 티베트는 중원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영리한 문성공주는 티베탄에게 다양한 지식과 문물을 전해줌으로

문성공주는 지금도 많은 티베탄에게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네요.

 

그러나 중원의 공주 입장에서 삭풍이 몰아치고 사람 살기조차 만만한 곳이 아닌 이런 곳을 좋아서 찾아갔다는

말은 아니기에 문성공주는 척박한 땅 티베트로 시집을 가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중원에서는 경험해보지도 못한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문성공주는 이름은 공주라 하지만, 사실 당태종의 딸도 아니고 여동생도 아닙니다.

더더욱 이 씨 성을 가진 왕후의 딸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공주라 했으며 티베트로 시집보냈을까요?

우리는 그게 알고 싶은 겁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궁에 들어갔다가 황제인 태종의 눈에 들었다 합니다.

워낙 품행이 단정하고 용모 또한 출중하였기에 태종이 그냥 궁에 살라 했고 공주로 책봉되어 얼떨결에

공주가 된 얼떨리우스 공주표 여인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임금님 표 여주 쌀도 있고 황제 표 수의도 있는데 공주표 여인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쵸?

상대가 모르면 공주로 알고 그렇게 평생을 살다 죽으면 그게 공주가 아닌가요?

지금도 문성공주는 티베트나 중국에서도 공주라 부르고 우리도 공주로 알고 있잖아요.

사실 머리 나쁜 공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이었습니다.

요즈음 공주병 왕자병에 걸려 사리판단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당시 당나라와 주변과의 관계는 무척 골치 아픈 관계로 발전 중이었다 합니다.

중국의 서남부에 자리한 토번이라 부르는 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강성해지며 제법 주변국을 위협할 정도로

무럭무럭 성장 중이었나 봅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생활만 하던 민족인 장족이 논찬농낭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태어나며

주변의 모든 부족을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게 하는 통일의 꿈을 이룬 겁니다.

유목생활로 떠돌이로 살아갈 때는 중원에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하지만, 하나의 깃발 아래 뭉쳐 말을 몰고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중원에서도 그냥 두고만 볼 문제가 아니지요.

원래 혼자 나쁜 짓 하는 사람보다 서클을 만들어하면 같은 짓이라도 파괴력이 더 크고 법적으로도

불법단체라 하여 더 큰 벌을 주는 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기종농찬은 외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로 지혜와 용기를 지닌 사람이며

거기에 엄격한 훈련을 받으며 자랐기에 날개를 단 꼴로 변해갔다 합니다.

신기를 타고났나 과거를 모두 알아 미래를 볼 수 있고 즉석에서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답니다.

신 내림을 받으면 원래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했을 겁니다.

 

여기에 무술 솜씨 또한 뛰어난 인물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답니다.

활쏘기, 말타기, 검술, 씨름, 전략 등

드디어 나이 열세 살에 토번의 국왕이라는 찬보에 올랐고 사람들은 그를 송찬간포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사내가 티베트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영웅의 탄생이라 봐도 될 겁니다.

 

그러나 일찍 선왕이 죽자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니 지금까지 숨죽이고 살았던 귀족세력이 어린 송찬간포를

업신여기고 여기저기서 반란을 도모했다네요.

그러나 송찬간포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씩 처리해 나갑니다.

 

작은 세력은 하나로 단결시키고...

병사와 민초를 사랑으로 보살피니 주변의 여러 세력이 점차 송찬간포의 깃발 아래 다시 모이기 시작하고

드디어 16살이 되자 그 주변에 모인 군대가 1만 명이 넘어서고 그는 군대를 조련하고 그 힘으로 주변을

하나씩 제압하며 다시 하나의 깃발 아래로 모이게 했다네요.

 

633년 드디어 지금의 라싸로 수도를 옮기며 명실상부 제국의 모습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원래 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산남 지방은 남방 지방의 구석진 곳으로 전국을 하나로 묶는 일에는 거리상

부족한 곳이었다네요.

명실상부한 티베트 고원의 중심인 라싸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며 씨족사회로 이루어진 유목민족의 부족 국가에서

제대로 된 나라의 기틀을 세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라싸로 천도하며 티베트는 나라로써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된 것이겠지요. 

시간이 지나자 송찬간포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티베트의 동북쪽에 자리한 소비라는 제법 강한 나라를 점령함으로

주변에 티베트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그러나 송찬간포는 그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웃한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싶어 진 겁니다.

그래서 여러 신하와 머리를 맞대고 (사실 왕과 신하가 남자끼리 머리를 맞댈 사이는 아니지요.)

어찌하면 중원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중 똘똘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재상인 녹동찬이 한마디 했다는군요.

 

뭐라고?

"폐하!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사신을 보냅시다.

그리고 황제에게 혹시 사용하지 않은 여분의 남은 딸 하나 보내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사용하지 않는 딸이라면 보내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똘똘한 사람과 혼인시키겠다고 하면 서로 사돈 간이 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가 아니라 안사돈 좋고 바깥사돈 좋고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인구가 한 사람 늘어 좋고 뽀얀 살 냄새나는 중원의 하얀 피부의 여인을 얻고 그 여인으로부터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오는 문명도 들여올 수 있어 좋고요.

그런 다음 뻔질나게 처갓집이라고 드나들며 어디 폭 고은 씨암탉만 잡아주겠어요?

양념 닭도 있고 푸라이드 닭도 있고 반반씩 섞은 닭도 있잖아요.

이렇게 새로운 닭요리를 포함해 문명도 배워오는 겁니다.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말입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리얼리~~ 오케이~ 그렇게 하자!"

이렇게 송찬간포가 결론을 내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나라에 사절단을 바로 보냅니다.

성질 한번 급합니다.

 

그러나 그때 하필이면 당나라는 북쪽에 있는 토혼국과 돌궐에서도 당나라에 혼인을 요청한 상태였습니다.

당나라 태종이 무슨 공주 생산 공장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딸만 달라고?

"줄을 서시오~"라고 해도 공주가 품절되어버렸습니다.

이미 공주 분양을 위한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줄이 마감이 되어버린 겁니다.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당 태종은 더 많이 생산해 비축해 놓을 건데...

 

여기에 쓰는 이야기는 역사에 바탕을 두었지만, 사실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쑹판 고성에서는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문명의 회오리바람이 살짝 비켜나 별 변화 없이 살아온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슬람 사찰인 청진사(淸眞寺)와 고송교(古松橋), 영월교(映月橋), 7층루(七層樓)등 문화적이나 종교적인 건물이

제법 남아있는 곳입니다.

이제 사진으로 하나씩 구경하며 문성공주와 송찬간포의 러브 스토리도 슬쩍 곁눈질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