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의 모든 것.. 무후사.

2013. 10. 31.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청두는 촉한의 왕궁이 있던 익주라는 곳이지요.

그러나 촉한이 있기전에 이미 이 지역은 촉(蜀)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역사 또한 무척 오래되었다 합니다.

촉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촉나라의 땅에 한나라를 계승하자는 의미로 촉한이라 불렀겠지요?

 

그런데 촉(蜀)이라는 글자는 사실 눈이 큰 사람이라는 의미의 글자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삼성퇴라는 유적이 발견되었지요.

그 유적에서 발굴 된 유물에서 보듯 지금의 중국인과는 얼굴 모습도 다르고

눈이 무척 큰 청동으로 만든 얼굴상이 많이 출토되었지요.

 

당시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아주 앞선 청동기문명이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이곳을 지배한 민족은 지금 중국민족이 아닌 눈이 큰 민족인

이민족이 다스린 지역이라고 해 촉나라라고 했을 겁니다.

외계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지금의 중동지역 사람이었을까요.

아직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의문투성이입니다.

 

무후사로 들어가면 이문에서 앞으로 유비를 모신 사당이 보이고 양쪽으로

촉한의 문무관을 모신 주랑이 보입니다.

오른쪽은 문신랑(文臣廊)이라 하여 유비의 문신 14명을 청나라 때 소상으로 만들어

모셨는데 그 모습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보았지만, 사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고

안다고 다 올릴 필요도 없잖아요.

후손이 봐도 자기네 조상을 알아보기 어려운데 왜 올리겠어요?

그리고 이 조상을 만든 사람도 무슨 근거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사진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가운데에는 문화보국이라는 글을 적은 편액이 걸려있네요.

제일 먼저 얼마 전 백마관에서 죽었던 방통(龐統)으로부터 간옹(簡雍), 부융(傅肜), 여개(呂凱),

비의(費褘), 동화(董和), 등지(鄧芝), 진진(陳震), 장완(蔣琬), 동윤(董允), 진밀(秦宓), 

마양(馬良), 양홍(楊洪), 정기(程畿)를 모셨습니다.

 

수염을 만들어 붙였는데 수양버들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에 문신 중 최고였던 공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

"내가 얘들하고 어찌 같이 놀 수 있겠어~~"라고요?

그래서 유비 뒤에 따로 방을 만들어 모셨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노는 물이 다르다고요~

 

못생긴 걸로 유명한 방통입니다.

삼국지 내용 중에 독자의 예상을 가장 빗나가게 했고 죽는 순간도 제일 허무하게 간 이상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 캐릭터를 사용했으며

왜 그리도 허무하게 보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폼 잡고 등장하지나 말지...

용두사미라는 말이 방통에게 딱 입니다요. 

 

누구겠어요?

그렇습니다.

소 눈깔보다 더 큰 장비의 눈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잖아요.

그 반대편인 왼쪽 장랑으로는 무장랑(武將廊)을 만들어 회랑 가운데 편액에는

무웅지병(武雄知兵)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눈이 큰 사내 시커먼스 장비입니다.

무장랑(武將廊)의 14명의 조소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조운(趙雲), 손건(孫乾), 장익덕(張翼德), 마초(馬超), 왕평(王平), 강유(姜維), 황충(黃忠), 요화(廖化),

향총(向寵), 부첨(傅僉), 마충(馬忠), 장억(張嶷), 장남(張南), 풍습(馮習) 등이 보입니다.

 

촉한의 1대 황제 유비는 223년 4월, 63세로 백제성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며 그해 8월에 촉한의 도읍 성도인 이곳 혜릉(惠陵)으로

이장하였다고 하며 공명이 죽은 지 70년이 지난 304년에 공명을 기리는 무후사를

이곳 혜릉에서 머지않은 곳에 만들었다 합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 고지식한 사람들이 신하가 군주와 같은 곳에 머물 수 없다고 하여

공명의 사당을 조금 먼 곳으로 옮겼다 합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에 화재를 만나 모두 타버린 후 그대로 두었다가 청나라 강희제 때

이곳에 두 사람의 사당을 다시 지어 합체했다고 합니다.

이게 두 사람이 한곳에 모신 것이고 그 때문에 여기가 한소열묘나 혜릉으로 부르지 않고

무후사라고 불린 이유일 겁니다.

 

유비의 조소상이 있고 그 옆으로 아들 유선의 조상을 모시지 않고 손자인 유심을

모셨는데 왜 아들 유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을까요?

유선에 대한 느낌은 佳人만의 생각이 아닌가 봅니다.

여기서도 유선은 왕따입니다.

 

유심은 험준한 음평도를 돌아 익주로 들이닥친 위나라 등애의 군사를 보고 항복하자는

유선의 말에 따르지 않고 강유의 군사와 더불어 익주의 군사를 이끌고 협공하자고 했지만,

그 말이 이루어지지 않자 나라의 운명과 함께 자결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유선은 위나라에 항복한 결과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여기 유심의 조상은 늘 어린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남았네요.

 

유선의 아들 유심은 아버지 유선의 제안한 항복하자는 말에 따르지 않고 자살함으로

자기의 뜻을 알린 덕분에 이렇게 유비 할배 사당에 한쪽이라도 자리하고 있네요.

유선은 비겁했기에 왕따시켰나 봅니다.

족보에서도 파버렸을까요?

 

정말 유선은 나약한 바보였나 봅니다.

적어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라면 나라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누구는 민초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항복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적이 처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으면 바로 항복하면 되나요?

나라가 절단나면 자결로 함께해야 합니다.

침몰하는 배는 선장이 함께하듯...

 

그리고 그 옆으로 관우의 조상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무신을 모신 무장랑에는 장비는 있었지만, 관우가 없었습니다.

같은 도원결의를 했던 형제지만 차별하네요.

관우에 대한 중국인의 속내를 알 수 있습니다.

 

왜 관우는 따로 이곳에 별도로 방을 만들어 모셨을까요?

마케팅의 승리인가요?

관우의 경솔함이 천하 대업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모두 끝장나버리게 한 장본인인데...

 

관우를 모신 사당 입구에 의박운천(義薄雲天)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이는 관우전을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관우(關羽)의 자는 운장(雲長)이니까요.

 

두보의 시 중 팽아행(彭衙行)에 나온 이야기 중 "故人有孫宰(고인유손재),

高義薄層雲(고의박층운)"라는 글귀가 있어 그곳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손재라는 옛친구가 있어 그의 의리는 구름처럼 두터웠다."는 말에서 관우의 운장이

구름을 의미하기에 관우를 지칭했나 봅니다.

 

하늘의 구름이라...

풍선껌 같은 의로움인가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름이란 덧없고 허망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중국은 늘 구름 때문에 햇빛조차 보기 어려워 구름의 의미가 다른가 봅니다.

여기를 잠시 둘러보니 마치 촉한이라는 회사의 본사 같습니다.

CEO부터 모두 모여있습니다.

 

유비전을 지나 더 안으로 들어가면 공명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가 보입니다.

공명 사후에 그에게 내려진 시호가 충무후라서 무후사로 정했지 싶습니다.

이렇게 공명은 살아서도 장막 뒤에서 유비를 조정했고 죽어서도

유비의 뒤에서 유비를 보살피나 봅니다.

유비전에서 무후사로 가는 길은 약간 내리막입니다.

그 의미는 황제와 같은 급으로 둘 수 없어 약간 낮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무후사라는 편액은 곽말약이 쓴 글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곽말약의 글을 무척 많이 만납니다.

중국을 다니다 보면 무후사라는 이름의 공명을 모신 사당을 자주 보았지만,

사실 여기가 본점이고 다른 곳은 지점이나 출장소 정도가 아니겠어요?

아닙니다.

한중 인근 미엔양 정군산기슭에 있는 무후사가 오리지널이고 여기는 짝퉁이지만,

교통이 이곳이 편리하기에 마치 여기가 오리지널로 보일 뿐입니다.

 

무후사 현판은 곽말약의 글씨고 그 아래 "선주무후동비궁(先主武侯同閟宮)]"이라는 글이

보이는대 이 글은 한때 이곳에서 머물렀던 두보의 고백행이라는 글에서 따온 말이라 합니다.

'선주 유비와 무후인 공명이 같은 사당에 모셔져 있었네'라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죽어서도 두 사람은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주군과 그 신하가 함께 모셔져 있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일 듯합니다.

윈윈전략인가요?

그러니 죽어서도 공명의 의견을 묻지 않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에

뒤에 공명의 사당인 무후사 앞에 있나 봅니다.

살아 생전 외국의 사신이 찾아와도 늘 장막 뒤에 공명이 있어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았기에

죽어서도 그리하는가요?

이제 홀로서기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러나 공명에는 '황공무지로 소이다.'일 겁니다.

이렇게 군신이 한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어요?

수어지교(水魚之交)...

 

그야말로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요?

부부라도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예전처럼 애틋한 사랑은 점차 퇴색되고

친구사이로 변해간다 하지요.

부부 사이라도 이렇게 물과 고기처럼 늘 함께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닌데

유비와 공명은 정말 환상의 커플인가 봅니다.

 

어디 사내끼리 이러면 남들이 이상한 눈으로 봅니다.

살아서 한시도 떨어져 지내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죽어서도 앞집 뒷집으로 정답게... 

그런데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나라로 들어갔다가 육손의 화공에 불고기가 되었다지요?

맞아요.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펄펄 끊는 솥 안이나 프라이팬 위에 올라갈 일 외에는 없잖아요.

아~~ 석쇠 위에도 냉큼 올라갈 수 있겠네요.

 

사실 소설 삼국지를 보면 유비보다는 공명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왜?

천기를 읽고 기문둔갑까지 마스터 하니 마치 마술가가 원맨쇼를 하는 듯하니까요.

미래를 내다보는 눈까지 갖추고 있으니 비교 대상조차 없습니다.

가끔 막히면 학우선 몇 번 살랑거리면 또 지혜가 머리에서 막 떠오릅니다.

佳人도 이번 기회에 저 학우선만 하나 장만해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덜수처럼 평생을 살며 공부도 못하고 지혜도 없이 살았기에 이런 사람만 보면 신기합니다.

 

삼국지는 사실 제갈공명의, 제갈공명에, 제갈공명을 위한 판타지 같은 소설이지요.

손을 들어 동남품을 부르고, 하늘을 바라보아 미래를 바라보고

작두 타는 직업도 아니고 이렇게 성공한 예언자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재미있는 걸 어쩝니까? 

 

이렇게 한세상 바쁘게 살다 보니 결국, 그 끝은 과로사로 이어져 5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체 떠났네요.

공명은 워커홀릭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소는 언제 키웠나 모르겠어요.

 

늘 조용한 이인자로 평생을 살았던 공명은 죽어서도 유비의 사당인 한소열묘 뒤를 지키고

있지만, 사실 유비는 일인자가 아니었다는 의심도 가끔 듭니다.

공명을 만난 후 늘 공명의 지시대로 움직인 것 외에는 크게 한 일이 없고 있다면 공명의

반대를 무릅쓰고 똥고집 부리며 출전을 감행한 마지막 전투였던 오나라 침공이었지요.

그러니 촉한의 실제 오너는 공명이고 유비는 법정 관리인이나 얼굴마담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공명이 디자인한 대로 움직인 유비는 공명의 아바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곳의 이름도 무후사이고 그 앞에 도로 이름도 무후사대로입니다.

그래도 황제였는데 유비보다는 모두 공명 세상인가 봅니다.

 

들어가는 입구의 대련에 "양표수삼고, 일대족천추(兩表酬三顧, 一對足千秋)"라고 쓴 글이

보이는데 이 글은 미엔양의 부락산에서 본 글입니다.

"두 번의 출사표는 삼고초려에 대한 보답이고, 융중대는 천고에 전할만하다,"라는 의미일 겁니다.

공명의 출사표에도 나온 말이지만, 삼고초려에 대한 유비의 행동을 공명은 무척 높이 평가했고

그 일 때문에 평생을 유비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무후사(武侯祠)에 와서 제갈량을 추모하며 '촉상(蜀相)’이라는 시를

지었다는데 이 시는 지금까지도 제갈량을 노래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합니다.

 

丞相祠堂何處尋 승상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까
錦官城外柏森森 금관성 밖 잣나무 울창한 곳일세
映階碧草自春色 계단에 비친 푸른 풀은 절로 봄빛 가득하고
隔葉黃鸝空好音 나뭇잎 사이 꾀꼬리 울음소리는 무심하네
三顧頻煩天下計 삼고초려는 천하를 위한 헤아림이요
兩朝開濟老臣心 두 왕을 섬긴 노신의 충성스런 마음이여.
出師未捷身先死 출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뜨니
長使英雄淚滿襟 길이 후세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로 옷깃을 적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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